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섬, 군함도의 진실
광복절을 맞아 진행된 군함도 및 역사 적폐에 관한 특강 민족문제연구소의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라고 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실을 모르고서 이야기하게 되면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어요. (2017.09.06)
지난 8월 26일, 충정로역에 있는 벙커1에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특강이 진행됐다. 최근 뜨거운 이슈로 주목을 받는 군함도와 관련해 지난 3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발간했다. 생각정원에서 출간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해 싸워온 피해자, 유족, 한일 시민의 목소리를 한 권에 응축한 책으로, 총 18명의 필자가 집필에 참여한 “하나의 민족운동사” 같은 책이다.
광복절을 맞아 기획된 이번 특강은 ‘군함도의 진실’과 ‘역사 적폐를 말한다’라는 주제로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승은 책임연구원과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강연을 맡았다. 1부의 진행을 맡은 김승은 책임연구원은 2년 전 일본의 군함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언급하며 말문을 열었다.
지옥섬, 군함도의 진실
“군함도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2년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시설을 등재할 때 군함도를 포함한 거죠. 흔히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하면 문화재나 역사 유적을 생각하는데 산업혁명 유산시설은 산업혁명과 관련된 산업시설을 새롭게 유산으로 지정하는 거예요. 세계문화유산 내에 기록유산과 함께 새롭게 생긴 하위 범주인 거죠. 주로 유럽이나 미국에서 등재되었는데 일본이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시설로 지정됐다는 건 아시아 최초로 유일하게 산업혁명에 성공한 나라가 일본이라는 걸 알리는 거죠. 특히 군함도는 일본의 산업혁명이 얼마나 화려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뽑혀요.”
김승은 책임연구원은 일본이 전체 8개 지역에 23개의 시설이 세계산업유산으로 등재됐다며 비판해야 할 점을 차례로 설명했다. 하나의 산업유산이라는 제목으로 한반도보다 넓은 지역의 다양한 시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이상하며 그 시설들을 메이지 시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녀는 무엇보다 아시아를 침략해 강제 노동을 시킨 대가로 성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선인 강제노동과 관련된 5개의 시설은 모두 중공업에 속하며 그 시설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는 일본이 아시아 침략전쟁을 통해 근대적 개혁과 산업화에 성공했던 시기로, 그 시대의 중공업 시설들은 일본이 산업혁명이 아니라 대외적 침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나가사키 조선소는 미쓰비시 회사의 소유입니다. 미쓰비시는 지금도 일본 자위대 군함의 30%를 만들어요.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본이 주변 나라를 침략할 수 있도록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인데 그게 세계 문화유산이 된 거나 마찬가지죠. 미쓰비시는 식민지 시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보상은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는 기업이에요. 미쓰비시가 소유했던 다카시마 탄광도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 유산 시설로 등재되었고요.”
군함도로 알려진 하시마 탄광은 1910년 이전에는 건물이 없었다. 최고의 기술력이 응집되었던 화려한 하시마 섬은 1916년 이후의 모습이었다.
“메이지 시대는 1912년이니까 일본이 주장하는 산업혁명 유산에 포함돼서는 안 되는 거죠. 미쓰이 미이케 탄광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통해 재벌이 된 기업의 소유에요. 미쓰이 탄광은 러일 전쟁 때 노동력이 모자라자 전용 감옥을 만들었고 정부를 통해 죄수를 동원해 탄광을 운영해요. 이후 죄수들이 값싼 식민지 조선인으로 대체됩니다. 마지막으로 야하타 제철소는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 결과로 받은 배상금으로 설립해요. 일본이 전쟁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근본적으로 메이지 시대의 성장은 침략 전쟁 없이 설명할 수 없어요. 일본의 침략 전쟁이 주변 아시아를 어떻게 파괴했는데 그 역사가 담기지 않고서는 안 되는 거죠.”
