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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을 접수해버린 고양이들

<월간 채널예스> 201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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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에서 태어난 아깽이들은 어느 새 급식소 단골손님이 되었다. (2019.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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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어느 봄날의 일이다. 외출에서 돌아와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이웃집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자네 이리 좀 와 봐. 자네한테 보여줄 게 있어!"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웃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몇 년 전까지 고양이가 텃밭을 파헤친다며 쥐약을 놓은 적이 여러 번이고, 실제로 그로 인해 단골로 드나드는 고양이들이 여럿 무지개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나는 또 고양이가 텃밭을 파헤친 건가 걱정과 불안이 마구 밀려오는 거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나는 줄레줄레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저것 좀 봐! 저기!"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쪽은 뜻밖에도 텃밭이 아니라 개울 쪽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됐을법한 아깽이들이 똥꼬발랄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내 자네한테 저거 보여주려고 불렀어. 아침 9시 반인가 이래 나와 보니까 고양이가 저렇게 놀고 있더라고. 그래서 아까 갔더니만 집을 비우고 없어서 내 다시 가본 거여. 저거 사진도 찍고 그러라고." 과거에도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달리 고양이에 대해 특별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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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카메라를 가져와 개울가에서 노는 아깽이들을 여러 컷 찍었다. 모두 여섯 마리였다. 고등어, 삼색이, 그리고 노랑이가 넷. 뒤늦게 사진을 찍는 나를 발견한 녀석들은 좌충우돌 혼비백산 둑방의 바위틈으로 숨어들었다. 천변을 마당삼아 냥루랄라 놀던 꼬물이들은 이제 바위틈에서 샛별 같은 눈만 반짝거리며 이쪽의 동정을 살폈다. 그래, 간다 인석들아! 신나게 뛰어놀아라! 그나저나 이 녀석들의 엄마는 누굴까. 저녁 무렵 카메라 없이 다시 그곳에 가보니 어미고양이가 녀석들과 함께 곤히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미는 바로 단골손님인 '또랑이'였다.

 

또랑이는 우리집에 밥을 먹으러 오는 고양이였는데, 도랑을 영역으로 사는 아이라서 내가 혼자 '또랑이'라고 불렀다. 이튿날 한바탕 소나기가 내린 뒤 테라스로 또랑이가 밥을 먹으러 왔기에 나는 캔과 닭가슴살을 잔뜩 내주었다. 녀석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캔은 거들떠보지 않고 닭가슴살만 물고 사라졌다. 그렇게 닭가슴살 물어나르기를 서너 차례, 녀석의 뒤를 밟아보니 목적지는 개울에서 기다리는 아깽이 은신처였다. 그날 이후 또랑이는 내가 내놓은 음식들을 새끼들에게 분주히 물어다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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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배달 서비스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뱃구레가 커졌고, 결정적으로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결국 또랑이는 밥 배달 대신 아깽이들을 데리고 급식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도랑에서 둑방길을 지나 급식소까지 이어지는 또랑이네 가족의 먹이원정길은 아름다웠다. 둑방 너머로는 벼가 웃자라 초록물결이 일렁이고, 녀석들의 행렬 위로는 잠자리떼가 날아다녔다.

 

마당에서 여러 번 원정을 온 아깽이들과 마주쳤는데, 그 때마다 또랑이는 새끼들을 안심시켰다. 그건 마치 ‘저 사람은 안심해도 돼!’(저 사람 호구야), ‘해치지 않아’(사진만 찍어주면 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의 말이 통했을까. 녀석들은 급식소에 머무는 시간이 날마다 조금씩 늘어나더니 이제는 내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거나 텃밭 일을 해도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녀석들은 내가 마당 잡초를 뽑고 있는데도 테라스에서 대문까지 우다다를 하고, 갓 익은 방울토마토를 따서 드리블을 하는가 하면 늙은 호박에 발톱까지 갈았다.

 

길고양이의 우다다를 구경한 분들은 알겠지만, 녀석들의 우다다는 집고양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집고양이가 기껏 선반이나 가구 위를 오르내리는 게 전부라면, 길고양이의 우다다는 훨씬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하다. 가령 두세 마리 고양이가 경주를 벌이듯 달리다가 느닷없이 소나무를 타고 오르는가 하면, 마당 이쪽 끝과 저쪽 끝에서 서로 달려와 마치 트램펄린에서 점프를 하듯 공중곡예를 선보인다. 일종의 싸움놀이를 가미한 마당놀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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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면 어미인 또랑이를 비롯해 다섯 마리(장마철에 한 마리를 잃은 것으로 보임) 아깽이들은 현관 앞을 임시 대피소로 삼았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깽이들인지라 잠시 비를 피해 앉아 있던 녀석들은 툭하면 그곳에서 우다다와 싸움장난을 벌였다. 현관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사료포대를 뛰어넘으며 녀석들은 거의 현관 앞을 자신들의 놀이터이자 아지트로 여겼다. 현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게 못내 미안한 어미 또랑이는 아이들에게 연신 주의를 주지만, 아랑곳없이 아이들은 그런 엄마에게 달려들어 꼬리를 물고 등짝에 올라타 장난을 걸었다.

 

녀석들에게 우리집 테라스는 게스트하우스에 가까웠다. 햇살 좋고 바람 좋은 날이면 녀석들은 테라스 계단을 한 층씩 차지하고 까무룩 낮잠을 잤다. 다층침대가 놓인 도미토리(공동침실) 숙소에서 저마다 곤하게 늘어진 손님들! 세상은 온통 시끄럽고, 마당 앞은 포크레인과 집 짓는 소리로 요란한데, 세상의 평화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고등어가 왔어요. 생물 오징어가 왔어요~" 생선장수 엠프 소리에 잠깐 눈을 뜬 고양이는 이게 뭔 소리여, 하면서 또 잔다. 자는 모습이 천차만별이어서 나는 가만가만 카메라를 꺼내와 연신 셔터를 누르는데, 이건 또 뭔 소리여, 하면서 도로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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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에서 태어난 아깽이들이 어느 날 아장아장 걸어서 먹이원정을 오더니 어느 새 급식소 단골손님이 되어 마당과 현관을 접수하고, 테라스까지 차지하더니 지금은 내 마음까지 완전히 점령하고 만 것이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얘들아! 지구까지 정복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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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용한(시인)

시인. 정처 없는 시간의 유목민. [안녕 고양이]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고양이 춤] 제작과 시나리오에도 참여했으며,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일본과 대만, 중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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