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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명상

살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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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먹다 남은 양념들이 묻은 도자기 접시를 세제 묻힌 수세미로 둥글게 둥글게 닦고 나서 물로 헹굴 때 손가락 끝과 접시 사이의 마찰력이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일으키면 기분이 좋아진다. (2018. 10. 11)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아내가 종종 타박한다. 그래도 할 말은 있다. 나는 설거지를 열심히 한다. 아침마다 설거지를 한다. 평일에 퇴근하고 돌아와서 설거지가 쌓여 있으면 그것도 내 몫이다. 가끔 집에서 고기 구워 먹고 나면 더러워진 불판도 닦아야 한다. 삼겹살 구워 먹은 다음의 설거지가 제일 힘들다. 기름기도 문제지만 불판 사이에 끼어 있는 검정을 깨끗이 없애려면 세밀함과 관찰력, 근력까지 필요하다. 결벽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고기 불판을 닦을 때는 강박증세가 나온다. 빠득빠득 씻다 보면 내 머릿속 생각은 ‘도대체 고깃집의 그 많은 불판들은 어떻게 닦을까, 정말 깨끗하게 닦일 수가 있는 건가!’ 하는 의심에 이르기도 한다. 설거지가 매번 이런 의심을 낳는다면 정신건강에는 독이 되겠지만… 이건 가끔 있는 일이고, 오히려 평소에 하는 설거지는 마음 챙김(mindfulness) 활동 중에 하나다.   

 

설거지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먹다 남은 양념들이 묻은 도자기 접시를 세제 묻힌 수세미로 둥글게 둥글게 닦고 나서 물로 헹굴 때 손가락 끝과 접시 사이의 마찰력이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일으키면 기분이 좋아진다. 프라이팬에 묻은 식용유가 싹 사라지고 나면 뿌듯함이 느껴진다. 숟가락과 젓가락 하나하나를 흐르는 물로 조심스럽게 헹궈낼 때는 가족 건강을 책임지겠다는 경건함이 차오른다. 설거지의 끝은 싱크대 세척이다. 그것까지 끝내야 한다. 물때를 남겨둬선 안 된다. 빛이 반사되어 튀어 오를 듯한 싱크대의 스테인리스 표면을 보고 있으면 ‘세균들도 미끄러져 넘어지겠는데…’라고 상상하며 흐뭇해한다. 그러고 보니 설거지는 세심(洗心)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설거지가 사소해 보여도, 그 안에 애착을 갖는 가치가 담겨 있으면 숭고한 일이 된다.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을 보며 ‘이 물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고 기원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아파트 옥상 물탱크의 파이프를 따라 내려온 물이 우리 집으로 흘러왔겠지. 그 물탱크의 물은 수도관을 따라 한강 어딘가로부터 흘러왔을 것이고. 그 물줄기를 따라 상상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은 어느 가을날 한강변을 따라 드라이브하던 기억에 닿아 있다. 가슴 설레는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강 위로 붉게 타오르던 노을이 보일 때도 있다. 

 

오수가 된 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하수구를 거치고, 정수장을 거쳐서, 강물이 되어 흐르다가 언젠가 바다에 이르겠지. 바다에 닿은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기도 하고, 비가 되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겠지. 설거지하는 동안 나와 지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이게 바로 우주적 의식(cosmic consciousness)이 아닌가! 설거지하는 동안 별 의미 없던 생각과 느낌이 하나로 연결되고, 내면 깊은 곳에 잠겨 있던 기억과 상상이 연결되어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설거지는 가사 노동이 아니라, 명상이로구나!

 

명상이 별건가. 조용한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만 명상이 되는 건 아니다. 일상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면, 살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명상이 된다. 지루한 일상이라도 세밀하게 느껴보려고 노력하면 명상적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지금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태도,ㅤ주변 환경과 집중해서 하나 되려는 자세.ㅤ이것이 행복을 일궈내는 기초다.

 

편협하고 어두운 나르키소스적 관점에서 벗어나 외부의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 그 자체가 마음의 해독제다. 주의력(attention)은 세상과 관계하면서 경험을 쌓아간다는 뜻의 attendere에서 나왔다. 내가 집중하는 것이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현실은 흐리게만 느껴지고, 집중하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도 마음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를 벗어나 세상에 주의를 제대로 기울이지 않으면 삶은 허무하게 느껴지고, 마음은 공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상에서 몰입을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다. 연구에 따르면 하루 한 번 이상 몰입에 이르는 사람은 2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명상이 좋다고는 하지만, 나는 적극적으로 처방하지 않는다. 도대체 명상을 따로 할 만큼 시간을 내기도 어렵거니와 꼭 그렇게 명상이란 이름을 붙이고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작은 일 하나에도 집중하고 살면, 그것이 바로 명상적 삶의 실천이니까. 일상의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우리 마음에 담아두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 자체가 명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마음속으로만 파고들어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다. 

 

“동양인이 정신적 또는 도덕적이라 함은 결과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양인은 덧없는 세상을 버리고 산중으로 은둔하고, 홀로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사람을 성인이라 부르고 고결한 선비라 부른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런 인간을 성인이라든지 고결한 선비라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일종의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용감하게 거리로 나가, 병든 자에게 약을 주고, 가난한 자에게 물자를 베풀고, 사회 일반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몸을 희생하며 일하는 사람을 참된 도덕가라 이르고, 그런 일을 정신적인 사업이라 이르는 것이다.”

( 『그늘에 대하여』 다니자키 준이치로, 눌와)

 

자, 이제 다시 명상할 시간이다. 싱크대 앞으로 가자.

 


 

 

그늘에 대하여다니자키 준이치로 저 | 눌와
사물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견해 속에 작가 자신의 미학을 감성과 이론과 행동으로 관철시키고 있어 작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으뜸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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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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