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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시간

『80세 마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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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코다 마리코는 80세의 에세이 작가다. 첫 장면은 원고를 쓰다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증손자 애기가 할머니가 죽었는지 알고 놀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201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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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노인이 된 다음에는 어떤 독립이 필요할까?

 

심리 발달은 지속적 독립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엄마 뱃속에서 아이는 엄마와 한 덩어리라고 여기면서 무럭무럭 자란다. 태어나고 난 다음에도 몇 달 동안은 여전히 같은 상태라고 여긴다. 이 시기를 공생기(symbiotic period)라고 한다. 아이의 자아가 조금씩 발달하면서 엄마와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여기기 시작하고, 세 돌이 가까운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와 나는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시기를 마가렛 말러는 1차 분리-개별화의 완성이자, 대상항상성의 확립이라고 설명한다. 엄마의 존재가 아이의 심상에 내재화되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엄마는 나와 함께 있다고 심리적으로 느끼며 안정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 십 여년이 지나서 청소년기가 되면 수면 밑으로 내려가 있던 분리와 독립의 이슈가 전면으로 부각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한 본능적 욕구가 용솟음 치는 청소년기는 부모와 나의 물리적 독립을 인식했던 첫 번째 분리-개별화를 넘어서서 심리적 독립을 쟁취해야한다는 두 번째 숙제가 인생의 매우 절박한 문제라고 여기게 된다. 이 시기에 10대 청소년은 부모에게 반항하는 행위를 일삼는데, 부모가 잘못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내 것을 만들고 나만의 영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른이 된다. 이제 독립은 끝이 나는 것일까? 아니다. 정신분석가 콜라루소는 3차 분리-개별화가 성인기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성인이 된 다음에 성인으로서 부모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심리적 독립심을 유지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아이를 완전히 내 것으로 컨트롤 하고 싶은 욕구를 참고 역시 아이의 독립을 용인하며 견뎌내는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꽤 복잡한 심리과정을 성인기에 경험하고 또 이것을 잘 풀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30-40대 성인을 상담하다 보면 이런 독립과 관련한 프레임은 꽤 유용하다.

 

고전적 심리 발달 이론은 60대 이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프로이트만 해도 성인기 이후에 대해서 특별한 언급이 없고, 에릭슨도 60대 이후에 발달 과제를 통합과 절망으로 설명은 하나 미흡하다. 아마도 1900년대 초반만 해도 60대 이후로 오래 살아가면서 뭔가를 계획하고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100년이 지나 의학이 발달하고, 과학문명의 혜택을 입으면서 평균 수명이 85세를 훌쩍 넘기게 된 시대가 되었다. 60세가 된 다음에도 최소 20년 이상을 살아갈 객관적 현실이 우리 앞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계획도 달라질 필요가 생겼다. 이전 세대가 길어야 70년을 기준으로 삶을 계획했다면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최소 85년은 살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인생을 고민하고 계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노인기의 심리가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통찰과 지혜를 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는 너무 길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가족과 노령인 사이의 관계 또한 복잡하게 달라지면서 이 관계를 오직 효도와 사랑의 관점으로만 풀 수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우리 앞에 대두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아기, 청소년일 때에는 부모부터 독립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성인기에는 자신의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독립의 요체였다. 이제, 노인이 된 다음에는 어떤 독립이 필요할까? 나는 자신의 자식과의 감정의 끈, 사랑과 돌봄의 의무로부터 독립하고 오로지 혼자만의 삶을 위한 용기를 내는 것이 마지막 독립의 핵심이라고 생각해보았다.


이런 생각을 평소 어렴풋이 갖고 있었는데, 희미하고 애매한 내 느낌을 잘 그려낸 책을 한 권 만날 수 있었다. 오자와 유키의  『80세 마리코』  란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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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자주적 독립의 시도로 보는 연습

 

주인공 코다 마리코는 80세의 에세이 작가다. 첫 장면은 원고를 쓰다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증손자 애기가 할머니가 죽었는지 알고 놀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40대에는 원고가 넘쳐도 다 쓰고, 틈틈이 해외 여행과 연극을 보러 다니던 멋진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군세이 잡지에 에세이 연재 하나만 쓰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현역 작가로 뛰고 있는 멋진 할머니다. 코다 마리코는 최근 정리해고 된 아들, 속도위반으로 아이가 생겨 결혼을 한 손자 부부, 이렇게 4대가 함께 살고 있다. 남편과 함께 지은 오래된 집에서 살고 있는데 15년 전에 남편은 사망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일이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식구들이 자기 모르게 집을 새로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함께 활동하던 작가들은 모두 몇 년 전에 죽었고, 소식이 끊긴지 오래다. 어느 순간 오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근본적 회의가 들게 된다. 자식과 손자 부부가 마리코가 생활하는 공간을 탐내고,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엿듣고는 그때까지 함께 사는게 좋았고, 평생 키우고 아끼는 대상이라고 여긴 자식, 가족들에게 어느덧 자신이 부담이 되었다 여긴다.

 

“내가 좋아서 늙은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좋은 존재.”
“아직도 살아있어서 미안해.”

 

이런 느낌을 갖고 마리코는 어느 날 작은 쪽지를 남기고 홀로서기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와보니 그녀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지낼 곳도 마땅치 않았다. 방 하나 얻으려고 해도 일본의 특성상 보증인이 필요한데 가까운 친구는 모두 사망했고, 자식들로부터 인연을 끊기 위해 훌쩍 나와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고른 곳이 인터넷 카페다. 거기서 쪽잠을 자면서 원고를 쓰는데, 처음으로 마리코는 외롭지만 마음은 편하다고 생각하고, 만화책을 꺼내보며 요새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익히려 한다.

 

이렇게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후들후들 힘도 없고 걷는 것도 위태위태하지만 이와 같은 근본적 물음에 답을 해야할 필요성이 발생하자, 과감히 독립을 결행한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가족의 결속과 가족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에서, 또 효를 중요하게 여기는 공동체에서 자칫 ‘부모를 방임’하는 것으로 여겨지거나, ‘남들이 우리 가족을 어떻게 볼까’라는 두려움이 더 클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인공 코다 마리코가 80세에 분연히 가족에게 부담이 된다는 마음을 갖고 독립을 결행하며 자식에 대한 복잡하고 끊기 어려운 애착을 정리하려고 했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올 수 있고, 또 그때에는 어떤 결심이 필요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만화는 아직 한국에서는 1권만 출간된 상태다. 앞으로 코다 마리코가 남들은 인생을 정리하며 지난 날들을 회상하면서 살아갈 시간에 새로운 삶을 만들어갈지 기대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의 생로병사는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심리적 독립을 하려는 노력의 반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관계의 변화를 내쳐짐, 버려짐이 아닌 자주적 독립의 시도로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노년기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80세 마리코오자와 유키 글그림 | 대원
80세의 고령 할머니의 독립과 로맨스를 담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은 신선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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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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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의 코우다 마리코는 아들 부부와 손자 부부, 종손과 함께 살며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것 같았지만, 아들 부부와 손자 부부 사이에서 주거 문제가 발생하면서 집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마리코는 독립하는 것을 결심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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