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그해 여름은 비가 지독했다. 장맛비가 자주 방으로 밀고 들어왔다. 축축한 등이 먼저 알았다. 그럴 때면 책상 위로 올라가 쪼그려 앉곤 했다. 물이 차오르는 모양을, 빨간 쓰레받기를 들고 물을 걷어내는 엄마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언제나 물이 이겼고, 나대신 책이 울었다. 비가 그치면 물에 불어 망가진 책을 추려 쓸모를 구분했다. 이제는 다시 구할 수 없는 유년의 책들은 그런 식으로 수장되었다. 다음 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니다, 가지 못했다. 문에서 세 계단, 다시 두 계단을 딛고 오르면 공기가 달랐다. 햇볕의 틈을 찾아 젖은 책을 널어놓으며 신에게 빌었다. ‘2층으로 이사 가게 해주세요.’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던 해, 일찌감치 상업계고 진학을 마음먹었다. 나는 지하에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난이 지겨웠다. 진학 서류를 요청했을 때 담임선생님은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엄마에게는 합격하고서야 알렸다.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선택’이라고 믿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믿으려고 했다. 좀체 나아지지 않는 형편의 이유가 온전히 우리에게만 있는 거라면, 더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이 수렁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믿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이었다.
편모가정인 것, 사글세방 지하에 사는 그런 것들. 중학교에서는 매우 소수의 친구에게나 겨우 나눌 수 있는 비밀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은 감춰지지 않았다. 나는 때때로 친구들 사이에서 배제됐다. 고등학교에서는 달랐다. 나는 그곳에서 내 불행과 가난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때로는 아버지가 없다는 게 ‘자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서울 각지에서 이 학교로 모여든 아이들은 대개 고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출한 남동생을 찾기 위해 조퇴하는 날이면 정임은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은 몸으로 뒤늦게 등교했다. 학칙은 아르바이트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소영은 매일 하교 후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불판을 닦았다. 근무 중 왼손 손가락 대부분이 잘린 세진의 아버지는 직업병을 앓았고, 동생이 셋이나 있는 윤주의 엄마는 알콜의존증 환자였다. 우리는 우리의 구만리 같다는 앞길이 너무 캄캄해서 겁이 났다.
그런 우리에게도 ‘고3’ 시절이 있었다. 80%에 가까운 또래들이 수능 준비에 열을 올리는 동안, 20% 안에 속한 우리는 반을 합치고 밥을 합쳤다. 이미 많은 친구들이 취업으로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반의 취업되지 않은 아이들이 와서 채웠다. 3학년 2학기 수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는 라디에이터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각자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검토하며 낄낄댔다.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다고 해봐. 그럼 물이 반‘만’ 남은 게 아니라,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걸 어필해야 해.” 서류통과자 지선의 ‘꿀팁’에 한껏 진지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각자 준비해온 재료로 비빔밥을 해먹었다. 매일 먹어도 매일 맛있었다. 관악산 자락의 학교는 너무 추웠고, 뭐라도 끓여먹을까 싶어 연재가 집에서부터 들고 온 휴대용 가스버너는 압수당했다.(선생은 소리쳤다. “학교를 불태울 작정이야?”) 첫 월급을 받기 시작한 친구들은 있는 돈 없는 돈을 아껴야 한 학기에 한 번이나 갈 수 있었던 봉사리(봉천사거리) 피자벨에서 한턱 쐈다. 제 회사가 있는 강남역 인근으로 우리를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다른’ 고3이었다. 11월이 되자 온갖 방송 매체에, 길거리에 수능 특수가 나부꼈다. ‘나도, 나도 고3인데…’ 이유 없이 억울했다. “몇 학번이세요?”를 인사로 묻는 사회에는 내 자리가 없었다. 수능 전날, 우리는 우리가 보지도 않을 수능시험을 대비해 책상 대열을 새로 맞췄다. “내일은 학교 안 와도 된다”라는 선생의 말에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을 지나 9년차 기자가 된 지금도 나는 교육 이슈 앞에서만큼은 중요성을 가늠하지 못해 허둥댄다. 정확히는 교육이 아닌 ‘대입’이다. 나는 늘 대입을 둘러싼 이 사회의 풍경이 기이하다. 대입개편공론화위원회를 꾸리고, 그 결과를 우리 매체를 비롯한 거의 모든 언론이 비중 있게 보도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도 모른다. 대입 만을 관장하는 게 아닌 교육부장관이 이 문제를 이유로 개각 대상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다, 안다. 대입 전형에 사활을 걸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과대 대표 되어 있다.
『우리 아이들』 의 부제는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이다. 400쪽 남짓 길지 않은 책을 한 달에 걸쳐 어렵게, 어렵게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 때문이었다. 정임, 소영, 세진, 윤주, 연재‘들’의 얼굴이 행간 위에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16년차지만 고졸이라 여전히 주임 직급을 달고 있는, 비정규,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하는, 너무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원치 않는 전업주부가 된 나의 그때 그 친구들. 우리에게는 특별히 운이 좋은(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에어백’이 없었다.
“교육받고 부유한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사회학자들이 ‘약한 유대 관계’라고 부르는 것, 즉 다른 사회 분야의 지인들(정신과 의사, 교수, 경영인, 친구의 친구 등)과 광범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회적 유대의 범위와 다양성은 사회 이동과 교육적, 경제적 진출을 위해 특히 소중하다. (중략) 가난한 부모와 그들의 자녀에게는 간단히 말해 이러한 것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303쪽)
미국 공공정책 분야의 대가인 저자 로버트 D. 퍼트넘은 이번 연구를 진행하며 배움이 숫자보다는 ‘이야기’에 있음을 깨닫는다. 연구팀은 녹음기가 돌지 않을 때 노동계급에 대한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노동 계급 응답자들과는 인터뷰 날짜를 잡는 단순한 일조차 쉽지 않았는데, 이는 “지속적인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마침내 인지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 세대가 지닌 부와 행운이 상당부분 ‘노력’이 아닌, 공동체적이며 평등주의적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도. 기회 격차가 정치적 평등성을 손상시키고, 그 결과 민주적인 정당성도 훼손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에 우리 또한 연루되어 있음(331쪽)”을 반성한다. 미국의 가난한 아이들 운명이 경제와 민주주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당연한’ 결론을 인터뷰라는 질적 연구에 온전히 기대지 않고, 양적 연구로도 충분히 증명해낸다. 그저 당연하다고 넘길 수가 없다. 이건 모두가 짐작할 수 있고 알다시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 역시 1인분의 책임이 있는,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진짜’ 어른이 됐다. 빈부 격차가 가져온 기회의 차이는 단시간에, 단 하나의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른인 내가, 또 우리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어린 사람에게 ‘운’이 되어주는 일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다.(371쪽)”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았으면 좋겠다.
“십대: 이쁘다고 말해주고 싶다, 너에게. 그때 그 불만투성이의 노여움과 서러움으로 가득한 내 눈빛을 보고 이쁘다고 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마음사전』 김소연 지음/ 마음산책 펴냄, 274쪽).
※ 이 글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장일호(시사IN 기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주 ‘이상한 수치심’을 느낀다.
연연
2018.08.29
북버드
2018.08.28
krko78
2018.08.28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