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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자. 이기자. 지더라도 개기자"

실패의 미학(美學)에 주목하자
영화 <트루스>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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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도 <트루스> 같은 실패의 비망록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회사 들어가고,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 성공하는 것만이 유일한 가치가 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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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포트라이트>가 성공의 이야기라면 언론의 또 다른 측면을 다룬 <트루스(Truth)>는 실패의 이야기다. 그것도 처절하고 참담한 실패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지 않는가. 때로는 어떻게 성공하느냐(How to succeed)보다 어떻게 실패하느냐(How to fail)가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실패하는 과정을 알아야 그 다음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실패학(失敗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실패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실패했을 때 휴머니티,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린 성공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태어났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004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존 캐리 민주당 상원의원의 대통령 선거전이 펼쳐지던 때다. 미국 CBS의 시사 고발 프로그램 <60분>의 프로듀서인 메리 메이프스(케이트 블란쳇)는 부시의 병역 의혹 취재에 돌입한다. 부시가 베트남전 참전을 기피하기 위해 주(州) 방위군에 청탁으로 들어갔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의혹을 파고들어간 것이다. 메리는 부시의 상사가 작성했다는 1973년의 메모를 입수한 뒤 필적 전문가들의 감정과 군인들의 증언을 확보해 보도를 내보낸다.

 

상황은 방송 다음 날 반전된다. 타자기로 작성된 것으로 보도한 문제의 메모에 대해 보수 진영의 블로거가 컴퓨터로도 똑같이 작성할 수 있다는 글을 올린 것이다. ‘부시 병역 의혹’은 ‘CBS 메모 조작 의혹’으로, 특종은 오보로, 성공은 실패로 전환된다. 메리의 취재팀이 메모 조작 의혹에 맞서 추가 보도를 하지만 여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결정적으로는, 메모 제보자가 “메모를 입수한 과정에 관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취재 과정의 흠결이 드러나자 회사 측은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60분>의 간판 앵커 댄 래더(로버트 레드포드)에게 사과 방송을 하게 하고, 메리 취재팀을 상대로 혹독한 내부 감사를 벌인다.

 

트루 2번째로 넣어주세요 변호사 나오는 문장 위에.jpg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하는 건 이제부터다. ‘꼬리 자르기’가 시작된다. 함께 호흡하던 상사가 당시 취재 상황에 대해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고 등을 돌린다. 감사팀은 메리에게 노트북과 e메일을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대리인을 맡은 변호사는 메리에게 말한다.

 

“이건 재판이 아니라 사냥이에요. 그들(감사팀)을 자극하고 싸우려 한다면 당신은 질 거예요.”

 

그러나 20여 명의 감사팀 앞에서 조사를 받은 마지막 날 메리는 변호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감사팀에 묻는다. “다른 팀원들에게 물어봤다는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선 왜 묻지 않느냐”고.  

 

“그 메모가 정말로 조작됐다면 조작한 사람은 수십 년 전의 공군 규정과 용어, 관련 군인들의 이름, 성향, 관계까지 파악해야 해요. 과연 우릴 속이기 위해 그 모든 걸 파악해서 메모를 조작했을까요? 우린 부시가 군인으로서 의무를 다했는지 물어봤을 뿐이에요.”

 

조사가 끝나고 회사에서 나온 뒤 변호사가 메리에게 묻는다.

 

“꼭 그렇게 해야 했나요?”
“뽀빠이에 나온 불후의 명언이 있죠. ‘나는 나인 것이다(I am what I am)’.”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때 변호사가 고개를 돌려 메리를 부른다.

 

“당신을 믿어요.”

 

나는 메리가 한 사람의 믿음을 얻는 그 장면이 가슴 뭉클했다. 만약 메리가 변호사의 조언에 순순히 따랐다면 그녀는 패배한 것이다. 그녀는 ‘언론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실패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았다.

 

“나는 나인 것이다”는 발언 밑에는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자기 긍정이 깔려 있다. 당신들이 나를 해고하더라도, 설령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짓이 될 지라도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진실을 말해야겠다. 그래야 숨통이 트일 것 같으니, 그래야 나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나는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메리의 심정은 고별 방송을 하는 댄 래더의 마지막 멘트와도 닿아 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동료 언론인들에게…용기를 내세요(Courage).”

 

그렇다. 실패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용기. 대학 다닐 때 한 선배가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싸우자. 이기자. 지더라도 개기자.” 싸우고 이기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지더라도 개기자”는 부분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미 진 다음에 개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기다’는 명령이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버티거나 대들 때 쓰는 속된 표현으로 2014년 표준어가 됐다.)

 

그땐 웃어넘겼지만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선배의 구호가 떠오르곤 했다.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지더라도 버티고 대들겠다는 것.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생계라는 이름의 벽에 막혀 내 뜻을 펴지 못할 때 그 구호가 새삼스러워졌다.

 

한국 사회에서도 <트루스> 같은 실패의 비망록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회사 들어가고,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 성공하는 것만이 유일한 가치가 돼선 안 된다. 삶의 가치는 길이를 재거나 무게를 달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실패한 사람은 패배자, 루저로 낙인 찍히는 사회야말로 불온하다. 나는 이 사회가 실패의 미학(美學)에 주목한다면 덜 각박하고,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리라 믿는다.

 

용기를 내자. 지더라도 개기자. 그 정신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오늘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나는 패배했는지 모른다’며 고개 숙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 한 마디가 위로가 돼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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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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