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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산책

우리 집 개와 처음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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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에는 하루와 처음으로 산책해봤다. 개와 동네를 돌고 들어와서는 외할머니와 집 구석구석을 걸었다. (2018.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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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라 본가에 갔었다. 휴대폰 충전기를 깜박하는 바람에 핸드폰 없이 하루를 보냈다. 아침을 배부르게 먹고 방에 누웠더니, 심심했다. 거실에 나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뺏어 보기도 하고, 친척 어르신들 틈에 앉아 보기도 하고, 엄마의 책을 꺼내 몇 장 읽기도 했지만 지루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방 저 방을 어슬렁거리는데 한쪽에 누워있는 강아지가 보였다. 열네 살이었나, 열다섯 살이었나. 오래전부터 이 집에 사는 강아지 ‘하루’다. 이 개가 우리 집에 오던 해에 나는 집을 나왔다. 우리 집 개가 맞긴 하지만 몇 번 볼 일이 없었던, 조금은 서먹한 개다.

 

“엄마, 나 하루랑 산책하고 올게. 목줄 좀 줘.” “안 그래도 낯선 사람이 많아 계속 짖고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잘 되었네. 다녀와!” 엄마는 내가 하루와 단둘이 산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연스레 목줄을 건네 받았고 녀석과 첫 산책을 나섰다. 가족들과 다 같이 걸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둘이 나선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은 나와 하루만 아는 듯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데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본 사진이 생각났다. 강아지가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있는 사진 위로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마!!! 인간아!!! 산책 나가야지!!!! 니 서마터폰 중독이다!!!’ 그걸 생각하며 혼자 킥킥 웃었더니 엘리베이터 문만 보고 있던 하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아니야. 하루야, 아무것도 아니야.” 입을 다물고 입꼬리만 올리고 조금 더 웃었다.

 

엄마, 아빠가 이 아파트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번이 세 번째인가. 몇 번 와보지 않아 내게는 낯선 동네다. 하루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앞장서서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자신 있게 걸어간 쪽으로 따라가니 공원과 놀이터가 나왔다. 저쪽에서 하루를 발견한 아이들이 뛰어왔다. 아이들이 가까이 오자 하루는 으르렁거렸다. “엄마! 이 개가 나 물려고 해!” 말없이 하루의 목줄을 툭툭 당겨 도망치듯 반대편으로 빠르게 걸었다. 인적이 드물고 나무가 많은 쪽으로 가자 하루는 온화한 할아버지처럼 걸었다. 그렇게 이쪽으로 저쪽으로 걸어봤다. 하루는 부지런히 걷다가도 한 번씩 내 쪽을 올려다봤다. 나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다가 걔를 한 번씩 내려다봤다. 내 속도로 걷다가 천천히 걸어보기도 하고, 차나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어디까지 가나 줄을 풀어주기도 했다. 강아지의 마음을 몰라 어떻게 걸어야 할지 난감하긴 했지만, 제법 근사한 산책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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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음식이 소화도 되었겠다. 낮잠을 잘 요량으로 침대에 누웠다. “선아야 좀 나와봐! 할머니, 화장실에 모시고 가.” 엄마는 어떻게 할머니를 모시고 화장실에 가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며 손으로 잡채를 주물럭거렸다. 외할머니는 눈이 안 보인다. 보통은 엄마가 화장실에 모시고 가는데 바쁘니 내가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할머니를 부축하는 일은 하루와 엘리베이터에 섰던 것보다 더 어색했다. 할머니 어깨는 원래 이만큼 좁았던가. 화장실 문턱이 이렇게 높은 거였나. 변기까지 할머니를 무사히 앉히고 등을 돌리고 섰다. 등을 돌리고 나서야 할머니는 내가 어떤 모양으로 서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할머니를 보지 않고 뒤돌아 서 있었다. 오줌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시간에 한 번씩, 서너 번을 더 그 행동을 반복해야 했다. 세 번쯤 할머니를 모시고 안방으로 들어와 오줌 소리를 들을 때는 ‘할머니와 산책은 강아지와 하기보다 더 어렵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에는 나무가 있고요. 오른쪽에는 놀이터가 있어요. 놀이터에는 아이들 셋이 있고 나무가 있는 쪽에는 작은 벤치가 하나 있네요. 어느 쪽으로 가고 싶으세요?” 어디로 가야 할지 할머니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선택하실 수 있게 눈앞의 풍경을 자세히 설명해드리는 일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하루나 할머니와 산책 한 번 하지 않고 뭐하며 살아왔을까. 그런 걸 잊고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내가 한동안 서성이는 마음으로 지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멀뚱거리며 서 있었는데 하루와 할머니 덕분에 조금, 아주 조금 어디론가 걸어갈 수 있었다. 다음 명절에도 외할머니와 하루를 만날 수 있을까.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할 때, 나는 개다리의 움직임에서 동물적인 삶의 기쁨을 느낀다. 개다리가 땅 위에서 걸어갈 때, 개다리는 땅과 완벽한 교감을 이룬다. 개의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다리가 땅을 밀어내는 저항이다. 개의 몸속에 닿는 이 저항이 개를 달리게 하는데, 이 저항이야말로 개의 살아 있음이다. 개 한 마리가 이 세상의 길 위를 달릴 때, 이 세상에는 놀라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74쪽)
- 김훈  『라면을 끓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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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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