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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미워해봤자 손해인 남녀 관계

『사랑은 사치일까?』 번역가 양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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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가이자 여성학자인 벨 훅스의 ‘사랑 3부작’ 완결판인 『사랑은 사치일까?』가 출간되었다. 『올 어바웃 러브』가 보편적인 담론이었다면, 이번 벨 훅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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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의 ‘사랑 3부작’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이어 사랑을 다룬 명저로 꼽힌다. 이번에 3부작 완결편인 『사랑은 사치일까?』가 번역되었다. 벨 훅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녀가 만난 연인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여성 문제 전반을 꿰뚫는 통찰력을 함께 담았다. 끊임없이 재밌는 일을 찾아다니며,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도 마구 권하는, 양지하 번역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제가 연대(communion)인데 한글판 제목으로 ‘사랑은 사치일까’를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목은 현실문화 편집부의 고민이 많이 반영된 결과예요. 우선 이 책은 ‘여자에게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특히 20~30대 젊은 여성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만약 원제 ‘Communion: Female Search for Love’를 최대한 살려 예컨대 ‘사랑을 탐색하는 여자들의 연대와 교감’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취업하고 돈 벌고 학자금 갚으며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지지 않기 위해 팍팍한 삶을 사는 제 또래 청년들이 ‘사랑’에 관한 아무리 중요한 책이 나온들 반색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먼저 있었어요. 사랑의 감정보다는 사회생활에서 감정을 ‘다치지’ 않는 것이 당장 더 시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금 우리의 현실과 사랑이라는 주제 사이에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연결다리를 놓아주기로 했고요. 그래서 지금 내 처지에서 ‘사랑은 사치일까?’라는 스스로에게 되묻는 물음의 형식으로 결정되었어요.

 

사실 ‘연대’라는 말도 communion의 뜻을 완전하게 모두 담아내지는 못하는 말입니다. communion은 어원상 ‘함께 나누다’란 뜻으로 교회 성찬식에서와 같은 종교적 공동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요. 이를 세속의 차원으로 가져올 때 ‘연대’ ‘교감’으로 번역될 수 있겠지요. communion은 벨 훅스가 궁극적으로 여성들이 가지길 바라는 행복감을 표현한 말이지만, 지금 한국 청년들이 살아가는 맥락을 만약 벨 훅스가 알았다면 ‘Communion/연대’와는 다른 제목을 한국어판에 달았을 것이라는 담당편집자의 확신에 저도 적극 공감했지요.


첫 번째 단행본 번역 작업으로 벨 훅스라는 저명한 페미니스트의 글을 선택하셨습니다. 선생님께 벨 훅스는 어떤 존재인가요.
 
저는 영문학과에서 토니 모리슨이나 앨리스 워커 같은 흑인여성문학을 공부할 때 학자로서 벨 훅스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고, 페미니즘이나 인종, 계급 문제에 대한 다소 진지한 책으로 먼저 접했는데요, 아마 일반 국내 독자들은 벨 훅스를 올 어바웃 러브』로 많이 알게 되셨을 것 같아요. 가장 판매가 많이 되기도 했고 사랑이라는 대중적이고 포괄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서요.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그녀의 연구와 성찰을 담으면서도 대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랑은 사치일까?』가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고서 바로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생각을 했죠. 저한테도 그렇고 다른 독자들에게도 그렇고 벨 훅스, 하면 변화무쌍한 시대에 한 획을 그은 ‘멋진 왕언니’ 정도의 느낌이 아닐까요? ^^

 

흔히 번역가는 첫 독자라는 말을 하잖아요. 『사랑은 사치일까』의 첫 번역가이자 첫 번째 독자로서 선생님께서 이 책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역자 후기에도 썼지만 일단은 이 문장들을 옮기기가 녹록지 않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어요. 아무래도 어딘가 기고되었거나 발표된 글이 아니라 곁에서 이야기해주듯 쓴 글들인지라 어려운 단어나 개념들은 별로 나오지 않는데, 문장 자체가 평이한 듯하면서도 길고 구어체이거든요. 아주 자유롭게 쓰인 문장이라 마치 대선배가 학회 뒷풀이에서 후배들한테 해주는 이야기들을 녹취한 것 같은, 혹은 왕언니가 여동생들을 줄줄이 옆에 앉혀놓고 편하게 이런저런 상담하고 조언해주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 어감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Bitch를 ‘쌍년’으로 번역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한글로 대입할지 고민했던 부분이 꽤 있었을 것 같은데요. 번역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부분을 알려주신다면.

 

네. 물론 그 부분... 고민이 많았습니다. ‘쌍년’ 말고는 대체할 만한 다른 단어가 정말 없더라고요! ‘개 같은 년’, ‘앙큼한 년’으로 풀어쓰는 것도 웃기고, ‘암캐’는 너무 번역투이고, ‘잡년’ 등도 물망엔 올랐으나... 왜 ‘빙썅(빙그레썅년)’이라는 표현도 있잖아요. 약간 얄미우면서도 인간적인 어감을 담고 있어서 결국은 이걸로 해야겠다 싶었죠.

 

기억에 남는 몇몇 부분들이 있어요. 남녀관계에 대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까는(!) 부분을 재밌게 읽었어요. 또 여성 독자라면 이런 부분에 누구나 공감하실 듯해요. 여자들이 유독 타인으로부터의 승인받길 갈구하고, 관계 내에서 인정받는 모습에 따라 자신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랑하기가 더 어렵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거든요. 남녀관계에서 상대에게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부분들도 굉장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어요.

