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흔적이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한다
『상처의 인문학』 연재
마쓰모토 세이초의 삶은 세상이 정해놓은 규범과의 싸움이었다. 문단과 학계는 초등학교밖에 졸업 못하고, 그때만 해도 싸구려 장르로 일컬어지던 추리소설을 쓰는 데다가 늦은 나이인 마흔한 살이 되어서야 데뷔작을 내놓은 세이초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기적
마쓰모토 세이초, 「어느 고쿠라 일기전」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
1909년 6월 19일 일본에서 한 소년이 태어난다. 소년은 대지주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다. 부친은 중의원 의원과 귀족원 의원을 지낸 지역의 명사였다. 집안에는 하인이 서른 명도 넘었다. 소년은 도쿄대학 불문과를 중퇴했으며, 스물여섯 살에 세상을 충격에 빠뜨리는 소설을 발표한다. 결혼 후에도 여러 여자와 염문을 뿌리며 애인과 동반자살을 시도하는 등 물의를 일으켰다. 그리고 『인간 실격』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일본 최고의 소설가에 이름을 올린다. 서른아홉 살이 되던 1948년, 소년은 결국 내연녀와 함께 자살하고 만다. 이 소년의 이름은 다자이 오사무였다.
다자이 오사무가 태어난 1909년 12월, 일본에서 또 한 명의 소년이 태어났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동네의 조그만 전기회사에서 심부름하는 것이 소년의 첫 번째 직업이었다. 이어서 인쇄공과 청소부로 일했고 밤에는 광고지에 삽화를 그려 넣는 아르바이트를 마다하지 않았다. 휴일에는 빗자루를 팔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열아홉 살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으며, 감옥에서 경험한 폭력과 차별에 분노하여 자기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으로 신문기자가 되려 했으나, 기자가 되려면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좌절한다.
기자가 되는 대신 소년은 신문사에서 기자들 뒤치다꺼리를 하는 급사로 일했다. 신문을 만드는 일, 나아가 세상에 뭔가 보탬이 되는 작업에 자신의 보잘것없는 삶이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소년은 박봉과 무관심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20년 가까이 신문사에서 일했지만 차별은 소년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정식기자가 아니었으며, 단 한 번도 회식이나 상여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초대받은 회사 망년회 자리에서는 고위 임원이 그가 못생기고 더럽다며 술도 따라주지 않았다. 정의가 살아있으리라 믿었던 신문사에서도 소년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소년은 못나고 힘없는 자신을 받아줄만한 곳을 찾아 기대기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나가리라 결심한다.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한 1948년 겨울이었다. 그 사이 소년은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고, 부모님을 부양해야 했으며, 네 아이를 먹여 살려야 되는 처지가 되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부업을 하느라 2년 동안 출퇴근길에 소설을 썼다. 이렇게 완성된 첫 번째 소설을 공모전에 출품했다. 3등으로 입상했다. 소년은 어느새 마흔한 살의 중년이 되었다. 이 소년의 이름은 마쓰모토 세이초(1909-1992)였다.
“그런 걸 조사해서 어따 쓰시게?”
하고 옆에 있는 후지에게 툭 내뱉듯이 말할 뿐이었다.
그런 걸 조사해서 어따 쓰시게? 그가 툭 내뱉은 이 말이 고사쿠의 마음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혔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작업에 의미가 있을까? 괜한 일에 나 혼자 오기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문득 자기 노력이 전혀 쓸데없이 보이고 갑자기 떠밀려 난 기분이 들었다. K의 편지마저 겉치레 인사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희망은 갑자기 사라지고 새카만 절망이 엄습해 왔다. 이런 절망감은 이후에도 종종 불쑥불쑥 일어나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마쓰모토 세이초, 「어느 고쿠라 일기전」중에서
신경계통 문제로 왼다리를 절고, 언제나 입을 반쯤 벌린 채 말도 제대로 못하는 고사쿠라는 청년에게 소설가 모리 오가이는 이룰 수 없는 꿈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어느 날 모리 오가이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고쿠라(小倉)에서 한철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고사쿠는 고쿠라에서 모리 오가이의 행적을 조사해보기로 결심한다. 모리 오가이가 이곳에서 누구를 만났으며, 어디를 찾았고,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사하는 이 변변찮은 과정에 고사쿠는 조롱받기 일쑤인 자신의 존재를 투영시킨다. 그가 왜 태어났으며, 이런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병든 몸에 하필 명석한 두뇌가 더해져 일상에서 겪게 되는 차별과 조롱을 견뎌내지 못하던 고사쿠에게 모리 오가이의 행적을 조사하고 이곳에 머물며 썼을 법한 일기를 작성해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자 하루를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오가이의 자취를 조사하던 중에 만난 기방 주인은 고사쿠에게 그런 걸 조사해서 어따 쓰냐고 나무란다. 기방 주인의 말처럼 이런 작업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고사쿠를 절망에 빠뜨리곤 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고사쿠에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쓸데없는 작업 외엔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쿠라에서 오가이의 발자취를 조사하는 것은 고사쿠에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소중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고사쿠에겐 타인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이 ‘이것이 내 평생의 업적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그러나 단호하게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는 경험이 너무나 절실했던 것이다. 이는 곧 마쓰모토가 자기 자신에게 바라는 삶이기도 했다.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장애를 가진 젊은이가 현실과 싸워나가며 삶의 목적을 찾아가는 일상을 통해 작가는 삶의 진실에 목말라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한다. 끝내 고사쿠는 몸에 깃든 장애로 작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죽고 마는데 그의 일생이 담긴 작업도 헛된 낭비가 되고 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네 대다수의 삶인 것을….
