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소설은 정체불명의 노동”
첫 소설집 『어비』 펴내
소설을 쓰는 건 혼자 하는 일인데 아무도 내가 일하는 걸 보지 못해요. 그리고 한 시간 일을 한다고 해서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정체불명의 노동이라는 생각을 늘 하거든요.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요.
『어비』의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하고 있다. 치킨 배달을 하고, 좌판에서 물건을 팔고, 1인 시위를 하고, 줄넘기를 하고, 비눗방울을 분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을 하는 이도 있고, 순수하게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이도 있다. 모두가 ‘일’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늘 질문 받는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주변 사람들이 묻고, 스스로가 묻고, 그도 아니면 독자들이 묻는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대답은 다양하다. “이런 일은 돈이 없어서 하는 거고. 어디까지나 잠시만 하는 거고. 이런 건 내가 진짜 하려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누군가는 “어쨌든 더 나은 일”, “좀 제대로 된 취업”을 해야겠다고 말한다. 사람을 ‘처리’해야 하는 누군가는 “일에 이유가 어디 있어. 돈 벌려고 하는 거지 뭐”라고 말한다. 때때로 그들은 “난 아무것도 안 해요” 혹은 “이것도 진짜 일인데요”라고 답하지만, 그 결과 신분을 의심 받거나 ‘이런 건 진짜 일이 아니라고’ 비난 받는다.
그들에게 쏟아졌던 질문들은 고스란히 독자의 것이 된다. 아홉 명의 주인공이 들려준 대답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이고,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정말 원하는 일은 무엇이고, 언제쯤 그 일을 하게 될까. 아직 풀지 못한 문제들은 안은 채 김혜진 작가를 만났다.
‘진짜 일’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어비』를 읽으면서 ‘어쩌면 이건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어요.
이렇게 써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요. 쓰고 나서 보니 도시에 살고 있는 아직은 젊은 사람들, 그리고 진짜 일을 하기 전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와와의 문」 같은 경우에는 ‘글을 쓴다는 것은?’이라는 주제로 청탁을 받고 쓴 소설이기 때문에 조금 성격이 다른 데요. 그 작품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것 같아요.
4년 동안 발표하신 단편 중에서 아홉 편을 골라 엮으셨는데요. 수록작 사이에 이런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아셨어요?
데뷔를 하고 나서 1년, 2년 정도 지나니까 ‘내가 이런 데 관심이 있었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모아놓고 보니 ‘그동안 이런 걸로 고민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와와의 문」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잖아요. 혹시 작가님과 닮은 모습도 있지 않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소설 속의 ‘나’와 마찬가지로) 제가 그때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 늙고 키가 작은 여자분이 계셨어요. 말레이시아인가, 어디에서 오신 분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친하게 지냈었어요. 서로 말을 잘 못하니까 마음은 있어도 많이 대화를 할 수는 없었고요. 그런 부분에서는 제 모습이 일부 반영이 된 거겠죠. 소설집 뒤에 실린 해설을 보면, 노태훈 평론가님께서 「와와의 문」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어요. “소수자를 소설의 인물로 그려 내는 것은 혹시 소설가의 자기 위안은 아닐까, 그들을 너무 손쉽게 소수자라고 명명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시선으로 그들을 들여다봐야 할까” 그런 고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이 소설은 ‘글을 쓴다는 것은?’이라는 주제로 쓰게 된 거라서 ‘글을 쓰면서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쓰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와와의 문」을 보면서 조금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인터뷰어인 저도 다르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캐낸다는 게, 가끔은 잔인한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으세요?
있죠. 소설이 어떤 개인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만으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려고 하고, 그걸 소모적으로 쓰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하죠.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이 작가가 언제나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쓴다”고 하셨어요.
저도 신형철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봤는데요.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을 해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웃음).
