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난 잘 지내고 있어요』 편집 후기
잘 지내냐는 물음에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하는 거짓말이 길을 걷는 우리 모두의 그림자 같았다. (2018. 11. 14)
홍대의 거리는 언제나 어수선하다. 즐비하게 서 있는 옷 가게며, 한시적으로 열리는 이벤트로 복작거린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오고 가는 자동차들 속에서 세상의 생기를 느낀다. 또렷하고도 싱그러운 자연의 생기가 아닌, 각자의 개체들이 내뿜는 에너지 속에서 느껴지는 복잡하고도 발 빠른 그런 생기 말이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에워싼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어렴풋 나의 과거를 떠올린다. 또 오고야 만 계절. 연말이 돌아왔다. 매번 당도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그 계절. 연말이라는 이름으로 기억의 문을 두드리더니 어느새 아련함이란 단어로 문을 열고 아쉬움이란 단어만을 놓아둔 채 훌쩍 저 멀리 떠나버리는 시간. 이 계절이 부리는 묘한 회기를 난 이번에도 반복하여 맞이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두어 달이라는 시간 동안 찾아오는 녀석에게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언제나 낯설은 태도로 그 녀석을 받아들인다. 녀석은 내게 묻는다.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물음에 나는 어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다른 이에게 그 질문을 되물어버린다. “잘 지내고 있니?” 일 년에 몇 번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에게 어떤 말로 먼저 대화를 걸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일을 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일. 그리고 그것을 들려준 이를 들여다보는 일. 그것을 받아든 나와 그것을 준 이의 사이에서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
그에게 연락할 때도 난 첫마디를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이는 간혹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뜬금없이 원고 몇 꼭지를 던져놓고 잠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오가는 어색한 침묵을 뚫기 위해 난 멋쩍은 웃음을 짓기도 했고 생뚱맞은 미소를 남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이는 늘 비슷한 태도로 나를 받아들였는데 괜찮아요, 고마워요, 미안해요,라는 말과 같았다. 상황에 따라서 미안해요와 괜찮아요를 번갈아 쓰며 그이는 골목 속에 살아지는 고양이처럼,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고개를 비비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왔다 갔다 했다.
그이의 원고에서 그이를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말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그 말이 내뿜고 있는 의미를 난 모르지 않았다. 알고 싶지만 피하고 싶은 것, 보이고 싶지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들추고 싶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것들을 글자 안에 꽁꽁 싸매서 다시 나에게로 보낸 그이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아는 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이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기에. 돌아보고 싶지 않아서 덮어버리는 것들의 실체를 모르지 않기에. 모르는 척 그이 앞에 섰다.
시안이 나온 종이 앞에서 두 눈동자의 무색한 떨림을 느꼈을 때 난 그이에게 다시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이는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할 걸 알기에. 그 말은 변명이자 다짐 같아서 조금의 생기를 불어넣으므로. 그 순간에는 그 말이 어느 정도 효력이 있을 거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점차 가까워져 갔다.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책의 진행을 핑계 삼아 서로를 마주했다. 언제나 묻는 것은 나였고, 대답하는 것은 그이였다. 그이는 나의 물음에 여러 번 입만 달싹거렸다. 그러면 난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럼, 다음 시안 업데이트되는 대로 찾아뵐게요. 연락은 꼭 받아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이는 매번 그렇듯이 미안해요,라고 혼잣말을 남겼고 난 미소로 그 미안함을 받아들였다. 알 수 없지만 그이에게는 불안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불안함을 인지한 채 노를 젓는 일이 내 일이었다. 침묵에 문을 두드리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이는 고맙단 말을 했고 나는 원래 제 일인걸요,라는 말로 다음 약속을 잡았다. 책이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그이와 나의 거리는 더욱 더 좁아졌다. 그이는 나에게 조금 더 솔직해졌고, 난 그이의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글이 말하고 있는 그이의 마음을, 그것의 실체를 좀 더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도착해야 할 곳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줄곧 난 먼저 앞서 걸었고 그럼 그 이는 말 없이 따라왔다. 간혹 그이가 발걸음을 주저하면 난 그저 곁에 서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만들어주었고,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었다.
우리가 도착해야 할 곳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그이가 먼저 나에게 잘 지내고 있냐고 물었다. 눈으로 뒤덮인 하얀 오타루의 계절이 가까이 왔을 무렵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그이처럼 겨울을 두려워했다. 마음속 끝까지 찬기가 채워지는 게 무서워 겨울에는 사람들의 만남도 피하며 가장 따듯한 나만의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그 계절에 그이가 나에게 안부를 물은 것이다.
잘 지내고 있냐고.
난 대답 대신 이 말을 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를 제목으로 하는 건 어때요? 우리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잖아요.”
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고맙다고 말할 줄 알았던 그이는 다른 말로 우리의 빈틈을 채웠다.
“잘 지내냐고 묻는 안부에 늘 잘 지낸다고 답해왔어요.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늘 속죠.”
그 말이 우리가 가는 그 길에 쓸쓸하게 울려 퍼졌지만 난 다시 걸음을 뗐다. 그리고 그이가 뒤좇았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하는 거짓말이 길을 걷는 우리 모두의 그림자 같았다.
난 잘 지내고 있어요밤삼킨별 저 | MY
현실의 일들이 주는 어쩔 수 없음, 여자로서 사랑을 느꼈던 틀림없던 감정, 설명할 수 없어 ‘그저 잘 지낸다고 말한다’는 잘 지내지 못하는 표현이 담긴 글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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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창간된, 잡지 [PAPER]는 신세대 청년문화를 대변하며 팬덤을 형성하였다. 그 시절 젊은이들의 문화를 주도하는 한편 감성적인 글귀와 사진으로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밤삼킨별. 그녀 또한 매월 페이퍼의 한 꼭지를 담당하며 수많은 [PAPER] 독자들의 새벽 감성을 두드렸다. [PAPER]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