강제 노동과 관련된 시설에 대한 설명을 마친 김승은 책임연구원은 정한론의 핵심적 근거를 제공한 정치사상가 요시다 쇼인의 개인 학당인 ‘쇼카손주큐’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쇼카손주큐’에서 사상을 실현하고자 성장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나 강화도 침략을 주도한 기도 다카요시 같은 사람이에요. 문제는 이 시설도 세계문화유산이에요. 일본의 아시아 침략 사상이 세계인들에게 인정받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인류가 잘못한 과거를 반성하고 반복하지 말자고 유네스코를 만들었는데 그 정신에 어긋나는 거죠. 아우슈비츠는 70년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어요. 산업혁명시설이 아니라 부끄러운 인류의 역사라는 것에 가치를 둔 거죠. 그런데 일본은 침략의 역사를 숨기고 산업혁명의 아름다운 면만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일본은 메이지 시대의 전쟁이 침략 전쟁이 아니라 방어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유네스코에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을 조건부 등재로 결정했다. 이 시설들을 통해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때만 등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17년 12월 1일까지 그 해석 전략을 제출하게 되어 있다. 뒤이어 그녀는 현재 일본 정부의 행태를 지적했다.
“일본 정부가 지금 하시마섬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고 있어요. 하시마는 지옥섬이 아니라고 하는 내용의 증언이죠. 동경의 수재가 다 모인 곳이었으니까 편안하고 높은 보수로 직장생활을 한 사람도 있었겠죠? 그들에게 미담을 수집하는 거예요. 배고픈 조선인 노동자를 위해 따뜻하게 밥을 해줬던 일본인 식당 같은 미담이요. 역사를 아름답고 이상하게 미화하려고 시도하는 거죠.”
나아가 김승은 책임연구원은 군함도, 즉 하시마섬에 집중했다. 남북길이 480m, 동서길이 160m, 둘레 1.2k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 하시마. 그곳은 어떻게 지옥섬이 되었을까.
“하시마섬에 탄이 발견되면서 작업장으로 주목을 받았는데요. 미쓰비시가 일본 정부로부터 하시마섬과 함께 죄수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인계받았고 그걸 조선인 노동자에게 적용하게 되는 거죠. 미쓰비시는 그 비결로 모집이나 알선을 하게 되고 대규모로 조선인을 동원하는 기업으로 성장합니다. 조선인의 강제 연행과 강제 노동이 이렇게 가능해진 거죠. 일찍부터 죄수를 이용해서 탄을 캐니까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지옥 섬이라는 인상이 있었어요. 미쓰비시 소유 이후 하시마가 점점 커져서 1916년에 아파트를 짓게 됩니다. 지상의 환경 좋은 곳에는 일본인 엘리트가 살지만, 빛도 안 들고 습기가 가득한 지하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살게 돼요. 목욕탕, 위안소로 활용되었던 식당, 병원, 학교, 신사까지 하시마섬은 초록이 보이지 않는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어요. 지하에는 1000m까지 갱이 있었고 그곳엔 조선인이 갔어요. 마찬가지로 다시는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지옥도였던 거예요.”
또한, 그녀는 조선인들이 군함도까지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대규모로 조선인이 동원된 건 1937년 중일전쟁 이후예요. 1939년부터는 모집의 방식으로 조선인을 모으고 그다음부터는 관이 알선해요. 할당량이 주어진 거예요. 일본인의 증언으로 마을마다 40~50명씩 할당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일본은 징용령에 의한 징용이 1944년부터라고 하는데 저희는 1939년부터 강제동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모집 단위에서부터 조선인들에게 사기를 쳤다던가 강제적 폭행의 연행 과정이 있었다는 증언이 매우 많기 때문이에요. 또한, 노동자로서 근무 조건을 선택하거나 그만둔다는 게 불가능했어요. 이런 강제 노동이 모집 단위부터 징용 단위까지 관철되어 있었던 거예요. 또 모든 시기에 대우나 노동의 조건, 임금에서 인종 차별이 있었어요. 당시 증언에 의하면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하시마섬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요. 증언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지만, 총체적 인원 같은 정보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일본 정부나 미쓰비시가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다만 1943년에서 1945년 사이에 500명에서 800명까지 간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시마섬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노동 상황은 어땠을까. 조선인의 숙소는 최하층에 있었는데 가장 악취가 심하고 습한 최악의 환경이었다. 제공되는 식사는 늘 부족했으며, 그마저도 중간관리자가 착취해갔다.
