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빠지는 색 하나 없이 다 고와
『나는 지하철입니다』 펴낸 김효은 작가
인터뷰를 하던 중 ‘나는 너무 평범하게 살아서 별로 들려줄 얘기가 없어.’라고 하시던 분이 생각납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사람보다 사물이 더 친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찌 보면 내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풍경들. 이를 테면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 책보다는 스마트폰. 김효은 작가의 『나는 지하철입니다』는 지하철의 시선으로 본 사람과 풍경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달리는 지하철은 “끝없이 이어지는 이 길 마디마디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를 차별하지만 지하철은 모두를 공평하게 맞이한다. 그래서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다. 예쁜 딸 한 번 더 보느라 꼴등으로 출근하는 완주 씨, 세 아이의 엄마이기 전에 막내딸인 유선 씨, 남들과는 조금 다른 하루를 사는 도영 씨 등 모두가 주인공이다.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그린 김효은 작가는 대학에서 섬유디자인을 공부한 뒤, 일러스트레이션 교육기관 ‘입필’에서 그림책을 공부했다. 그동안 그린 책으로는 동화 『별이 뜨는 꽃담』 『나는 달랄이야! 너는』 『민지와 다람쥐』 『내 모자야』 등과 동시집 『잠자리 시집보내기』, 그림책 『기찬딸』 『비 오는 날에』 등이 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그린 계기가 궁금합니다. 왜 지하철 풍경을 그리셨는지요?
7년 전 그림책에 대해 배우면서 드로잉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을 직접 그려보고 싶은 마음에 드로잉북을 꺼낼 수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드로잉을 했어요. 집에서,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그 중에서도 지하철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관찰하기에 제일 좋은 장소였습니다. 일이 바빠지면서 드로잉의 양은 줄었지만 지하철을 타면 자연스레 시선은 사람들에게 가 걸렸습니다. 바쁜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이동수단일 뿐인 지하철이지만 그 속에는 나와 같이 어디에선가 와서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주름진 손, 가지각색의 얼굴, 다양한 표정의 발을 계속해서 그림으로 담아 갔습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드로잉북이 쌓여가면서 내 안에도 이야기가 쌓였어요.
어떤 도구로 그림을 그렸나요?
연필, 볼펜, 사인펜, 색연필, 콘테 등 평소 드로잉할 때 가지고 다니던 필통 속 재료들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실제 현장 드로잉의 즉흥적이고 생동감 있는 느낌이 책 속에서도 잘 살아나기를 바랐어요. 그리고 물감과 잉크를 사용했는데 잉크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처음 시도해본 재료였습니다. 잉크로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은 지하철 속 사람들의 피부색이었습니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느낀 것이 우리의 피부색은 다 다르다는 거였어요. 그것이 또 이 책이 하려는 이야기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햇빛에 그을리거나, 상기되어 붉어진, 각 사람의 온도가 느껴지는 피부색이야말로 그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창작 그림책입니다. 더미로 만들어서 책으로 나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2년 동안은 다른 작가의 글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과 병행을 했습니다. 그 중 1년은 같은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낸 ‘Colors in the Subway(감독: 김명은)’작업도 함께했고요. 그렇게 2년 동안 병행하며 작업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껴서 그 뒤로 1년은 창작그림책 작업에만 집중했습니다. 먼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촘촘히 만들어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삶 속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한, 살아 있는 캐릭터가 되기를 바랐기에 직접 제주도에 가서 해녀를 만나고, 구두 수선방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등 취재를 하고 자료조사를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인물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의 끈으로 엮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각기 다르지만 똑같이 소중한 이야기들이기에 인물들의 순서에서부터, 각 사람의 깊고 넓은 삶을 한정된 페이지 속에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또 수없이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모양새를 갖춰 나갔습니다.
평소 지하철을 자주 타시는지요? 즐겨 가는 역이 있나요?
운전을 못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특히 지하철을 자주 탑니다. 작업을 할 당시에는 상수역에 살았는데 작업이 안 될 때면 합정역에서 2호선을 타고 다시 합정역으로 돌아오는 서울 한 바퀴 여행을 종종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댁에 가기 위해서 환승역으로 꼭 들르게 되는 역이 신도림역입니다. 출퇴근 시간이면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파도 속에 휩쓸려가기 쉬운 공포의 환승역이지만 그래도 고소한 만쥬 냄새가 퍼지고, 알록달록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을 붙잡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로 정다운 역입니다.