 

그 외에 번역하면서 고민했던 건 사실 각 장의 제목들이 너무 직접적이고 딱딱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많이 아팠는데, 편집자가 센스를 발휘하여 내용에 잘 부합하면서도 매력 있게 변신시켜주었어요. 사실 원고를 계속 들여다보다보면 욕심도 많이 생기고 해서 어느 선에서 그쳐야 하는지 어디까지 바꿔야 할지 정리가 잘 안 될 때가 있어요. 이번에는 편집자가 교통정리를 잘 해준 것 같아요. 제가 편집자 입장일 땐 저도 잘 쳐낸다고 생각했는데 입장이 바뀌니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역자 후기에서도 쓰셨듯, 이 책이 10년 전에 미국에서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에 유효한 지점이 많은데요. 이 책이 지금 한국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요.

 

사실 남녀문제가 성차를 바탕으로 한 대립구도를 띠고는 있지만 기저에는 계급문제가 밀접하게 얽혀 있어요. 특히 우리나라는 사적/사회적 영역에서 전통적인 성 역할과 급변하는 사회 현상과 일상을 인식의 속도가 따라오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바로 윗세대만 하더라도 보편적인 가족체계나 주류 문화의 형태가 굉장히 뚜렷하고 그걸 조금만 벗어나도 굉장히 피곤해지잖아요. 서로 간 오지랖도 넓고 말이죠(웃음). 근데 우리 세대는 취업, 결혼, 출산 등등 생애 주기별 과제가 있고 그걸 따라가기만도 벅차다보니 가장 근본적인 문제,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성찰할 만한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최근 일베나 메르스 갤러리 같은 온라인 공간을 통해 나오는 여성/남성 혐오를 보면 결국 다들 힘들어서, 다른 권력관계에서 받은 피해의식을 그나마 가능한 영역에서, 손쉬운 형태로 표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유독 남녀 문제에서 약자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표출되는 방식이 흥미롭죠).

 

근데 다른 갈등과 달리 남녀 갈등 문제는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지 않는 관계라는 거, 즉 남녀 모두 가부장제의 희생자고 서로를 적으로 돌려봐야 해결점이 없다는 걸 다들 조금씩 인지하면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는 성적 취향, 종교나 인종, 여타의 다른 문제들처럼 차이를 인정하는 것, 우리가 적이 될 이유가 없다는 연대의식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봐요. 특히 우리나라는 ‘몇 살에는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 ‘여자/남자라면 이래야 한다’라는 식의 고정관념이나 편견, 기존의 성 역할에서 벗어난 삶의 형태에 대한 관용이나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두 가지 키워드를 꼽으라고 한다면, 페미니즘과 사랑일 것 같습니다. 선생님만의 페미니즘, 사랑 정의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둘 다 키워드는 ‘상생’ 같아요.

 

우선 페미니즘 문제는 앞서 말했듯 ‘우리는 적이 아니며 가부장제는 남녀 모두를 희생시키는 제도이다’라는 관점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보고요. 분명 남녀에 차이가 있는데 모든 걸 똑같이 해야 한다거나 같아야 한다는 건 잘못된 접근인 것 같아요. 서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랄까 혜택이 있다면 그걸 내려놓고 ‘어차피 너나 나나 희생자다’라는 입장으로 서로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이해하며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해나가는 게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사랑은 지금도 고민이 되고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어려운 문제지만 벨 훅스의 정의처럼 일단은 ‘서로를 성장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관계가 그렇지만 일방적이거나 의존적이거나 불평등한 건 지속되기가 어려우니까요. 가장 이상적인 그리고 지향해야 할 사랑은 너와 내가 동일하지 않지만 동등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서로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는 형태 같아요. 근데 개인적으로 우정과 사랑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아직 저도 솔직히 정리가 안 되네요(웃음)... 우선은 ‘함께 있고 싶고, 상대를 위해 기꺼이 변하고 싶고, 그렇게 변해가는 서로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관계’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내 눈에 좋아 보이는 책’을 많이 소개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앞으로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저는 진~~~짜 관심사가 잡다해요. 한번 꽂히면 집중적으로 들들 파는 스타일인데 그게 몹시 얕고 넓달까. 그런데 책은 그 분야에 대해 오래 고민하고 연구해서 통찰을 얻은 사람들이 막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쓴 거잖아요. 이런저런 매체들에 지금 밀리고는 있지만 각 분야의 정수라 할 만한 것들은 결국 책이라는 형태로 남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저는 여성학, 문학, 예술, 심리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최근에는 명상, 치유에도 관심이 많아요. 만화도 굉장히 좋아하고요. 번역가로서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니까 분야나 장르에 한정을 두기보다 그때그때 제 관심사에 맞고 끌리는 책, 말 그대로 재밌거나 유익하거나 새로워 보이는 책이라면 뭐든 능력과 기회가 닿는 한 많이 소개하고 싶어요. 아직은 전업 번역가가 아니니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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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치일까? 벨 훅스 저/양지하 역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신뢰받는 학자이자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을 만나오며 상담 현장과 운동 현장에 참여해온 액티비스트답게 벨 훅스는 자신과 타인의 경험과 고민을 지식과 통찰로 탁월하게 엮어낸다. 풍부한 삶의 경험담으로 누구에게나 쉽게 읽히면서도 이따금씩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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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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