“힘들고 배고프다고 하면 일본인 관리자가 욕을 했고 밤마다 아픈 사람들의 신음이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특히 막장에 조선인들이 많았는데 그곳은 높이가 50~60cm밖에 안 돼서 누워서 탄을 캐야 했대요. 바닷물이 늘 떨어져 피부가 짓누르고 감기와 폐렴에 걸렸는데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화장실이 없어서 지하수는 늘 오염된 상태였어요. 그런데도 목을 축일 수 있는 건 지하수밖에 없고. 지하는 40도의 고온이었는데도 조선인들은 작업을 늦출 수 없었어요. 3교대 8시간 근무가 43년에 2교대 12시간 근무로 바뀝니다. 할당량을 채우기 전까지는 지상으로 갈 수 없었어요. 말 그대로 극한의 감옥이었던 거예요. 일본인과의 인종 차별도 심했습니다. 100%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해요. 모든 탄광이 똑같은 조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월급을 받거나 고향에서 편지나 송금을 받은 사람도 있어요. 다양한 양상이 있었지만, 그 모든 현장은 강제 노동이고 강제 연행이었어요.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폭에서 강제 노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끔찍한 노동환경에 대한 설명에 이어 그녀는 하시마는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는 섬이었다고 덧붙였다. 초기에 치료했으면 살 수 있었을 사람이 사망자가 되었다. 살기 위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중간에 익사하거나 실패해 비참하게 끝났다.
“겨우 육지에 닿아도 다시 끌려와 공개적인 장소에서 타이어로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맞았어요. 다른 노동자들이 그걸 보고 탈출할 수 없도록 통제하는 거죠.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약 123명의 조선인이 죽었는데 그중 절반이 병사고 나머지 절반은 사고사에요. 이 사고사에는 고문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이 정보도 일본의 시민단체가 겨우 찾아낸 단편적인 사실이고요. 일본인의 경우에는 자살률이 높았는데요. 이는 좋은 대우를 받았던 사람도 자살하고 싶을 만큼 힘든 곳이었다는 얘기죠. 지옥 같은 군함도에서 죽은 후에도 조선인의 유골은 버려지고 방치되었습니다. 1978년에 폐광된 하시마에 있던 유골은 다카시마로 옮겨지는데 다카시마가 1988년에 폐광됩니다. 그리고 그 유골들의 행방은 찾을 수 없게 됐어요. 행방불명이 된 거죠.”
우리 시대의 ‘역사 적폐’
김승은 책임연구원은 마지막으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건립 예정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홍보한 뒤, 군함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하며 80여 분의 강연을 끝마쳤다. 그리고 잠시 후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2부 강의를 위해 무대 위에 올랐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알기 쉬운 예를 들며 우리 시대의 ‘역사 적폐’가 무엇인지, 진보-보수-수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적폐 세력을 뜯어내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먼저 어떤 세력이 적폐인지를 알아야 해요. 그리고 그러려면 진보, 보수, 수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게 필요합니다. 보수는 과거가 아니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것, 앞으로도 이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진보는 이대로는 못한다,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진보에는 두 종류의 진보가 있습니다. 급진 진보와 온건 진보. 부분적으로 바꾸면 온건 진보, 근본적으로 바꾸면 급진 진보예요. 보수와 진보는 각각 자신의 도덕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의 진보가 문제가 뭐냐면 새로운 도덕을 가져왔을 때 보수는 더 도덕적이지 않다고 믿는 게 오해에요. 오히려 보수는 합의를 봐온 도덕이지만 진보의 도덕은 낯선 경우가 많아요. 이게 오해라는 거죠. 그러니까 진보와 보수는 누가 더 도덕적이냐 물을 수 없어요. 다만 누가 더 도덕적이려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제삼자의 마음을 획득할 수 있는 거죠.”
보수와 진보의 개념에 관해 설명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수구에 대한 설명에 앞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진보와 보수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한국 사회에는 진보와 보수를 나눌 기준이 거의 없어요. 모든 국민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건 헌법이죠. 그중에서도 헌법 전체를 기본적으로 규정짓는 하나의 가치관이 헌법 전문입니다. 1948년 제헌헌법이 만들어졌을 때 생겼죠. 헌법 전문에 따르면 자주, 민주, 평화가 헌법의 3대 정신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죠. 독립 국가여도 독재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은 민주 가치에서 독립과 평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거죠. 2조부터 130조까지 헌법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권리고요. 민주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의 가치에요. 이걸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상 사회가 아니라는 거죠. 1919년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헌법인 임시헌장이 만들어졌어요. 임시헌장의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이에요. 100년 된 가치라는 거예요. 작년 촛불 혁명은 민주공화국 수호였던 거고요. 온건 진보는 민주를 유지하기 위해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거고, 급진 진보는 자본주의하에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으니 체제를 바꾸자는 거예요.”