실제 보는 지하철 풍경 중에 가장 보기 좋은 풍경이 있나요?
지하철 창 너머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한강을 건널 때면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그 순간만큼은 특별한 여행길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오후의 지하철 속 풍경입니다. 오후의 진한 햇빛이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움직임과 함께 사람들의 실루엣을 바닥에 그려내며 일렁이는 모습은 우리가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풍경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단행본을 준비하면서 가장 만족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1쇄 한정으로 실렸던 스토리북이 정말 좋았습니다. 담당 편집자가 각 사람의 이야기를 아코디언북 형식으로 싣고 네모난 구멍 너머로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면 좋겠다고 제안해주어서 작업을 하면서 써놓았던 글들을 정리해 넣고 네모난 구멍 너머로 뒷장에 그려진 길 위의 사람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만들어진 것을 보니 보기에도 좋았고, 책의 메시지를 더 풍부하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세상에 나올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고르기 어려우시겠지만, 이 그림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가장 좋아하는 그림 한 가지만 고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어떤 장면은 실력이 부족해 잘 표현은 안되었지만 애착이 가기도 하고, 또 어떤 장면은 제일 많이 망치고 나서 얻어낸 귀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책 속 구공철 아저씨의 말처럼 ‘빨주노초파남보 빠지는 색 하나 없이 다 고와.’라는 심정으로, 장면 장면이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적, 그림책이나 동화책, 또는 책을 좋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잠들기 전에 어머니는 책을 자주 읽어주셨습니다. 그 옆에 누워 언니 동생들과 뒹굴 거리며 귀로 듣고 눈으로도 보았던 그 시간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 중 그림책 몇 권은 표지가 닳아서 귀퉁이가 헤지고 제본한 실이 늘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섬유디자인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일러스트를 공부하게 되셨는지요?
입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여건에 맞추다 보니 디자인과로 이루어진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디자인과 중에서 그나마 그림 그릴 일이 많을 거라는 학원 선생님의 조언에 선택한 전공이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림에 늘 목이 말랐지만 어느새 마지막 학년을 바라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취업을 생각했습니다. 졸업 전 스스로에게 마음껏 놀 수 있는 1년의 시간을 주었는데 그때 아르바이트로 나갔던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이 즐겁게 그림 그리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림책 작가’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고 휴학한 1년의 시간 동안 그림책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최근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가 앵커브리핑에서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소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분을 책으로 만났다는 사실에 기뻤습니다. 나는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책은 만나고 있구나 생각하니 참 신기했고, 그림책의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새삼 느끼게 되었어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올라온 ‘작가 레터’를 읽었습니다. 독자가 내 책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는 것이 어떤 의미이신지요?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을 하다 보면 아무도 보지 않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시로 몰려오는 다양한 이름의 감정들을 물리치고 한 권의 책을 만들고 나면 그 다음엔 작가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유리병 속 작은 이야기가 긴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잘 도착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내 책을 읽고 글을 남겨주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며 운을 뗐던 첫 인사를 정답게 받아주고, 수십 번 고쳐 그린 표정을 알아봐주고, 꾹꾹 눌러 담은 글들을 한 올 한 올 풀어 음미해 주었습니다. 마치 내가 보낸 긴 편지에 대한 ‘답장’ 같았어요.
이 그림책이 작가님께 1권이 있습니다. 어떤 독자에게 선물하고 싶나요?
인터뷰를 하던 중 ‘나는 너무 평범하게 살아서 별로 들려줄 얘기가 없어.’라고 하시던 분이 생각납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읽은 그림책 중에 인상 깊었던 그림책 한 권만 추천해주세요.
바로 어제 서점에서 만나 앉은자리에서 세 번을 읽었던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입니다. 가볍고 유쾌하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함을 느꼈어요.
좋은 그림책은 무엇일까요? 그림책이 좋은 이유도 알려주세요.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다 읽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조금 변할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김효은 글그림 | 문학동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달리며 끝없이 이어지는 길 마디마디마다 사람들을 싣고 내리는 지하철의 목소리입니다. 지하철은 땅 위와 아래를 오르내리며 둥근 궤도를 돕니다. 열차에 가득 실린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입니다.
관련태그: 나는 지하철입니다, 효은, 주인공, 지하철 풍경
eumji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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