『어비』를 보면 인물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한 서술이 무척 세밀하고 사실적이에요. 직접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 같고, 그래서 타인의 시선처럼 느껴지지만은 않거든요. ‘작가님이라면 자주,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사람과 사건을 관망해 오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기도 하고요. 관찰을 많이 하죠. 그걸 되게 편안해 하고, 그게 습관이기도 해요. 잘 모르겠지만, 경계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밖도 아니고 아주 안도 아닌. 『중앙역』 같은 경우는 취재가 바탕이 된 글이기 때문에 조금 더 그런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노태훈 문학평론가로부터 ‘정직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셨는데요.
방금 전에 말한 것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한데요.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소설이 밋밋하거나 담백하거나 너무 앙상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많은 꾸밈이 있지 않다는 뜻이니까요.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제 소설이 화려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어떤 작가가 정직한 작가인 것 같으세요?
굉장히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읽으면 ‘이건 진짜다’라고 생각되는 소설이 있잖아요.
단순히 리얼하다는 의미만은 아니겠죠?
네, 리얼한 것과는 조금 다른데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건 ‘소설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과도 연관이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소설이 조금 더 나와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예전에는 소설에 내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면, 점점 쓰다 보니 그렇게 해서는 오래 쓸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현재는) 소설이 지금의 사회 안에 있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나와 가까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안에서 쓴다거나 혹은 정직하다고 말씀해 주신 것 아닌가 싶기도 해요.
앙상해지고 훼손된 ‘일’에 대하여
‘소설에 내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소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 공부를 하려고 예대에 갔는데, 그때만 해도 소설은 그냥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소설과 이야기는 다르다’라고 할 때의 그 이야기가 아니고요. 소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거나 공감을 주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소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더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소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거나 뭔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죠. 그렇다고 제가 무슨 혁명을 일으키는 소설을 쓴다는 뜻이 아니고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나오는 소설은 조금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번 소설집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어요. 등장인물들만 보더라도 인터넷 BJ, 일용직 근로자, 편의점 알바생, 치킨 배달원처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도 낯설지 않고요. 작가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현실과 이웃들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요.
일이라는 것이 예전에 비해서 굉장히 앙상해졌다고 할까요. 많이 훼손됐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런 사람들한테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제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특수한 사람들이 아니고 굉장히 흔한 사람들이잖아요. 요즘에는 소위 말하는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가 더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도 데뷔를 하기 전에는 그런 알바들을 많이 했었고, 그런 인물들이 주변에 있다 보니까, 거기에 대해서 ‘왜 그럴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 취재도 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누군가에 대해서 알려면 성별, 나이, 직업을 물어보면 됐는데 요즘은 일이 어떤 자격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거나, 끊임없이 제대로 된 일을 할 거라고 기다리지만 그냥 그 일을 계속 하잖아요. 그런 모습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돼요.
「줄넘기」, 「쿵후하는 자세」에서의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잖아요. ‘몰입하고 있는 어떤 행위나 동작’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쿵후하는 자세」, 「줄넘기」는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쿵후하는 자세」 같은 경우에는 주인공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해요. 작품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때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는 거죠. 그리고 하는 일이 없으니까 자기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도 없어요. 「줄넘기」의 인물도 마찬가지죠.
말씀하신 것처럼 「쿵후하는 자세」의 주인공은 뚜렷하게 하는 일이 없어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정체가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취급 받고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존재가 불분명한 사람으로 인식된다는 건데, 섬뜩한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점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저도 어디에 가면 소설가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이게 굉장히 정체 불분명한 일이잖아요. 소설을 쓰는 건 혼자 하는 일인데 아무도 내가 일하는 걸 보지 못해요. 그리고 한 시간 일을 한다고 해서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정체불명의 노동이라는 생각을 늘 하거든요.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요. 저도 그렇지만 제 주변의 친구들도 그렇고, 저희 윗세대도 예전에는 안 그랬지만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생산성으로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사고가 너무 팽배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굉장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점점 더 사람이 도구화되고 소모되고 버려지는 것 같죠.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왜 그만두는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게 뭔지’ 묻는 게 아니라 ‘그래, 대체할 사람은 많으니까’라는 식으로 되잖아요. 그 일을 하면서 마땅히 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고용하는 사람들도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더 나은 일’이란 게 있을까요?