마흔한 살에 데뷔한 마쓰모토 세이초는 신문사에서의 직장생활 외에는 모든 시간을 소설에 바쳤다. 그에게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안겨준 「어느 고쿠라 일기전」은 등단하고 4년이 지나서 발표한 작품으로 재능은 있지만 생활이라는 여건에 떠밀려 고단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비극적인 죽음을 그려냈다. 주인공 고사쿠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초상화이기도 했다.
서서히 소설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넘어야 할 장벽은 여전히 많았다. 잡지에 소설 몇 편 발표하는 부정기적인 수입으로는 여덟 식구나 되는 대가족을 지킬 수 없었다. 마쓰모토는 마흔일곱 살까지 신문사에서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또 하나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세상의 오해였다. 마쓰모토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마쓰모토가 대학을 나오지 못했고 가난했다는 과거를 들먹이며 그의 작품이 피해망상에 빠졌다는 비난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문사에서 허드렛일을 도맡는 잡부가 소설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시선에 마쓰모토는 상처를 받는다. 자신에겐 처음부터 문학을 지망할 자격조차 없었다는 것인가, 절망하곤 했다.
그때부터 마쓰모토는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인간성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추리소설을 통해 사회의 어둔 면모를 낱낱이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소설가로 데뷔하고 십 년이 지나서야 첫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비로소 마쓰모토는 나이 오십에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라는 기적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다.
오십 세에 첫 장편을 발표한 이래 여든셋 나이로 세상을 떠난 1992년까지 30년 동안 마쓰모토 세이초는 무려 100권의 장편소설을 썼다. 뒤늦게 시작된 작가생활 43년 동안 장편과 단편, 논픽션 등을 모두 합치면 정식으로 출간된 단행본만 1000권이다. 죽기 며칠 전까지 글을 썼고, 결국에는 장편 하나를 마지막으로 끝마치고 혼수상태에 빠져 이틀만에 눈을 감았다. 작가로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전성기는 60대 초반부터 70대 중반까지였다. 그 기간 동안 무려 열 번이나 일본인이 가장 많이 읽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삶은 세상이 정해놓은 규범과의 싸움이었다. 문단과 학계는 초등학교밖에 졸업 못하고, 그때만 해도 싸구려 장르로 일컬어지던 추리소설을 쓰는 데다가 늦은 나이인 마흔한 살이 되어서야 데뷔작을 내놓은 세이초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사회의 추악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점이 정권의 미움을 사서 명실상부한 일본의 국민작가였음에도 사후에 훈장 하나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세이초는 인생을 바쳐 모두가 늦었다고 포기하라는 시점에 전력으로 자신을 발굴하고 등장시킨 희망의 메시지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생전에 ‘나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다. 아무도 나에게 소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쓰고 또 쓰는 것 외에는 소설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라는 말로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불굴의 정신력에 대해 고백한 바 있다. 간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까지 자신을 채찍질하여 펜을 들게 만드는 헌신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신문사 잡부였던 마흔한 살 비정규직 노동자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살아 숨 쉬게 만들어준 기적의 본질이었다.
상처의 인문학김욱 저 | 다온북스
외면하고, 피하고 싶고, 상처받기 싫은 마음이 결국 상처에 얽매이게 만든다. 불편하고 아픈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이 족쇄 같은 상처에서 벗어나 두려움 없이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답게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상처의 인문학』은 여든일곱의 노(老)작가가 절망 속에서 헤맬 때, 묵묵히 곁을 지키며 아픔의 길을 함께 걸어온 작품과 그 작가들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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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87세의 현역 번역가 겸 작가인 김욱 선생은 벼랑 끝으로 떠밀린 삶에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로 글을 쓰고 있다. 나이를 잊게 만드는 그의 글은 힘 있고 위트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