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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일

장 필리프 투생의 두 소설과 파이스트의 ‘Let I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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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미래의 부재를 알지 못한다. 그건 미래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고 헤어지지 않을 사람처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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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지나면서 해 뜨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오전 7시 30분이 지나도록 서쪽 창이 어두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7시가 지나자마자 동쪽 하늘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그만큼 해 지는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다. 하늘에 해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계절은 자연스럽게 봄으로 넘어가고 있다. 생활에 지치다보면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다를 바 없이 느껴질 테지만, 거기 같은 하늘이란 없다. 마찬가지로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과 네 번의 계절은 겪어봐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였다. 아마도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우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했다. 그렇다면 지루할 틈이 없겠지. 그때의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면 속으로 한껏 비웃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친구의 처지가 된 듯하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 말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그, 혹은 그녀를 한데 겹쳐놓고 봐야 그, 혹은 그녀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니까.

 

진실의 기차는 늘 우리를 앞질러 떠난다


장 필리프 투생이 쓴 두 권의 소설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마리의 진실』『벌거벗은 여인』. 『마리의 진실』의 목차는 ‘봄-여름’이고 『벌거벗은 여인』의 목차는 ‘가을-겨울’이다. 두 책에는 마리 마들렌 마르그리트 드 몽탈트라는 동일인물이 등장한다. 즉 이 두 권의 소설은 순서대로 읽을 때 마리라는 여자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낸 기록이 된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장 필리프 투생은 ‘마리의 일생’이라는 주제로 10년에 걸쳐 ‘마리’에 관한 4편의 연작을 펴냈다고 한다. 이 소설들 이전에 펴낸 『사랑하기』와 『도망치기』는 『마리의 진실』 이전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예컨대 『벌거벗은 여인』에 언급되는 염산 에피소드는 『사랑하기』를 읽어야 확실히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각 권이 저마다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서로 연결해서 읽을 때 한층 더 흥미로울 수 있다. 그 이유는 『벌거벗은 여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곳, 이 방에서 우리가 지난여름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제야 내 머릿속에서 두 장면이 겹쳤다. 나는 현재와 과거의 시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리가 새벽에 내 방으로 나를 찾아왔던 지난 8월말과, 못질한 덧문으로 창문이 막힌 이 밀폐된 방의 완전한 어둠 속에서 마리의 품속에서 흔들리는 지금을 동시에 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에 속한 장소와 인물들과 우리의 감정은 모두 똑같았다. 오직 계절만이 달라져 있었다.(161쪽)

 

『벌거벗은 여인』의 마지막 장면은 확실히 『마리의 진실』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두 소설은 각각의 의미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이렇게 겹쳐놓고 읽게 되면 『마리의 진실』의 마지막 장면은 비밀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삶의 비밀이란 대개 훤히 드러나 있는데도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인 것들이다. 애써 모른 척했다기보다는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여름 매미가 가을 단풍을 모르듯, 봄의 우리는 겨울의 우리를 알지 못한다. 겨울이 되면 비로소 우리는 봄에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깨닫게 되리라. 내가 말하는 이해란 이런 것이다. 사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이해다. 겨울이 되어 봄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들 무엇하랴. 이 뒤늦은 이해를 투생은 ‘진실’이라고 부른다. 진실의 기차는 늘 우리가 역에 도착하기 전에 역을 출발하는 셈이다.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요한복음 제20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가 죽은 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갔다가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제자들에게 알린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살피고 그 사실을 확인한다. 그들이 떠나고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우는데 누군가 다가와 왜 울며 누구를 찾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를 정원지기라고 생각한 마리아는 만약 예수의 시신을 옮겼다면 어디로 옮긴 것인지 자신에게 말해달라고 한다. 그때 “마리아야!”라는 음성이 들리고, 마리아는 마침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고 그를 만지려고 한다. 그러자 예수가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이 말을 라틴어로는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라고 한다. 왜 예수는 반가워 손을 뻗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했을까? 이런 의문이야말로 흥미롭다고 생각했던지 서양미술사에는 이 장면을 다룬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고, 거기에는 ‘놀리 메 탄게레’라는 제목이 붙었다. 대부분의 ‘놀리 메 탄게레’는 손을 뻗어 예수를 만지려는, 혹은 잡으려는 막달라 마리아와 이를 피하려는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림을 본다면, 여자의 사랑을 외면하는 남자의 모습처럼 해석될 작품들도 있다. 이 다양한 그림들은 장-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에 일부 수록돼 있다.


장-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는 ‘놀리 메 탄게레’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철학서다. 그는 이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멈춰 세우지 마라. 나를 붙잡거나 내게 다가오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를 향해 떠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전히 또다시 죽음의 권능 그 자체를 향해 떠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의 권능 속에서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이 봄날 아침에 저분의 밤의 광휘 속에 발을 딛는다. 이미 나는 떠나고 있다. 나는 오직 이 출발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떠남이라는 행위 속의 떠나는 자이다. 내 존재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내 말은 이것이다: “나, 진리는, 떠나간다 Moi, la v?rit?, je pars.”(34~35쪽)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진리는, 진실은 우리가 그것을 만지기 전에 떠난다. 낭시는 이것이 바로 사랑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동사 nolo(마라)는 동사 volo(원하다)의 부정어이다. 즉 nolo는 “원하지 마라”라는 뜻이다. 이에 Noli는 단순히 하지 말라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원하지 마라, 그것을 생각하지 마라”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손을 뻗는 그 순간에도 그 사실을 바로 잊으라는 것.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으니까.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으니까.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그게 바로 사랑의 행위다.

