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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과 기억, ‘사건’이라는 시간

‘사건’이란 시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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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인의 전언은, 이제 우리에게는 ‘4월의 기억은 잔인하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러나 ‘기억하라’라는 말이 넘쳐나는 가운데, ‘기억’이라는 말은 또다시 여러 상투어와 다르지 않은 무감각한 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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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셔터스톡

 

사건’이란 시간은 무엇인가


현대과학이 우리에게 알려 준 기막힌 역설 중 하나는 시간의 상대성에 관한 인식이다. 물리적 세계는 늘 객관성과 불변성과 고정성의 측면에서 주로 이해되어 왔고 과학은 그러한 객관 세계의 성질들을 증명해 왔으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혁명 핵심에는 시공간의 ‘상대성’ ‘주관성’에 관한 인식론적 전복이 있다.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게 간다’는 얘기는 단지 주관적 기분이 아니라, 물리적 세계의 객관성을 드러내는 얘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역사나 ‘사건’적 계기를 겪는 ‘삶’의 시간에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얘기이기도 하다. 자연과학이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대상으로 파악하는 ‘물리적 생명체’가 아니라, ‘체험’으로서의 ‘삶’ 말이다.    


다시, 어느새, 4월이다. 2014년 4월 이후 한국이라는 삶의 공간에서 ‘세월은 다르게 간다’. 사회의 시계추를 바꿔 놓았고,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의 현재 시각을 확인하게 한 계기적 사건으로 인해 주체들의 기분이 바뀌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후 그 사건이 낳는 연속적인 사건의 계열들이 다르게 맞물리면서, 사건의 계열, 사건의 배치, 시간 지평 전체가 다른 방식으로 변화된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으로 사건(이후)의 시간을 보게 된다면, 사건에 대한 ‘기억’은 하나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파생시킨 사건의 연쇄, 사건의 계열, 시간의 지평 전체를 기억한다는 함의를 갖게 된다. 여기에서 과거의 기억은 그 기억이 연쇄적으로 낳아 이르게 된 현재를 직시하는 일이 되며, 이것이 다시 낳게 될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을 예상하고 대비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망각’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에 대한 망각은, 그 사건으로부터 파생되었던 사건 계열에 대한 망각이며, 이는 그 사건의 결과로서 오늘에 이른 현재 시간에 대한 외면이자, 아직 당도하지 않은 시간들에 대한 무대비를 뜻한다. 어떤 결정적인 과거와 그것에 의해 파생된 현재와 그것이 일으킬 매우 중대한 미래에 대한 망각, 우리는 이걸 삶 전체에 대한 망각과 구별할 수 있을까. 따라서 다시 기억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직시이며 미래의 예측과 대비가 되는데, 이런 차원에서 보면 기억은 망각이라는 나태한 정신이 필연적으로 도래시킬 ‘죽음’에 맞서 ‘삶’이 절박하게 살아움직이는 적극적 응전력이 되는 것이다.


‘목숨’의 겨울잠과 ‘삶’의 기억


현대시의 한 장을 열었으되, 매우 난해하기도 하여 한국에서는 오히려 상투적이고 손쉬운 방식으로 일반에게 알려지고 소비되는 엘리엇의 한 시를 적는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기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메마른 뿌리를 흔든다 / 겨울은 따뜻했다 /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작은 목숨을 마른 뿌리로 부지시키면서
- T.S 엘리엇, <황무지> 중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유명한 시구는 이 단락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그 뒤를 따르는 몇 개의 시구들이 지시하는 정황에 따라 중층의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고도의 상징이 내포되어 정리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그래도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단락은 두 개의 내용으로 나뉘어 있다. ? 겨울 땅속에서 “마른 뿌리”가 “작은 목숨”을 부지시키고 있으며, ? 4월은 보이지 않던 그 “목숨”이 땅 위로 올라와 개화와 생명의 약동을 가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는 얘기다.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부분은 왜 생명의 계절을 ‘잔인하다’고 말하는가다. “작은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저 “마른 뿌리”가 실은 ‘말라붙은 과거’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 부활한다는 기독교적 순교나 늙은 것이 어린 생명을 키운다는 모성적 비유라기보다는, 목숨의 유지와 성장?개화가 ‘죽음’으로 상징되는 ‘반생명’과 맺는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암시라고 봐야 한다. 


이 시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대목은, 겨울의 대지가 ‘따뜻했던’ 이유를 “망각의 눈(snow)”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겨울 죽은 땅 속 메마른 뿌리를 흔드는(깨우는) “봄비”가 “기억과 욕망”의 이미지라는 데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의미심장한 아이러니를 내포하는데, 겨울의 대지와 마른 뿌리, 곧 ‘반생명’을 상징하는 그것들의 실체가 “망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 뿌리를 흔들어 꽃을 개화시키는 것은 “기억과 욕망”이라는 뜻이다. 망각은 목숨을 부지하게 하고, 그 안에서 목숨의 연명은 “따뜻”하다. 망각은 ‘목숨’을 둘러싼 건조하고 끔찍한 것으로부터 ‘목숨’ 그 자신의 시선을 돌려세움으로써, 안전한 ‘겨울잠’을 보장한다. 그러나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기르”고 ‘겨울잠-망각’의 늙은 뿌리를 흔드는 “봄비”는 “기억과 욕망”이다. 하지만 생명을 약동시키는 “봄비”는 겨우 살아가는 “작은 목숨”들에게는 또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가. ‘깨어난다’는 것은 세계의 참상을 보는 눈을 갖는 것이요, 목숨을 연명시키는 안전한 것의 품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니까.


이 얘기를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꽃피울 것인가. 그것은 메마른 뿌리의 품속에서 계속 잠잘 것인가, 봄비를 맞으며 깨어나고 흔들릴 것인가 하는 질문, 망각과 각성에 관한 ‘잔인한’ 물음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인의 전언은, 이제 우리에게는 ‘4월의 기억은 잔인하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러나 ‘기억하라’라는 말이 넘쳐나는 가운데, ‘기억’이라는 말은 또다시 여러 상투어와 다르지 않은 무감각한 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 시를 떠올려 보자. 그에 따르면 ‘기억’의 본질은 어떤 특정 내용의 회고에 있다기보다는, ‘안전’하지만 나태한 정신에 의지해 목숨의 연명만을 지상 목표로 하는 죽은 삶으로부터 ‘깨어남’을 뜻한다. 그리스에서는 짐승 모두에 해당하는 무차별적인 ‘목숨’의 의미를 ‘조에(zoe)’로, ‘인간’ 특유의 ‘삶-생명’은 ‘비오스(bios)’라고 구별해서 불렀다. 이런 관점을 빌리자면 ‘기억’은 ‘비오스’ ‘인간’ 특유의 능력이다. 그러나 그 능력을 발휘하고 제 안에 보존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 이 원고는 ‘법보신문 1290호’ 원고를 수정?보충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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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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