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추억 앓이
버스커 버스커 <봄바람>
그 봄을 사로잡던 낭만과 추억 속에서 딱 하나 버스커 버스커만 아직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다. 역시 음악만은 생명력이 강하다. 언제 낳을지 모르겠지만 자녀가 음악하고 싶다고 말하면 발 벗고 무조건 시켜야겠다.
선거철이다. 뭔가 시끄럽다. 4년 전 총선 때 나는 속초에 있었다. ‘이번 수도권 생활은 망했어요’ 라고 선언할 찬스였고, 미련 없이 속초로 이사 간 것이었다. 연고 없는 속초에 간 이유는 딱 하나, 속초 앞바다가 잘 생겨서였다. 특히 동명동 포장마차 골목에서 술잔 꺾으며 보는 바다가 아주 매혹적이었다.
속초는 방값이 매우 온순했다. 사람을 물고 뜯고 그러질 않았다. 해변 바로 앞에 보증금 200에 20짜리 1.5룸이 있었다. 창밖의 파도 소리가 잔잔한 자장가를 불러주거나, 미친 굉음을 내며 다 부숴버리겠어 고함치거나 하는 집이었다. 바다의 이중인격 때문에 나는 맨정신을 유지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랬더니 가까스로 일자리도 구해졌다. 설악산 인근 모텔 프런트를 지키는 일이었다. 시설이 낡았는데 비싸게 팔아야 해서 맨정신을 유지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어쨌든 그 속초 생활에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지금 가장 먼저 기억난다. (말장난 미안하다;;) 하루는 서울 사는 애인이 속초까지 놀러 왔었다. 서로 문제가 많았던 긴 겨울을 간신히 견뎌낸 봄날이었고 우리는 따스해진 기온 속에서 몹시 기분이 좋았다.
둘이서 개 끌고 콧노랠 부르며 영랑호를 산책하는데, 어우 봄바람에 만발한 벚꽃 잎이 예식장의 꽃가루처럼 우리에게 마구 쏟아지는 게 아닌가.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한때, 딱 그런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쫄딱 망해 속초에 내려와 대실 손님이나 받고 있지만 좌절하란 법은 없는 거였고, 세상은 원래 이처럼 살 만한 곳이라고 자부하는 듯한 짧은 그 계절. 아름다운 봄이었다.
그런데 그 봄, 아름다움은 또 있었다. 버스커 버스커라는 신인 밴드의 음악이 가는 곳마다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건 서울도 마찬가지라고 애인이 말했다. 어휴 꽃송이가~ 꽃송이가 그래그래 피었네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고 흩날리는 벚꽃 속을 둘이 걸어요 하면서 오만 천지에서 버스커 버스커를 만날 수 있었다. 인생의 가장 낭만적이었던 한때, 딱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은 보컬 장범준의 특별한 톤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엔 추억을 불러 제끼는 입자들이 융숭하게 깔려있는 듯하다. 음악을 듣는 순간, 추억이라는 단어를 자신도 모르게 벌컥 떠올리게 되었고, 단어뿐만 아니라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자동 재생 모드로 영사되었다. 방금 버스커 버스커의 음악을 들은 1초 전마저 추억으로 저장되기도 했다. 특히 봄날이었기 때문에 나는 무력하게 그의 음악에 홀딱 매료되고 만 것이었다.
당장 앨범을 사러 갔더니 다 팔려서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밤에 실내 포장마차 갔다가 그들의 1집 앨범을 몇 번이고 통째 들을 수 있었다. 술집 여주인이 광팬이었다.
“손님, 죄송한데 버스커 버스커만 계속 틀어도 돼요?”
“그럼요. 부디, 전부 듣고 싶어요.”
그래서 오늘의 주제곡 「봄바람」부터 시작해 앨범의 열한 곡을 모두 들은 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모든 곡이 다 좋을 수가 있지?”
낭만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그 앨범을 극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애인이랑 버스커 버스커의 음악을 함께 듣던 시간과, 활짝 웃으며 건배하던 소주와, 가리비 안주와, 바람에 흔들리던 포장마차 격자 문짝 등등이 그 장면 그대로 정지된 채 추억으로 박제되었다. 아아 ‘그 봄’과 버스커 버스커와 특히 그놈의 「벚꽃엔딩」을 절대 못 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못 잊었다.
벌써 4년이 지났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빨라서 맨정신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근데 오늘 혼자 식당에서 메밀국수를 먹다, 또 「벚꽃엔딩」을 듣고 말았다. 면발을 입에 문 채 딱 정지되었다. 일말의 지겨움과 선뜩한 반가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듣자마자 오래전 일인데도 무려 4K 화질로 떠오르는 속초의 봄날, 정확하게는 그 아름다운 봄날의 순간들이 즉각적으로 연동되었다. 맨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순간 가슴이 빨래집게로 꼬집는 듯 아팠다. 담배를 끊었으니 거지 같은 담배 때문은 아닐 거고, 분명 추억 때문일 것이다. 추억은 과거 한때 아름다움의 순간포착이기 때문에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회한의 부작용이 있어서 아픈 것 같다. 많이 아프다. 그렇지만 잠시 흐뭇해하다 한숨이 나올 만큼 아픈 걸 알면서도 우리는 또 아름다운 순간들을 수집하고, 추억을 저장할 수밖에 없다.
쓸쓸해서 소주를 주문할까 했지만 턴테이블 원고마감 때문에 간신히 참았다. 대신 오랜만에 「봄바람」을 반복해서 듣는다. 장범준의 목소리가 없는 연주곡이지만 이 곡에도 추억의 인자들이 무성하다. 이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와 손잡고 왈츠 스텝을 밟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즉시 추억이 될 것 같은 곡이다.
그나저나 속초의 그 포장마차는 손님이 없어 금방 망했고, 나는 애인과 쓸쓸하게도 헤어졌으며, 모텔 근무는 끝내 맨정신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그만두었다. 겨우 정 들기 시작한 속초도 떠났다. 개뿔 그 봄을 사로잡던 낭만과 추억 속에서 딱 하나 버스커 버스커만 아직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다. 역시 음악만은 생명력이 강하다. 언제 낳을지 모르겠지만 자녀가 음악 하고 싶다고 말하면 발 벗고 무조건 시켜야겠다.
어쨌든 버스커 버스커로 인한 인생의 가장 낭만적인 한 때를 추억해 보았고, 그 추억을 또 앓았다. 탄력받아서 최근 발매된 장범준 2집까지 쭉 듣다 보니 지난 추억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며 토닥여 주는 것 느낌이다.
언젠가 세월이 많이 지나면 턴테이블 원고를 쓰던 작업실 책상도 추억이 될 것 같고 <채널예스> 담당자들과 마시던 술자리도 추억이 될 것 같고. 여기 달렸던 독자들의 댓글도 추억이 될 것 같다. 지난 추억들이 아프다면 정신 못 차리게 계속 새로운 추억을 만들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오늘 턴테이블 바늘을 내린다.
*수미쌍관을 위한 사족 -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선거철 풍경은 개판이다. 발전적 재해석도, 웃기자는 패러디도 아닌 리바이벌이다. 우리 정치가 성숙하려면 한참 멀었구나 싶다. 욕심과 당리당략과 권력 암투 사이에서 국민이나 민생은 공허한 구호로만 존재할 뿐인 이런 선거 풍경이 최대한 빨리 봄바람에 휘날려 꺼져주면 좋겠다. 그날을 위해 투표는 꼭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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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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