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허연의 트위터처럼 시 읽기] 이성복 『남해금산』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생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갈 때 생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나의 생을 가엾게 여기기 시작하는 나이. 우리는 이성복의 시집을 읽으며 그 나이를 미리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1603-이성복-남해금산.jpg

 

허연 Retweeted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잠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남해금산은 멀었다. 이십여 년 전쯤 서울에서 차를 몰고 무작정 경상남도 바닷가의 남해금산을 찾아갔다.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 때문이었다. 강렬하면서도 허무적인 연애시들이 나를 흔들었고, 나는 그 기억을 더듬으러 남해금산을 찾았다.

 

남해금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바닷가에 있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려도 바다가 왠지 포근하게 안아줄 것 같은 착시가 느껴졌다. 깎아 지른 벼랑에 안개가 가득했고 이따금씩 이슬비가 내렸다. 한 여자가 돌 속에 갇혀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집의 표제시인 작품 「남해금산」은 짧은 시다. 전문을 보자.

 

"한 여자 돌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속에 나 혼자 잠기네"

 

영원할 것 같았던 돌 속의 사랑도 어느 날 식고 여자는 돌 속을 떠났다. 그리고 나만이 돌 속에 남아 사랑을 추억하고 있다.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인간의 사랑이나 신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조금씩 알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시집에서 발견한 가장 좋은 시는 서두에 인용한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였다. 시집에 있는 다른 시들 대부분이 허무와 무위(無爲)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시는 삶의 의연함에 시선을 들이대고 있었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은 거기에 묶일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 앞에서 나는 무릎을 쳤던 것 같다.

 

나는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에서 이제 막 중년 한복판에 접어든 한 예민한 남자의 고백을 읽었다. 혁명도 사랑도 흐릿해지는 어느 날 한 남자가 울고 있었다. 떠나간 여자와 남아있는 생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시는 무거웠고 그만큼 훌륭했다.

 

마부의 채찍을 맞는 말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내 니체. 니체와 같은 족속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짐 실은 말 뒷다리’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일. 시인이 해야 할 일이다.

 

생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갈 때 생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나의 생을 가엾게 여기기 시작하는 나이. 우리는 이성복의 시집을 읽으며 그 나이를 미리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img_book_bot.jpg

남해금산이성복 저 | 문학과지성사
<남해금산>에서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추천 기사]

 

- [특별 기고] 시리 허스트베트, 틈새의 존재, 틈새의 욕망
- [맨 처음 독자] 『13ㆍ67』 찬호께이 작가
- [같은 책 다른 표지] 장미의 이름
- 젊은 독자에게 ‘초판본’은 신제품

- [특별 기고] 가둘 수 없는 이야기 - 『통조림 학원』을 읽고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허연(시인, 매일경제신문 문화부장)

남해 금산

<이성복> 저10,800원(10% + 1%)

에서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이 심오한 바라봄-드러냄의 변..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김기태라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장르

2024년 가장 주목받는 신예 김기태 소설가의 첫 소설집.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등 작품성을 입증받은 그가 비관과 희망의 느슨한 사이에서 2020년대 세태의 윤리와 사랑, 개인과 사회를 세심하게 풀어냈다. 오늘날의 한국소설을 말할 때, 항상 거론될 이름과 작품들을 만나보시길.

제 17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제 17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율의 시선』은 주인공 안율의 시선을 따라간다. 인간 관계는 수단이자 전략이라며 늘 땅만 보고 걷던 율이 '진짜 친구'의 눈을 바라보기까지. 율의 성장은 외로웠던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진심으로 안아주는 데서 시작한다.

돈 없는 대한민국의 초상

GDP 10위권, 1인당 GDP는 3만 달러가 넘는 대한민국에 돈이 없다고? 사실이다. 돈이 없어 안정된 주거를 누리지 못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누구 탓일까? 우리가 만들어온 구조다. 수도권 집중, 낮은 노동 생산성, 능력주의를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

잘 되는 장사의 모든 것

선진국에 비해 유독 자영업자의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 왜 대한민국 식당의 절반은 3년 안에 폐업할까? 잘 되는 가게에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 장사 콘텐츠 조회수 1위 유튜버 장사 권프로가 알려주는 잘 되는 장사의 모든 것. 장사의 기본부터 실천법까지 저자만의 장사 노하우를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