「어비」의 주인공은 “어쨌든 더 나은 일”, “일 다운 일”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데요. 작가님도 이런 고민에 공감하세요?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쨌든 더 나은 일’이라거나 ‘일 다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그건 내 몫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있거든요. 그런데 예전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데뷔하기 전에 이런 저런 일들을 계속 할 때는, 그때는 20대 후반이었으니까, 친구들을 봐도 진짜 준비하는 일은 다 따로 있는 거예요. 밤에 일하고 낮에 학원을 간다든가, 주말에 다른 곳을 찾아가기도 하고요. 지금은 제가 30대가 됐고, 저나 친구들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은데요. 20대 후반에는 굉장히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요즘의 20대는 더 많이 하겠죠.
앞서 언급하셨듯이, 소설이라는 게 투자한 시간에 비례해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 과정을 반복하시다 보면 지치실 것 같기도 한데요. 어떻게 견디시나요?
하루 종일 소설을 쓰는 건 아니고요.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그렇죠. 그런데 소설은 나 혼자 쓰는 거잖아요. 사실 혼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어요. 혼자 있는 게 좋으니까요. 지금은 조금 아닌 것 같기는 한데요(웃음). 소설을 쓰는 게 지칠 때는 다른 일들도 해보려고 해요. 그래도 한동안 안 쓰면 쓰고 싶기도 하고, 매일 매일 하려고 노력하죠. ‘이게 나한테는 일이니까, 조금이라도 써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글 쓰시는 분들은 다들 그렇게 하실 거예요. 그런데 많은 쓰면 또 많이 지워야 돼요(웃음). 그래서 20년, 30년씩 소설을 계속 쓰시는 선생님들 뵈면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건 이것도 일이니까 성실해야지”라는 「아웃포커스」의 한 마디가 생각나네요. 개인적으로 「아웃포커스」를 읽으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부당 해고를 당한 뒤 1인 시위를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만약 내 어머니라면’ 하고 생각하니까 읽으면서 울컥울컥 하더라고요.
제가 KT의 해고 노동자에 대해서도 취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일했는데 현장직으로 발령을 내고, 사옥 뒤에 전봇대를 심어 놓고 올라가 보라고 하고, 그 분이 회사를 나가지 않으니까 울릉도로 발령을 내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보고 이 소설을 쓰려던 건 아니었어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두고 모두가 ‘왜 하지?’라고 생각하지만,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1인 시위를 하거나 모여서 기자회견 같은 걸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외부에서는 너무 안 됐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시선만 있는 것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아웃포커스」의 어머니도 늘 모멸감만 느끼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소설 속의 인물들이 모멸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다 설명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그것과는 다른 지점이 있을 수 있잖아요.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오늘날 모든 일이 훼손됐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일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그 일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는 노하우라든지, 그런 자잘한 것들도 있거든요. 「아웃포커스」의 엄마도 매일 똑같이 모멸감을 느끼면 그 일을 못하겠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아무 생각 안 할 때도 있을 거고, 매일매일 하다 보면 조금 더 괜찮은 생각이 생기기도 할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보면 모멸감이기는 하겠지만, 매 순간 그렇게 느끼면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한밤의 산행」에서 인물들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고요.
「쿵후하는 자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 같은 경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소설에서 친구가 ‘나’에게 계속 일을 해야 된다고 하잖아요. 왜 일을 안 하냐고, 일을 하라고 말하는데, 글쎄요,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하겠죠.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 날 밤의 일을 겪고 나서 조금 달라지잖아요. ‘이렇게 계속 자전거를 타도 될까’ 하고 질문하거든요. 자전거를 타면서 일을 찾는 것 같다고 할까요.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출발은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 쓰시는 동안 가장 감정 소모가 컸던 작품은 무엇이었나요?
