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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거울 속 아는 여자 : <거울나라의 앨리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설파한 동화적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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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시각적 이미지로 쌓여온 이야기가 예측가능하고 도식적인 교훈으로 끝난다. 강인한 의지가 온건한 가족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80년대 디즈니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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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이 감독이 아닌 제작자로 나선 영화들 중 일부는 테두리가 무척 화려하지만 거울 면은 깨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감독은 온전히 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깨진 조각 사이로 비틀어진 팀 버튼의 모습이 비친다. 깨진 거울은 직접 반영하는 모습이 아니라, 반영하지 않은 숨은 이야기 때문에 그 표현력이 강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어지럽고 산만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블록버스터의 형태와 작가주의의 시도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감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은 그가 제작자로 나선 일련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긍정적인 형태로 드러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결과는 많이 아쉽다. 제임스 보빈 감독은 팀 버튼이라는 거대 그림자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긴 채, 깨진 거울조각을 수습하지 않는다. 감독 제임스 보빈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팀 버튼의 손을 거친) <거울나라의 앨리스> 속에는 어린 시절 들여다 본 만화경처럼, 선명하지만 아득하게 깊어 몽환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다. 특히 시간을 여행하는 장면은 역동적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이한 미장센 속에 불쑥 데자뷰 같은 익숙함이 스친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자의 얼굴이, 행동이, 목소리가, 그리고 결론이 자주 보아온 것처럼 익숙하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지속적으로 설파해 온 동화적 교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빛과 어둠의 경계를 무시하면서 소외된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고 있는 것도 여전하고, 동화적 교훈 속에 인생의 또 다른 철학을 담아놓은 설정은 팀 버튼스럽다. 팀 버튼이 감독했던 2010년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출연배우들이 빠짐없이 다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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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알려진 것처럼 루이스 캐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사춘기 소녀가 겪는 인생의 혼란과 기이한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묘하게 오간다면, 영화는 신념을 가진 여인의 ‘행동’ 그 자체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설정만 빼고는 소설과 아주 많이 다르다. <거울나라의 앨리스> 속 앨리스라는 캐릭터는 디즈니 영화 속 여주인공들처럼 아주 강한 자기 신념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었다. 운명을 거부하고 새롭게 태어나려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자궁을 나와 세상으로 던져진 후, 자신을 지켜줄 탯줄이 끊어지고 없는 그 상태에서 오롯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성장담이기도 하다. 호기심 가득한 소녀의 모험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다 앨리스(미아 와시코프스카)의 캐릭터 자체는 그녀가 성장한 6년만큼 성큼 큰 걸음을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앨리스는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3년간 선장으로 지낸다. 돌아온 런던은 여전히 ‘선장은 남자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성 중심의 세상 그대로이다. 우아하고 예쁜 드레스가 아니라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내가 사랑하는 친구인 모자장수(조니 뎁)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위험도 무릅쓰는 앨리스의 의지는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의 바깥문을 열어줄 열쇠처럼 단단하고 꼿꼿하다.

 

시간 여행의 커다란 틀 안에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그런 점에서 장롱 속에 숨어있거나, 동굴 속을 헤매던 아이였던 앨리스가 거울 속 세상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로드 무비이기도 하다. 거울 속으로 들어선 앨리스가 모자장수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크로노스피어를 타고 과거로 가기 위해 시간의 바다를 항해한다는 설정은 앨리스가 선장이었다는 현재의 이야기와 맞물려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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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최대의 장점이었던 시각적 화려함은 계속 이어진다. 환상 속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독특한 색감과 각각의 인물을 상징하는 의상과 소품 등이 반짝 반짝 빛난다. 화려한 기술에 비해 이야기가 단선적이고, 예측가능하게 연출된 것은 아쉽지만 팀 버튼이 직조해 놓은 캐릭터를 통해 단단하게 선 배우들의 모습은 믿음직하고 보암직하다. 조니 뎁, 앤 해서웨이, 헬라나 본햄 카터는 비중과 상관없이 영화 자체를 단단하게 만든다. 특히 <보랏><브루노>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레 미제라블>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챠 바론 코헨은 ‘시간’ 역할을 맡아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새로운 시리즈의 이야기처럼 보이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비틀린 원작의 이야기와 달리, 영화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상징하는 이야기는 약간 도식적이고 단선적이다.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로 쌓여온 이야기가 예측가능하고 도식적인 교훈으로 끝난다. 강인한 의지가 온건한 가족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80년대 디즈니 스타일이다.

 

예상했던 대로, 앨리스는 시간을 되돌리려는 시도 대신, 이미 생긴 과거와 그 과거를 통해 구축된 현재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만든다. 시간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적이 아니라, 파도처럼 그 속에 몸을 싣고 함께 가야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는 그 도식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다. 게다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어 현재를 달리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조금 감동적인 부분이 있다.

 

다시, 깨진 거울이긴 하지만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우리 모습을 들여다보자. 어딘가에서 본 듯한 여자, 용감하게 시간과 맞서지만 결국 시간은 적이 아니라 함께 가야하는 동료라는 것을 깨닫는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다. 시간은 기억이고, 기록이고, 또 미래는 다시 시간에 아로새겨지는 언젠가의 과거, 또 다가올 현재라는 깨달음을 얻은 앨리스의 얼굴에서 시간에 지쳤지만, 여전히 미래의 시간을 꿈꾸는 우리의 얼굴이 살짝 비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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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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