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그의 머플러는 여전히 이상하지만

사람의 일이 사람의 일만은 아닌 걸까?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나는 강사나 교수라 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 편은 아니었다. 그들의 말 중 반은 듣고, 반의반은 믿고, 반의반은 믿지 않았다. (2018. 11. 15)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저런 희한한 머플러를 누가 하고 다닌담?’

 

그는 주황색 바탕에 갈색 점박이가 박힌, 꽤 화려한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잠깐 사람으로 변신한 목도리도마뱀처럼 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안경을 썼고 꼽슬꼽슬한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파마를 한 적이 한 번도 없고, 타고난 곱슬머리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안 것은 시간이 꽤 지나서지만. 저렇게 이상한 머플러를 한 남자와는 5분도 같이 걷지 못할 거라며, 나는 큭큭 웃었다. 그는 ‘소설 창작’ 수업을 맡은 강사였다.

 

나는 강사나 교수라 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 편은 아니었다. 그들의 말 중 반은 듣고, 반의반은 믿고, 반의반은 믿지 않았다. 스스로 납득하기 전엔 누구로부터 온 ‘가르침’이든, 얼마간 의심하거나 회의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가 한 학기 동안 읽어야 할 열 권의 도서 목록을 알려주며, 읽은 순서대로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아홉 권의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써냈지만, 한 권은 읽지 않았다. 리포트도 제출하지 않았다. 그 한 권은 바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였다. 나는 글로 누군가를 유혹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멍청하게도)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유혹하는 글쓰기』 를 읽고는 탄식했다. 조금만 빨리 이 책을 읽었다면, 멍청한 짓을 덜 할 수 있었을 텐데! 

 

소설 창작을 가르치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이었다. 그는 내게 소설을 더 열심히 쓰라고 야단이었다. 재능이 있다는 거다. 수업시간에 발표한 내 소설을 따로 디스켓에(그때는 디스켓을 사용하던 시절이다) 담아오라고 해서 ‘어머, 그래도 보는 눈은 좀 있으시네’, 멋대로 생각하게 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작가가 될지도 몰라!)을 기대하게 해놓곤 일언반구도 없어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소설보단 시를 열심히 쓰고 있다고 하니 ‘너는 시가 아니라 소설을 써야 한다’고 설득했다. 나는 그를 ‘시인들의 나라에서 탈주한 시인’으로 생각하며 예의주시했다. 당시 나는 ‘오직 시만 쓰겠다’는 생각으로 뭉친, 우둔한 주먹밥 같은 애였으니까. 그는 많은 부분 나와 맞지 않았고, 종종 나를 불편하게 했다.

 

지금 나는 그와 같은 집에 살고 있으며 그를 ‘당신’, 혹은 ‘여보’라고 부른다. 그렇게 됐다. 뒤통수에 뜬 머리, 어깨에 떨어진 비듬도 가장 가까이에서 본다. 사람의 일이 사람의 일만은 아닌 걸까? 대학 때 나는 당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면, 그도 지지 않고 말한다. 소설을 조금 잘 쓰던 것을 빼면, 나 역시 너에 대해 기억나는 게 별로 없노라고. 기분이 상해 ‘사실 당신은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고 말하면, 그는 눈도 끔뻑하지 않고 자기 역시 그렇다고 대꾸한다. 그 이상한 목도리? 지금 내 목을 감싸고 있다. 아무리 봐도 예쁘다고 볼 순 없어서, 어울리는 옷을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그의 머플러를 두르고 길을 나서는 것을 좋아한다. 십수 년 전 그와 내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을 때,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때, 그의 목에 감겨 여기까지 따라온 물건이니까. 애틋하다.

 

알 수 없는 세월이 흘렀고, 알 수 없는 세월이 도래할 것이다. 나는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의 머플러를 두르고 길을 나설 것이다. 산책길에 도토리가 ‘딱!’ 소리를 내며 내 머리통을 맞추면, 앞서 가던 그가 배꼽을 잡고 웃을 것이다.

 

내 책상 위에 도토리 몇 알이 있다. “혹시, 영감이 올까 해서.” 라고 말하며, 그가 두고 간 도토리. 중요한 건 첫인상이 아니다. 지금 내가 당신을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있는가. 그게 더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됐을까’ 중얼거리며, 도토리를 가만히 만져보는 시간.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3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저/<김진준> 역15,120원(10% + 5%)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나는 최신 리뉴얼판. 『쇼생크 탈출』『미저리』『그것』의 원작자 스티븐 킹, “나는 이렇게 독자를 사로잡았다!” 할리우드 감독과 제작자가 가장 주목하는 소설가, 영화보다 재밌고 박진감 넘치는 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 전 세계 독자를 매료시킨 스티븐 킹의 글쓰기 비결. 10만 부 판매, 글쓰..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ebook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저/<김진준> 역7,920원(10% + 5%)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고 딱 잘라 얘기하는 스티븐 킹이 속 시원하면서 무척 부럽다. 그리고 신체적 묘사를 통해 인물의 성격을 손쉽게 드러내려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왜 지금까지의 그의 소설들이 스토리텔링을 위주로 하면서도 상습적인 진부함을 벗어날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소설을 읽는다는 건 내가 변하기 위한 일

줄리언 반스의 신작. 영미문학의 대표작가답게 ‘소설은 이렇게 쓰는 장르’임을 입증해냈다.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을 통해 진실의 아이러니를 들춰내고, 인간과 삶의 다면성을 지적으로 풀어냈다. 이 소설을 읽으며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란, 내가 변하기 위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제4회 사계절그림책상 대상 수상작!

심사위원 전원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림책. 보름달이 환한 밤, 기억을 잃어버린 할머니는 여자아이로 변해 아이와 함께 우유갑 기차를 타고 할머니의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꽃밥과 달전, 푸짐한 반찬들로 소담스럽게 차려진 할머니의 밥상은 한가위 보름달처럼 모두를 품어 안는 감동을 선사한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밤의 세계

화가들에게 밤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밤을 주제로 명작을 남긴 거장 16인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낸 정우철 도슨트의 신간. 책을 가득 채운 101점의 그림은 밤의 고요한 시간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밤이 깊어질수록 별은 더 환해진다는 말처럼, 밤의 그림이 깊어질수록 감상의 여운은 길게 남는다.

삶을 구할 수학

피타고라스 정리, 근의 공식, 미적분이라는 말을 들을 때 무엇이 떠오르는가? 생멸을 반복하는 생명과는 다른, 시공간을 초월한 만고불변의 법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수학이 생명의 언어라면? 제목부터 아름다운 이 책은 수학이 삶을 이해하는 데, 살아가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일깨운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