현재의 시선을 유지하는 보수, 거기에서 평등과 삶의 조건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온건 진보, 체제를 바꿔서 혁명해야 한다는 급진 진보. 그렇다면 수구는 뭘까. 헌법 파괴 세력이 수구라고 그는 주장했다.
“헌법으로 따지면 보수는 현존하는 헌법 1조의 기본가치 지지 또는 유지이고 온건 진보는 헌법 1조의 내용 확장 또는 개선, 급진진보는 근본 체제의 전환 추구에요. 수구는 헌법 1조 부정 또는 과거 회귀죠. 과거가 뭐냐, 헌법 1조를 부정하는 시대를 의미하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장면 총리,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수구 세력에 가까워요. 그럼 왜 그들이 무려 68년 4개월 중 57년 8개월동안 대한민국을 점령했을까요? 6ㆍ25 전쟁 때문이에요. 민족 최대의 비극인 6ㆍ25 전쟁이 수구에게는 최고의 축복이 된 거죠. 끔찍한 경험을 한 6ㆍ25 세대는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요. 6?25 전쟁을 경험한 아기부터 노인까지 다 6ㆍ25 세대죠. 그 공포를 우리가 인정해줘야 해요. 수구는 그 공포를 이용해요. 선거 때마다 공포를 유발하는 거죠. 전쟁보다는 차라리 독재가 낫다고 생각하게끔 말이죠.”
나아가 그는 대한민국의 수구 세력을 정의하고 더 이상 수구가 유지되지 못한 이유를 차례대로 설명했다.
“첫 번째가 6ㆍ15 선언이에요. 화해와 협력을 위해서 남한의 대통령이 최초로 북한에 간 거예요. 지금 세대들은 반공이나 복수가 아니라 악수를 봤어요.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에요.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 때는 남북의 교류까지 있었어요. 수구 세력은 이걸 보고 6ㆍ25 세대에게 지금 세대가 종북이 되고 있다고 이야기해요. 두 번째는 2008년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에요. 이명박 대통령이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낮다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 국민들이 분노한 거죠. 이 분노가 폭발한 건 중학생들과 유모차 부대가 거리로 나오면서부터였어요. 중학생들이 ‘살려주세요’, ‘미국소가 싫어요’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와요. 수구는 이걸 보고 또다시 6ㆍ25 세대에게 지금 세대가 반미라고 이야기해요. 지금 세대의 부모는 빨갱이고 학교는 이미 전교조가 장악했고 국가는 지난 10년 때문에 좌경화가 됐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6ㆍ25 세대가 군복을 입고 나오기 시작한 게 태극기 부대의 시초에요.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의 핵심은 수구가 처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 탄생했다는 거예요. 국민의 의무가 아니라 국가의 의무를 요구하는 세대가 탄생한 거예요.”
마지막으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오늘날 수구의 뿌리가 독재가 아니라 친일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국정 교과서와 건국절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연을 마쳤다.
“새로운 세대가 수구 세력의 뿌리가 친일파고 한국 해방 후에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라는걸, 온갖 범죄의 주동자였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수구에게 미래가 없어진 거죠. 그러니까 역사 교과서 국정화로 가게 되는 거예요. 더 이상 젊은 세대에게 표를 못 받으니까 국정 교과서를 통해서 세뇌시키려고 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사를 수능 필수로, 취업 시장의 필수로 두는 거예요. 이게 역사 쿠데타고, 건국절 논란으로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역사 적폐의 뿌리는 친일에서 시작해서 친미로, 독재로 이어져요. 나아가 반공과 냉전으로 무장해서 헌법을 파괴해왔어요. 이들의 총체적 바이러스가 역사 적폐에요. 촛불 이후 5년은 수구 일제 청소기라고 잡아서 그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민족문제연구소 저 | 생각정원
길게는 20년, 많게는 30차례에 걸쳐 시베리아에서 파푸아뉴기니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남아 있는 비극의 역사 현장에 찾아가 취재하고, 피해당사자와 유족, 목격자의 구술.인터뷰를 생생하고 촘촘하게 기록했다.
관련태그: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 일제 강제동원
글이 가진 힘을 믿는 사람. 꾸준히 읽고 쓰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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