 

사랑에 빠진 작가가 글을 쓰는 방법


‘놀리 메 탄게레’라는 구절은 『마리의 진실』『벌거벗은 여인』에 각각 한 번씩 등장한다. 각 부분에서 화자는 어떤 것을 보게 된다. 『마리의 진실』에서는 갑자기 바닷속에서 진주모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마리가 젖은 화자의 몸을 따라 스르르 미끄러지면서 품에서 빠져나간 뒤, 수직으로 잠수하는 장면이다. 『벌거벗은 여인』에서는 엘바섬의 공동묘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마리가 대리석 묘석 위에 주저앉아서는 임신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특히 이 두번째 장면에서 화자는 처음에는 수태고지를 떠올렸다가 그 다음에는 놀리 메 탄게레를 생각한다. 이 두 번의 놀리 메 탄게레가 말하는 것은 만질 수 있는 것만 보지 말라는 것이니까 다시 말해 만질 수 없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 부재를 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행위의 본질이다.


캐나다 가수 파이스트의 노래 ‘Let it Die’에서 사랑은 방치됨으로써 죽어 내 마음에서 빠져나가는 그것(it)이다. 그녀의 목소리에 따르면, “눈과 눈으로 보지 않고, 또 귀와 귀로 듣지 않을 때” 우리는 사랑을 방치하는 게 된다. 그렇다면 눈과 눈으로 보는 것, 또 귀와 귀로 듣는 것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듣는다는 것일까? 일단은 그걸 사랑하는 이들이 보고 듣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들은 어떻게 보고 듣는가? 그건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한 대로 ‘잡지 않고’ 보고 듣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의 행위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내밀고 또 내미는 걸 뜻한다. 그렇지 않고 그 내민 손을 거둘 때, 그것(it)은 저절로 죽는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부재, 즉 지금 내게 없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예컨대 겨울에 알게 되는 봄의 진실 같은 것. 부모가 죽고 나면 우리는 그들의 부재를 통해 어떤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파이스트가 부르는 슬픈 곡조의 가사와 같이 방치된 사랑이 죽고 나면 그 사랑의 끝, 그러니까 현재의 부재만큼이나 시작, 즉 과거의 현존도 슬프디 슬픈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부재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현존에 다가갈 수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현존은 미래의 부재를 통해 다가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미래의 부재를 알지 못한다. 그건 미래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고 헤어지지 않을 사람처럼 사랑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살아가고 사랑하려면 만지기를 원하지 말아야만 한다. 미래의 부재를 봐야만 한다. 『마리의 진실』은 사랑에 빠진 작가가 어떻게 미래의 부재를 통해 현재의 현존에 다가가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그는 『마리의 진실』의 권말에 실린 피에르 바야르와의 대담에서 장 필리프 투생은 한 권의 책이 어떻게 시작되며, 생각 속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나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의 기억, 증언, 꿈, 그리고 환상 등을 화자가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서술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화자는 그가 회상하는 몇몇 장면에서 물리적으로는 부재하면서도, 서술에 있어서는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그는 페이지마다 스며들어 그곳에 내내 머물러 있습니다. 화자가 이야기에서 사라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마리의 몸짓과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3인칭으로 쓰인 전통적인 소설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마리와 함께 있을 때는 1인칭이던 화자가 자기가 부재하는 곳에서는 3인칭이 된다는 뜻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면 1인칭 화자가 되어 장차 망각 속으로 사라질, 그리하여 미래에 부재할 지금의 일들을 세세하게 적어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사랑한다면? 마땅히 3인칭이 되어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할 것이다. 그는 그것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마리의 진실장 필리프 투생 저/박명숙 역 | arte(아르테)
2005년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인 장 필리프 투생의 『마리의 진실』이 아르테에서 출간되었다. 인물들의 알 수 없는 관계처럼 현재와 과거, 환상과 현실의 이미지가 뒤섞인『마리의 진실』은 투생만이 그려낼 수 있는 몽환적 연애소설이다.


 

 

벌거벗은 여인장 필리프 투생 저/박명숙 역 | arte(아르테)
『벌거벗은 여인』은 투생이 10년에 걸쳐 발표한 ‘마리’에 관한 연작 중 하나로, 2013년 공쿠르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랑하기』,『도망치기』,『마리의 진실』에 이은 마지막 작품이며, 마리의 일생 중 가을과 겨울을 그리고 있다. 이미지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마리에 관한 4부작에서 이어졌던 주제의식을 강화했으며 그것은 삶의 반복과 변주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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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연수(소설가)

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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