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헤어드라이어 응징 사건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도대체 작가 10년째 같이 사는 태수 이야기
태수는 자기 짓이 아닌 듯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가전제품의 전선을 이빨로 씹어서 끊을만한 구성원은 우리 식구들(사람 셋, 개 하나) 중에서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2017.10.30)
태어난 지 두 달쯤 되었다는 강아지가 처음으로 집에 온 날, 식구들은 이름 짓기 회의부터 열었다. 저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름을 하나씩 말해봤지만 어느 것도 온 가족의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강아지를 안아 올리며 말씀하셨다.
“테-스?”
“테스? 여자 이름이잖아. 얘는 수컷이야.”
“그래? 그럼 안 되겠네.”
“아니지. 비슷한 발음으로 태수라고 하면 되지. 그래, 태수 괜찮네.”
그렇게 그 귀여운 강아지는 ‘테스’와 발음은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많이 다른 ‘태수’가 되어 우리 가족으로 살기 시작했다.
태수는 아주 얌전한 강아지였다. 한창 이가 나면서 근질거릴 때 문지방이며 방문, 의자 다리 같은 곳을 갉긴 했지만 그 정도였다. 용케도 자기한테 사준 장난감들만 가지고 놀았다. 인형을 물어뜯어서 몸통의 솜을 꺼내버리기도, 건전지로 움직이는 장난감 강아지의 숨통을 1분 만에 끊어버리기도, 들어가서 쉬라고 사준 개 전용 텐트를 박박 긁어 커다란 구멍을 내기도 했지만 어쨌든 자기 소유의 물건들만 착실히 망가뜨렸다. 인간의 물건이라면 가지고 놀라고 내준 것이 아닌 이상 슬리퍼 한번 물어뜯지 않았다.
그런 태수가 세간을 망가뜨린 사건이 있었다. 헤어드라이어의 전선을 씹어 똑 끊어버린 일이었다. 망가진 드라이어를 들고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 옆에서 태수는 자기 짓이 아닌 듯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가전제품의 전선을 이빨로 씹어서 끊을만한 구성원은 우리 식구들(사람 셋, 개 하나) 중에서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태수가 처음으로 고장 낸 세간이 드라이어였던 게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 나는 아직도 일부러 그런 거였다고 믿고 있다. 태수도 여느 개들처럼 목욕 후에 털 말리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몸이 푹 젖은 상태에서는 체념한 듯 누워서 이리저리 드라이어 바람을 쐬다가도, 털이 거의 다 마른 것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이제 그만해!’란 듯이 짖으며 온 집안을 뛰어다니곤 했다.
그런 태수의 눈으로 바라본 드라이어는 어떤 존재였을까? 웅- 웅- 한없이 시끄러운 데다가, 더운 입김을 뿜으며 달려드는, 있는 거라곤 입밖에 없는 괴상한 요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놈만 사라진다면 앞으로는 목욕한 후에 털을 말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니 기회를 엿봐서 혼내줘야겠다고 전부터 마음먹었겠지. 그리고는 식구들이 없는 틈을 타서 감행, 전선을 잘근잘근 씹고 또 씹어 드디어 드라이어의 숨통을 끊어낸 것이다! 그 순간 이 작은 개가 얼마나 의기양양했을까?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웃느라 태수를 혼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태수의 응징은 보람 없었다. 인간이 절연 테이프라는 것을 이용해 드라이어를 다시 살려놓은 것이다. 그때 부질없음을 깨달았던 것일까? 태수는 이후로 다시는 어떤 세간도 망가뜨리지 않았다.
만화 에세이 단행본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를 썼습니다. 반려견 태수와 함께 십 년째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