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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자, 영감과 휴식이 필요한 순간에 대하여

휴식에서마저 가성비를 찾으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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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남의 상승세와 하락세는 눈에 잘 보이지만 정작 내가 나를 파악하는 건 참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인가? 에이, 아직은 아니지? 지금인가? 설마, 벌써? 망설이고 또 망설였고, 미루고 또 미뤘다. (2018. 07. 30)

신예희의-독립생활자_5회-그림.jpg

 

 

문득 손이 근질거릴 때가 있다. 뭐가 되었든 그림을 그리고 싶고, 어떤 글이라도 쓰고 싶다. 영감이 온 것이다. 기승전결을 갖춘 구체적인 형태가 아닌 가느다란 실마리거나, 평평한 표면 위에 살짝 튀어나온 작은 흔적 같을 때가 많다. 작고 연약해 하찮아 보일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귀하다. 발견하자마자 아이구 오셨어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하고 홱 당겨본다. 재수 좋으면 거기서 뭐가 나오기도 한다.

 

한 번 쑥 당겨서 큼직하고 거창한 월척을 잡는 일은 무척 드무니, 보통은 그 실마리와 흔적에서부터 시작해 떠오르는 대로 이리저리 메모하거나 손 가는 대로 일단 뭐든 그려본다. 나는 주로 카카오톡을 이용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어 기록한다. 가방에 넣고 다니는 작은 스케치북과 펜도 잘 써먹는다. 모두 유용하고 고마운 도구다. 이런 것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영감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말았을까? 스케치북을 펼치고 붓펜을 꺼낸다. 처음부터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같은 걸 슥슥 그릴 수는 없으니, 일단 백지에 점이라도 찍고 선이라도 그어본다. 백지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백지는 나든 혹은 누구든, 어서 무엇이든지 그려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그게 내가 되어야지.

 

열심히 쓰고 그렸지만, 때론 어째 죽도 밥도 아닌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다. 뭐 어떻습니까. 죽도 맛있고 밥도 맛있지만, 중간 단계도 나름 괜찮습니다. 김가루 좀 뿌리고 참기름도 살짝 둘러서 매콤 달달하게 무친 꼬들꼬들한 오이지를 곁들여 한입 먹으면… 라고 쓰다 보니 내가 지금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다. 하여튼, 일단 뭐가 되었든 간에 자유롭게 휘갈겨보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우담바라 수준으로 귀하다는 영감이 온 순간에 내가 그 손을 잡지 못한다면? 너무 바빠서 영감의 부름을 받아들일 짬이 없다면? 마치 공짜 아이스크림을 나눠주는 행사장에 왔지만 한 손은 가방을, 다른 손은 장바구니를, 옆구리엔 책을 잔뜩 끼고 있어 아이스크림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같다. 아이스크림이야 다음에 또 먹으면 되지만 영감은 영영 다음을 기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여유가, 여백이 필요하다. 더 길고 더 잦은 휴식을 누려야 한다.

 

다양한 장소를 찾아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나에게 휴식이란 이런 것이다. 의무와 부담을 내려놓고 자연스레 오감을 동원해 눈앞의 새로운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한껏 느끼고 즐기는 사이, 어느 순간 손이 근질거리며 뭔가 하고 싶어질 것이다. 몸을 충분히 불려 놓으면 때가 술술 밀리듯이, 창작의 영감이 둥실둥실 떠오를 것이다. 그동안 퍼다 쓰기만 하느라 어느새 바닥이 드러났던 내 속이 다시 찰랑거리며 넉넉히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마음의 기초체력이 탄탄히 쌓여,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설렌다. 좋다. 휴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니, 오늘은 쉬겠노라 선언한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자체 월차를 쓸 자격이 있다. 내가 사장이니 내 마음이다(물론 부하직원은 없습니다). 맛있는 것도 먹어본 사람이 더 잘 먹고,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더 잘 논다. 오랫동안 일, 일, 일만 하느라 제대로 휴식을 취해본 경험이 없어 요령도 부족하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자체 반차와 월차를 주기적으로 사용하며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더 긴 휴식이 필요했고, 텅 빈 속을 제대로 꽉꽉 채우고 싶었다. 나의 아버지처럼 실컷 책을 읽고도 싶었다. 열흘에 한 번 꼴로 부모님 집에 놀러 가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거의 항상 거실 소파에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길게 누워 책을 읽고 있다. 최근엔 더 크고 더 편해 보이는 새 소파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도서관의 대출 한도까지 책을 빌려와 소파에 누워 꿀떡꿀떡 삼키듯이 그걸 다 읽고, 반납하러 가선 다시 새로운 책을 빌려온다. “어이구, 좋으시겠어요!”라고 웃으니 “부럽냐? 너도 해!”라고 남 얘기하듯 말씀하신다. 아니 이 아저씨가… 너무하시네….

 

나도 책을 실컷 읽고 싶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실컷 하고 싶었다. 그런 시간을 한껏 누리고 싶었다. 오랫동안 참으로 많은 여행을 참으로 바쁘게 다녔으니, 이젠 느긋한 체류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나왔네. 좋아, 해보는 거야. 그런데 언제? 그야, 모든 게 다 준비되었을 때 떠나야겠지? 계획을 들으신 아버지가 의견을 내놓았다.

 

“일이 한참 잘될 때는 섣불리 가지 말고, 어느 순간 기세가 꺾인다는 느낌이 들 때 가라.”

 

오, 뭔가 그럴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상승세와 하락세는 눈에 잘 보이지만 정작 내가 나를 파악하는 건 참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인가? 에이, 아직은 아니지? 지금인가? 설마, 벌써? 망설이고 또 망설였고, 미루고 또 미뤘다.

 

그런데 그 대화 이후 일 년, 이 년, 삼 년쯤 지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적절한 시기, 최상의 때 같은 건 영영 오지 않겠구나. 그렇다면 답이 나왔네. 내가 가고 싶을 때 가야겠네.

 

그렇게 지금 나는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돌며 체류 중이다. 준비 과정은 말처럼 매끄럽고 쉽지만은 않았지만 어쨌든 해냈다. 어느 날은(바로 오늘 같은 날)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어느 날은 이래도 되나 싶게 침대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처절하게 뒹군다. 어느 날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어느 날은 내 그림을 그린다. 돈이 썩어나고 시간이 흘러넘쳐서가 아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뒤로 할 것은 뒤로 하고 떠났다. 나만의 우선순위를 생각해 그에 따라 결정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너무 바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공부도 일도 쉼 없이 달렸고, 나 즐겁자고 시작한 취미마저 경쟁심으로 불타올라 참으로 열심히 했다. 여행도 극기 훈련하듯,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수천 장씩 찍고 온갖 음식을 와구와구 먹었다. 그래야 제대로 한 것 같았다. 몸과 마음에 배인 습관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휴식하면서도 같은 짓을 하는 것이다. 자, 이만큼 쉬었으니 효과가 있겠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대단한 효과가 날까?

 

이거야 원, 진통제도 소화제도 아니고, 휴식에서마저 가성비를 찾으려 든다니 슬프다. 40년 넘게 그렇게 살았으니 거기서 벗어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긴 휴식의 사이사이, 괜히 불안해지고 불편해지는 마음을 살살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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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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