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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다 거두는 묘약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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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꾼다는 걸 안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진다. 영혼이 교감한다고 느낀 두 사람은 몸으로도 소통하고 싶어한다. (2017.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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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의 한 장면

 

열흘 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 야경을 보고 있었다. 목적지인 프라하에 가기 전 들렀던 도시. 카페 골목엔 커다란 무쇠 냄비에서 과일을 통째로 넣고 끓인 와인 향이 퍼져 있었다. 차가운 바람과 달콤한 향이 뒤섞여 있는 거리에서, 이건 꿈이라고 중얼거렸다.
 
짧은 꿈에서 깨어 현실의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헝가리 영화를 보았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의 여주인공 표정은 헝가리 카페 주인을 닮은 듯 단단해 보였다. 이방인인 내게 보여주지 못하는 뜨거운 감정이 숨어 있는 거겠지.
 
한쪽 팔이 불구인 도축장 재무이사 엔드레는 사랑에 회의적이고 더 이상 흥미도 없는 식물성 남성이다. 어릴 때부터 결벽증과 대인기피증으로 영혼 불구인, 기억력이 비상한 신입 도축 검사원 마리어는 사랑에 무감각한 금속성 여성이다. 식물성 엔드레와 금속성 마리어가 일하는 도축장은 죽음이 흔한, 생명력이 사라진 효율적이고 모던한 공간이다.

 

그들은 매일같이 도축장으로 일하러 와 단순하게 수많은 죽음을 처리한 뒤 밝은 구내식당에서 무미한 식사와 무의미한 대화를 나눈다. 직장은 삶의 표상. 분별심이 분명한 그들에겐 진실한 소통도 정감 있는 참견도 없는 편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숲속 깨끗한 눈밭에 사슴 두 마리가 있다. 영상이 아름다워서 잠깐 숨을 죽였다. 사슴의 눈빛은 그야말로 무구했다. 바로 이어진 영상은 도축장에 끌려온 소들의 불안한 눈빛들.
 
눈밭의 사슴과 도축장 소가 무슨 맥락인지 30여 분 지나서야 확연히 알았다. 그 사슴 두 마리는 꿈속의 존재였다. 엔드레와 마리어가 꾸는 꿈이었다. 추상적으로 말하는 ‘함께 꾸는 꿈’이 아니라 그 둘이 모르는 채 각각의 침실에서 꾸는 ‘같은 꿈’이었다.
 
도축장 약물 도난 사고로 경찰이 투입되고 반강제적으로 직원들의 행동 변화를 조사하는 정신감정사의 상담을 통해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신감정사의 현실적인 반응은 ‘두 사람이 짜고 장난치는 것’이겠거니였지만 두 사람은 무의식 속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영상을 직접 보지 않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영화가 있다. 가령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애를 써도 타인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의 일디코 엔예디 감독은 <화양연화>를 레퍼런스로 삼았다면서 “매번 반복되는 일상의 표면 아래 들끓고 있는 열망과 염원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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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의 한 장면

 

매일같이 삶과 죽음이 오가는 비정한 세계, 피와 살점이 흔한 도축장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감춰진 열망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맑고 밝은 숲속의 설원, 자유로운 사슴의 생명력이 가득한 판타지 세계를 꿈꾸는 것은 자연스럽다.

 

‘같은 꿈’을 꾼다는 걸 안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진다. 영혼이 교감한다고 느낀 두 사람은 몸으로도 소통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조용하고 건조하고 내성적인 두 사람의 관계는 소통의 입구에서 쉽게 좌초한다. 좌절한 마리어는 욕조에서 깨진 유리로 손목을 긋는다. 도축장에서 보이던 붉은 피가 그녀의 손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죽음의 세계엔 어떤 꿈의 판타지도 없다.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앤드레의 전화가 걸려오고 사랑을 고백한다. 마리어는 필사적으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불구의 몸과 무감각의 몸이 만난다. 죽음을 건너온 몸이었다. 함께 눈뜬 아침에 안드레는 묻는다. “꿈을 꾸었느냐”고. 꿈이 현실이 된 첫날의 질문.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는 답.
 
이토록 고요하고 이토록 강렬하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독특한 영화. 독보적인 이 여성감독의 연출은 조금도 잊고 싶지 않다. 도축장의 살점들과 부러뜨려지는 뼈들마저도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느껴지는 영상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다. 아, 바로 이런 열망이 꿈이겠지. 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 글은 쓰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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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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