감정 소모는 잘 모르겠고요. 「어비」를 쓸 때 너무 소설이 안 써졌어요. 그래서 편집부에서 한 번 (마감 날짜를) 미뤄주셨는데, 일주일이 지났는데 또 못 쓰겠는 거예요. 그런데 펑크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낸 소설이었거든요. 약간은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마음으로 냈어요. 그때는 이 소설이 표제작이 될 지도 몰랐죠. 그런데 『2016년 올해의 문제소설』에 실렸다고 해서 사실은 깜짝 놀랐어요. ‘왜?’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사람 마음처럼 다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마음에 들어서 발표한 소설은 독자들이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고, 절반 정도는 포기한 상태로 낸 소설인데 좋아하시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소설은 내가 쓰지만 어쨌든 발표가 됐을 때는 내 생각과는 다른 반응들이 나올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노태훈 문학평론가는 “김혜진의 소설은 결코 ‘연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회의하는 쪽에 더 가까운데”라고 하셨는데요. 실제로 『어비』의 인물들은 거의 홀로 현실의 무게를 감당해내는 모습을 보여줘요. 왜 그럴까요?
연대는 제가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기는 해요. ‘연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거든요. 제가 연대를 만든다는 게 아니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소규모 공동체를 만드는 것뿐이라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연대가 제시되고 있는데, 사실은 연대를 믿지는 않아요. 믿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공동체에 많이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들어가서 너무나 실망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더라도 결국엔 쪼개지거나, 그 안에서 희생되는 사람이 반드시 나와요. 그래서 연대를 신뢰하지 못했고, 소설을 쓰면서 ‘오히려 혼자 있는 게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지셨나요?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소설을 쓰면서 연대를 보고 있었던 건 맞아요. ‘어떤 연대가 있어야 되지?’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이제는 연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봐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 제가 경계에 서있다면 이제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광장 근처」는 교황이 방한한 날 ‘나’에게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는데요. 이 작품은 어떻게 쓰게 되셨어요?
제가 그 근처에 살고 있는데, 방한 전날에 나와 보니까 이미 다 바리게이트가 쳐져 있고 밤부터 요란하더라고요. 교황이 왔다고 하는 날에는 제가 손을 크게 베어서 병원에 가고 있었는데, 길에서 엄청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런데 사람들 표정이 다 얼이 빠져 있는 것 같고 굉장히 연극적인 거예요. 그런 해프닝이 있었어요.
「광장 근처」를 읽다 보면 회의감이 들기도 해요. 교황이 이야기했을 법한 거대담론, 즉 희망이나 평화, 사랑, 연대 같은 것들이 실질적으로 우리 일상을 바꿔놓기는 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거죠.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바꿔놓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현실이 바뀔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소설을 쓰는 일을 생각해 보면, 제 소설이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떤 특정한 혹은 구체적인 소규모의 독자들에게는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말하자면 조금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전에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게 나한테 일차적으로 의미가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들과 읽기를 바라면서 소설을 쓰지?’ 하는 생각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독자를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기 시작하는 것 같고요. 작지만 내가 원하는 독자들 혹은 내가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어떤 질문을 던지면 거기에서부터 뭔가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담론과 연대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걸 조금 더 구체화되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떤 작품을 집필 중이세요?
장편을 쓰고 있어요. 내년쯤에 나올 것 같은데요. 할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예요. 아직 나오지 않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이 작품을 쓸 때는 여성에 대한 걸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비
김혜진 저 | 민음사
작가가 4년 동안 발표한 단편소설 9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어비』는 20~30대 청춘들의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삶의 절망적 현실을 직선적 문장으로 표현한 독특한 매력을 선보인다. 표제작 「어비」는 『2016년 올해의 문제소설』에 실려 청춘의 새로운 모습을 포착한 문학성을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