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트위터처럼 시 읽기] 이성복 『남해금산』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생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갈 때 생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나의 생을 가엾게 여기기 시작하는 나이. 우리는 이성복의 시집을 읽으며 그 나이를 미리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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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잠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남해금산은 멀었다. 이십여 년 전쯤 서울에서 차를 몰고 무작정 경상남도 바닷가의 남해금산을 찾아갔다.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 때문이었다. 강렬하면서도 허무적인 연애시들이 나를 흔들었고, 나는 그 기억을 더듬으러 남해금산을 찾았다.
남해금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바닷가에 있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려도 바다가 왠지 포근하게 안아줄 것 같은 착시가 느껴졌다. 깎아 지른 벼랑에 안개가 가득했고 이따금씩 이슬비가 내렸다. 한 여자가 돌 속에 갇혀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집의 표제시인 작품 「남해금산」은 짧은 시다. 전문을 보자.
"한 여자 돌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속에 나 혼자 잠기네"
영원할 것 같았던 돌 속의 사랑도 어느 날 식고 여자는 돌 속을 떠났다. 그리고 나만이 돌 속에 남아 사랑을 추억하고 있다.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인간의 사랑이나 신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조금씩 알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시집에서 발견한 가장 좋은 시는 서두에 인용한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였다. 시집에 있는 다른 시들 대부분이 허무와 무위(無爲)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시는 삶의 의연함에 시선을 들이대고 있었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은 거기에 묶일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 앞에서 나는 무릎을 쳤던 것 같다.
나는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에서 이제 막 중년 한복판에 접어든 한 예민한 남자의 고백을 읽었다. 혁명도 사랑도 흐릿해지는 어느 날 한 남자가 울고 있었다. 떠나간 여자와 남아있는 생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시는 무거웠고 그만큼 훌륭했다.
마부의 채찍을 맞는 말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내 니체. 니체와 같은 족속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짐 실은 말 뒷다리’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일. 시인이 해야 할 일이다.
생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갈 때 생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나의 생을 가엾게 여기기 시작하는 나이. 우리는 이성복의 시집을 읽으며 그 나이를 미리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남해금산이성복 저 | 문학과지성사
<남해금산>에서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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