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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낭독한 여름

중요한 건 책 내용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소리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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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서는 이야기를 훔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나를 죽어라 따라온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2018. 08. 23)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도피하기 위해 자주, 책을 들었다. 어릴 때는 무시무시하게 큰 입을 벌린 그림자들이 나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책 속에 코를 묻었고, 커서는 크고 자잘한 고민과 생활고에서 잠시 놓여나려고 책을 들었다. 책은 잠시, 그 세계로 몰입한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나를 떼어놓았다. 내가 현실을 벗어나려 애쓴 게 아니라, 책이 애썼다. 책이 가진(혹은 이끌어내는) 능동성이 내 피동적 웅크림을 토닥였다. 숲을 베어 작은 종이묶음으로 변한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서 다시 숲이 되었다.

 

스물한 살인가. 어쩌면 스물둘이나 셋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선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 있었다. 자원봉사. ‘자원(自願)’이란 말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봉사하러 갔다. 학교에서 소개해준 여러 일 중 마음을 끄는 게 있었다. 그 일은 하루에 네 시간씩 총 여덟 차례, 구로구에 있는 어느 관공서에 방문해 책을 낭독하는 일이었다. 물론 녹음을 위해서. 내 음성이 녹음된 테이프는 시각장애인의 독서를 위해 사용될 거라 했다. 그 무렵 나는 폴 오스터 소설  『달의 궁전』 에 빠져 있었는데, 그 책의 주인공이 하는 아르바이트가 어떤 할아버지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었다. 그 아르바이트가 얼마나 재밌어 보이던지! 나는 두근거렸다.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여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티셔츠와 청치마 차림의 내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녹음하러 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직원들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나는 비좁은 녹음실에 혼자 들어갔다. 방음시설이 잘 되어 있어 아무 소리도 들고 나지 않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태어난 소리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 방. 나는 헤드폰을 쓰고 책을 대강 훑어본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낭독을 시작하면 꼭 진공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 홀로 작은 수영장 물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 누군가를 향해, 누군가에게 닿고 싶어 헤엄치지만, 나만 가득한 세상. 나는 내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앞을 보지 못하는 당신의 그림자를 상상했다. 어느 날은 지독히 재미없는 사회학 교재를, 어느 날은 약간 흥미로운 심리학 책을 읽었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책 내용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소리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음이 엉키면 정지 버튼을 누르고, 되돌아가서 녹음했다. 직원들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 내 일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 혼자서는 대단한 임무를 맡은 듯 설렜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허공에 감은 눈을 맡기고, 내 목소리를 따라 책에 가까이 가는 사람은. 그때 녹음된 내 목소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녹음이 끝나면 오늘 읽은 분량을 담당 직원에게 말하고, 복도에서 기다렸다. 직원이 녹음 상태를 대강 체크하고 서류를 내밀면 날짜 옆에 사인을 했다. 그가 바쁠 때는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비치된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어느 날은 단편소설집을 읽고 있는데, 책이 너무 재미있어 빠져버렸다. 직원이 불러 뭔가를 이야기하고, 사인하고, 인사하고, 여름으로 가득 찬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까지, 나는 그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전동차를 타고 자리에 앉아, 책을 다시 읽는 동안에도 나는 그 책을 그냥 가지고 나와 버렸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처음으로 책 도둑이 되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책은 내가 훔친 게 아니라 나를 따라온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도둑질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죄의식이 조금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었다. 모든 죄의식에는 약간의 흥분이 섞여있다. 잘못을 반추하면서 생기는 감정의 보플 같은 것. 정말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여름, 내가 낭독한 책들 역시 나 모르는 곳으로 흘러갔을 텐데. 한 권 정도는 나를 따라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가?

 

모든 독서는 이야기를 훔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나를 죽어라 따라온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달의 궁전폴 오스터 저/황보석 역 | 열린책들
시간적으로는 20세기 초반에서부터 후반까지, 공간적으로는 혼잡한 도시에서부터 황량한 변경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을 가로질러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적절하게 넘나들며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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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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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저/<황보석> 역9,000원(0% + 5%)

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은 자신의 삶을 극단으로 몰아감으로써 인생을 배워나가는 세 탐구자들의 초상을 매혹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공간적으로는 혼잡한 도시에서 부터 황량한 변경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을 배경으로 주인공 3대의 개인사가 펼쳐진다. 그들 모두는 이지러졌다가 다시 차는 달처럼 퇴락의 길을 걸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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