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나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쁜 남자, 그…그거 아니야!
정말이지 오늘도 나쁜 남자가 고생이 많다
나쁜 남자 판타지의 소비자들은 모두 아는 것을, 정작 나쁜 남자를 팔고 싶은 사람들은 모른다.
“나쁜 남자 판타지에서는 절대 진짜 나쁜 놈이어서는 안된다. 핵심은 ‘남에겐 똥차, 나한테만 벤츠’니까! 파인애플처럼 까칠한 외양 안에 달콤한 순정, 그러니까 ‘나’ 한정 착해지는 기제가 필수적이다.”
나는 원래 무엇이든 미리 하는 인간이 아니다. 닥쳐야 한다.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맹렬하게 딴짓을 하면서 ‘시사,대중문화’ 카테고리에 적합한 칼럼을 쓸 떡밥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가 성시경을 재규어XE의 홍보대사로 뽑았다는 소식이 마감 몇 시간 전의 내 멱살을 잡았다. 아, 아이유도 잘 피해 다녔는데.
재규어 코리아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가수 성시경은 재규어가 바라는 “20-30대의 젊은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한 품위 있는 나쁜 남자 캐릭터”에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나쁜 남자가 또?! 그렇다, 나또! 이것은 초가을을 뜨겁게 달군 맥심 표지 사태와도 맞닿아 있다. “THE REAL BAD GUY”라는 문구와 함께, 살해된 여성의 다리가 비어져 나온 트렁크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 배우가 장식한 표지는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맥심 코리아>가 사과하고 전량 폐기를 결정했지만, 그 이후로도 판매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책임자들은 “소지섭이어도 그랬을까” 같은 말을 SNS에 남기며 문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티를 팍팍 냈다. 그것이 왜 문제적이었는지, 그들은 끝내 이해할 생각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성의도 없었다. 항의하는 사람들은 비유도 예술도 모르는, 1차원적 독자로 보는 시선도 풍년이었다.
<맥심> 사태 때도 생각했지만, ‘나쁜 남자’라는 판타지를 소비하고 싶은 이들의 취향을 저격하려는 시도는 높은 확률로 실패로 돌아간다. 취향 저격에 실패만 하면 센스의 차이라고 하겠는데, 애초에 ‘나쁜 남자’에 대한 범주화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손쉽게 ‘나쁜 남자를 소비하는 저 우매한 여자들’에 대한 조롱과 후려치기로 가지를 뻗는다.
개인적으로 ‘나쁜 남자’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세 가지이다. 첫인상이라고 하면 적절할 것이다. 2002년 나온 가수 비의 ‘나쁜 남자’ 노래,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 그리고 내가 중학생 시절 엄청난 유행이었던 인터넷 소설의 남자 주인공. 비의 ‘나쁜 남자’의 서사는 탈옥범인 남자가 순수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난 네게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아냐, 난 나쁜 남자야”라고 절규하는 내용이다. 당시 꽤나 센세이션이었다. 영화 <나쁜 남자>에서 나쁜 남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여대생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매춘부로 만들어 차지한다. 인터넷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까칠하고 무심하고 ‘예쁘지도 않고 지극히 평범하지만 명랑한 것이 장점인’ 여자 주인공에게 틱틱거리는 ‘싸가지’ 유형에 가깝다. 이 셋은 서로 양상도 ‘나쁜’ 정도도 다르지만,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 나쁜 남자의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나쁜 남자는 잘 팔린다. 마지막의 싸가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까지 유효한 남자 주인공의 코어로, 친절하고 다정한 서브남은 반드시 패배하며 아이돌 남자가수들은 통과 의례처럼 ‘배드 보이’ 콘셉트를 거친다.
그런데 언어는 때때로 놀라울 정도로 무력하고 편협하다. 한 단어 안에 들어가 버리면, 세심한 결이나 맥락은 성능 좋은 믹서기처럼 갈려버리고 뒤엉키기 때문이다. ‘나쁘다’는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하고, 의미들 간의 격차는 그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개나 소나 나쁜 남자랍시고 들이미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나쁜 남자 판타지에서는 절대 진짜 나쁜 놈이어서는 안된다. 핵심은 ‘남에겐 똥차, 나한테만 벤츠’니까! 파인애플처럼 까칠한 외양 안에 달콤한 순정, 그러니까 ‘나’ 한정 착해지는 기제가 필수적이다. 이때 그 똥차가 어떤 똥차인지, 그 나쁨이 어떤 나쁨인지 파악하지 못하면 맥심이나 재규어 코리아 같은 헛발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맥심> 표지 논란의 케이크 위의 딸기는 “좋아죽겠지?”라는 문구였다. 그것은 나쁜 남자 좋아하다가는 이렇게 된다는, 나쁜 남자 같은 중2한 판타지에서 깨어나 현실을 사는 어른이 되라는 명백한 훈계이자 빈정거림이었다. 논란이 되자 <맥심> 측은 타협 불가능한 악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해명했지만, 글쎄. “남에겐 똥차, 나한테만 벤츠”를 단단히 오해해서 “남한텐 똥차, 나한테는 살인자”로 가져왔으니 이거야말로 타협 불가능한 센스 아닌가. 바닥을 기는 젠더 감수성만큼이나, 그게 잘 팔릴 줄 알고 표지에 넣은 판매자의 감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여러 예술적 독해법을 걷어내고, 인물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영화 <나쁜 남자>의 주인공 역시 판타지로서의 나쁜 남자와는 완벽하게 어긋난다. 누가 생존을 담보로 연애하고 싶나영.
