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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씨, 당신이 달리 보이네요

『이지원 피디의 누구나 한번쯤 스페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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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달리 미술관만큼은 놀이동산보다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달리가 원한 것도 그거였을지 모른다. 어차피 이해하기 불가능한 인간. (2017.10.23)

 

 

그림 1.jpg

 

지로나에서 다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피게레스는, 달리가 나고 달리가 죽은 ‘달리의 도시’다. 사실, 달리 미술관 말고는 별달리 볼 게 없는 곳. 하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살바도르 달리 도메네크(Salvador Dal? i Dom?nech)는 1904년 5월 11일 피게레스에서 태어나 1989년 1월 23일 피게레스에서 죽었다. 공증인 아버지 덕에집안은 부유했고 85세까지 장수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사실에 최고의 희열을 느낀다.”

“나의 꿈은 내가 되는 것이다.”

 

명언과 망언을 오가는 엄청난 자기애의 화신 달리에게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가늘고 길게 붙여 올린 요상한 콧수염이다. 꿀을 발라 고정시킨 건데, 말쑥한 신사 이미지와 달리


실상은 파리가 들끓었다나? 잘 땐 늘 숟가락을 물고 잤는데 그 이유는 꿈을 꾸다 숟가락이 떨어지면 그 소리에 깨서 잊지 않고 재빨리 꿈에서 본 장면을 그리기 위함이었다고. 애완견 대신 개미핥기를 끌고 다니거나 한번은 코끼리를 타고 시가행진을 벌인 기억도 난다고 내가 묵었던 집 주인장이 이야기해줬다. 4차원이 아니라 16차원 정도 되는 진짜 원조 ‘돌아이’라면서.

 

펩시콜라가 코카콜라를 이기기 위해 블라인드 테스트로 승부를 걸었던 것처럼 미술관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달리와 맞닥뜨리고 싶었다. 녹아 흐물거리는 시계를 그린 그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들어갔는데, 달리의 걸작은 건물 자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래 극장이었던 건물이 스페인 내전을 겪으며 흉가가 된 것을 1969년에 달리가 미술관으로 변신시켰다. 친히 설계도를 그리고 공사를 지휘했는데 본인 작품뿐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직접 선정하고 배치하는 큐레이터 역할까지 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가 있다. 인형술사인 주인공이 7과 1/2층에 위치한 이상한 회사에 취직했다가 우연히 실존 배우인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달리 미술관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달리라는 괴짜의 머릿속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어떤 괴상망측한 상상들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느낌.


귀신의 집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안목과 센스가 넘치는 귀신의 집이었다. 입구에서 약도를 나눠주지만 일부러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다녔다. 어차피 논리적인 동선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었다. 발길 닿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문제의 방에 들어섰다.

 

메이 웨스트의 방


메이 웨스트(Mae West)는 20세기 초 흑백영화 시대의 섹스 심벌이었던 미국의 여배우다. 1934년 어느 날 달리는 신문을 보다 그녀의 기사에 영감을 받고 <메이 웨스트의 얼굴을 이용한 아파트>라는 그림을 하나 그렸다. 사람 얼굴을 왜 이렇게 망쳐(?)놨느냐는 질문에 달리는 “난 단지 거실을 그렸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 가구를 제작해서 진짜로 거실을 만들었다.

 

구성은 간단하다. 벽에 걸린 두 점의 풍경화, 벽난로, 그리고 빨간 소파 하나. 끝. 그런데 평범한 거실로 보이던 것이 전시실 한쪽에 있는 계단에 올라 돋보기로 한눈에 조망하면 사람의 얼굴이 된다. 벽난로는 빛나는 콧구멍이 되고 빨간 소파는 섹시한 입술이 된다.

 

그림 2.jpg

 

아무 연관이 없는 이미지로부터 익숙한 요소만을 추출해 의미 있는 형상으로 인식하는 걸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현상이라고 한다. 설원에서 눈이 녹아 드문드문 드러난 땅을 보고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믿거나, 보름달 속 월계수 아래 방아 찧는 토끼가 보이는 게 그런 예다. 한번 얼굴이라고 인식하니 계속 얼굴로만 보이던 거실을 아주 가까이서 거꾸로 바라보니 다가서니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섹시한 입술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소파도 뒤에서 보면 사람의 엉덩이 모양이다. 코 입장에선 엉덩이 냄새를 맡고 있었던 거다.


이번엔 거실 천장을 올려다보자. 탁자랑 욕조까지 진짜 가구들은 죄다 천장에 붙어 있다. 탁자 위에 놓인 램프는 다시 거꾸로 아래를 비추는 조명 역할을 하고 있다. 아래와 위를 달리 보게 만드는 것. ‘이 세상에 과연 하나의 완벽한 진리란 존재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달리는 완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완벽하지 못한 걸 두려워하지 마. 어차피 죽을 때까지 도달하지 못할 테니까.“

 

솔직히 허세라고 생각했다. 그냥 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운 좋은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테마파크 같은 달리의 머릿속을 자유이용권을 끊고 즐기다 나오니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엔터테이너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달리 미술관만큼은 놀이동산보다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달리가 원한 것도 그거였을지 모른다. 어차피 이해하기 불가능한 인간.

 

미술관 지하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 서서 살짝 귓속말로 고백해줬다. 달리씨, 역시 소문대로 다르긴 다르시군요.

 


 


 

 

이지원 피디의 누구나 한번쯤 스페인이지원 저 | 중앙북스(books)
일반 관광객이 아닌 학생이자 생활자의 신분으로 낯설고 매력적인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포함해 인근 나라의 도시들을 날카로운 피디의 눈과 낭만적 가슴으로 때론 담백하게, 때론 치열하게 탐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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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지원(PD)

예능 피디, 작사가, 작가. 지금껏 60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언론정보학과를 거쳐 2000년 SBS 예능국 피디로 입사했다. <유재석의 진실게임> <이효리의 체인지> <김정은의 초콜릿> <하하몽쇼> <정글의 법칙> <도시의 법칙> 등 수많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기획, 연출했다. 다비치, 앤씨아 등의 작사가로도 활동했으며, 저서로 『이 PD의 뮤지컬 쇼쇼쇼』 등이 있다. facebook,instagram ID:@ez1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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