그런데 이 나쁜 남자를 이상하게 벤치마킹하면, 생명을 위협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불쾌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SNS에서 받는 충격 중 하나는, “애인이 ~하면?”하고 가정하는 게시물에 달리는 댓글이다. 연인에게 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쌍욕이나 거친 말들이 가득했다. 여자친구에게 “아가리 싸 물라”며 때리는 만화가 ‘상남자’라는 제목을 달고 인기리에 연재되고, ‘나쁜 남자’로 소비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명백한 폭력인 ‘나쁨’은, 예상치 못한 심쿵을 위한 밑밥으로 깔리는 ‘츤츤’과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없고 놓여서도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이 ‘표현이 서툴 뿐인 애정 표현’으로 물타기 되었고, 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다시 재규어 광고로 돌아와 보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재규어는 F-타입 쿠페 론칭 슬로건으로 ‘Good to be bad(나쁜 것이 매력적이다)’를 내걸었다. 재규어의 광고 영상에서는 유명한 악역을 맡은 ‘나쁜 남자’ 3인방이 등장한다. 셜록 홈즈의 악역 마크 스트롱, 아이언 맨 3의 악역 벤 킹슬리, 그리고 말이 필요 없는 톰 히들스턴. 광고는 그들이 악역을 소화하면서 획득한 고유한 ‘매력’으로 꽉 차 있다. 즉 ‘나쁜 남자에게는 재규어가 잘 어울린다’는 재규어의 홍보 멘트에는 괄호가 쳐져 있었던 것이다. ‘(멋지고) 나쁜 남자에게는 재규어가 잘 어울린다.’ 당연히 이때의 ‘나쁜’은 악역의 것으로, 판타지다. 현실의 나에게는 위해를 1도 가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합의된 판에서 정해진 악당의 역할을 다하지만, 그 안에 나에게만은 벤츠일 엑셀을 숨기고 있는 나쁨. 하악! 남은 것은 그저 잼처럼 발리는 일! 마찬가지로, 아무리 배드 보이 콘셉트를 민 아이돌이라고 해도 무대에서 내려오면 하트를 날리는 사랑꾼이 되어 구십 도로 인사하는 법이다.
반면 성시경의 나쁜 남자 이미지는 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성시경은 어떤 나쁜 ‘역할’로 대표되는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어떤 실제적인 특성이 그를 ‘나쁜 남자’로 만들었으며 재규어 코리아 관계자의 마음을 훔쳤다는 뜻이다. 누구나 알겠지만 성시경은 오랫동안 다소 까칠하지만 로맨틱한 남자라는 기믹을 팔아왔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딴따라지만 명문대를 나온, 지적이고 가식이 없어 할 말은 하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종종 재수 없는 것으로 오해 받는’? 이것은 그가 <황금어장-무릎팍 도사>에 나와서 털어놓은 고민이기도 하다. “같은 말을 해도 사람들이 불쾌해 해요.” 성시경의 목소리를 좋아하던 때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오해에서 비롯된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성시경이 내놓는 발라드가 서정적이고 달콤하다는 점도 그의 나쁜 남자 이미지를 부채질했다. 하지만 최근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비치는 성시경의 모습은 판타지로서의 ‘나쁜 남자’와는 거리가 멀다. 이제는 왜 사람들이 그의 말에 불쾌해했는지 알겠다. 그는 자주 자신의 가치는 대단한 듯 높이지만 타인의 외모를 물건 품평하듯 하고, 딸을 낳은 사람이 장인어른의 마음을 알게 되서 아내와 잠자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헛소리를 대단한 깨달음처럼 말하며,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자 연예인과 여자 스텝의 외모를 비교하면서 턱짓으로 가리키는 등 ‘어떻게 봐도 나쁨’을 부지런히 생산한다. 이것은 판타지로서 소비하고 싶은 나쁨이 아니고, 재규어가 노리는 매력으로서의 나쁨도 아니다. 그냥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비하하며, 그것을 성찰 없이 말하는 태도가 쿨하다고 믿는 나쁨일 뿐이다. 만만한 이들을 먹잇감으로 삼기 때문에 더욱 치졸하고 무례한. 톰 히들스턴이나 벤 킹슬리의 악함을 보라지, 짱 쎈 주인공과 맞장 뜨지 않냐며.
나쁜 남자 판타지의 소비자들은 모두 아는 것을, 정작 나쁜 남자를 팔고 싶은 사람들은 모른다. 스스로 “하…난 나쁜 새끼야…나 같은 걸 사랑하지 마…다쳐…☆”에 심취해 있는 분이라면 역시 높은 확률로, 그거 아니니까 다른 콘셉트를 찾아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나쁜 남자 좋아하는 건 어려서 그런 거야, 뭘 몰라서 그래, 하는 오지랖이 목구멍까지 기어 나오는 분도 그대로 꼴깍 삼키는 것을 추천한다. 높은 확률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남들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쁜 여자에 대한 판타지는 어떤지 모르겠다. 누가 이거에 대해서 얘기해주실 분 있으면 제보 좀.
정말이지 오늘도 나쁜 남자가 고생이 많다.
[추천 기사]
- 참을 수 없는 조건부 승인의 알량함
- 빠순이 발로 차지 마라
- 만족시켜야 하는 남자, 보상해줘야 하는 여자
- 내 나이가 어때서~사랑하기 딱! 좋은~나인데~
- 살아남아라! ##쨩!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이진송> 저12,000원(0% + 0%)
이 책은 미래의 소설가를 꿈꾸는 이화인들을 격려하고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와 이대학보사 공동 주관으로 실시되는 「이화글빛문학상」 경장편 소설 공모의 제7회 수상작이다. 올해의 수상자는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진송 씨로, 20대 소설 창작 지망생의 일상과 고민을 현실적이고 감칠맛 나게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