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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 사건적인 시간의 봄

깊고 넓고 먼 곳을 개방하는 만남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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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라는 시간은 과거를 모르는 이들이 만나서 잠재적으로 서로의 미래를 탈취하고 선취하며 공유하는 기적이 예비되는 시간이다. 인생의 유연한 시간지평에서 가장 강력하고 싱그러우며 달콤한 타자를 맞이하는 봄, ‘신학기’는 그러므로 3월에 ‘시작’되는 게 맞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사회’ 아닌 타자들

 

달력의 시작은 1월 1일부터지만, 학생들에게 한해의 시작은 3월부터다. 바로 ‘신학기’라는 특별한 시간 때문이다. ‘신학기’를 특별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때야말로 학생들은 발본색원적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력이 1월 1일에서 새로 시작된다고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자기가 속한 일상의 물리적 상황이 달력 바뀌듯 바뀌는 일은 실제로 많지 않다. 이직하는 경우처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직장인들은 ‘새해’가 되도 만나던 사람을 만나고, 하던 일을 지속한다. 나누던 얘기를 또 나누고, 읽었던 종류의 책을 읽고 비슷한 취미를 고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의 고유한 사고와 취향을 유지시킨다. 경험의 내용은 동일하며,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이라는 뜻이 ‘아이덴티티(identity)’ 즉 ‘같음(동일성)’이라는 뜻을 공유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거꾸로 말해 자기의 ‘같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경험 형식이 바로 그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기’를 생각해보라. 이때는 참으로 놀라운 단절과 변화가 일어난다. 학생들은 ‘정말’ 다시 시작한다. 초등학생이건 중고등학생이건 대학생이건 간에 학생의 ‘신학기’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다. 곁에는 갑자기 새로운 친구들이 ‘무더기로’ 생겨난다. 이들은 ‘곁에’ 머물 사람들이며, 어쩌면 아주 긴 시간 함께 할 인생의 동료가 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인생의 순간일 수도 있다. 놀라운 것은 이들 중에 기분과 취향과 신념을 나누고 교감하는 우정의 공동체를 이루는 이들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때로 우정의 공동체는 연인들의 공동체로 바뀌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 공동체는 정서적이며 때로는 맹목적이다. 신념을 담보하기도 하며 몸을 공유하기도 하고,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기도 한다. 이 무더기의 새로운 친구들은 신학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났지만, 그러므로 지하철에 함께 탄 무심한 행인들 같은 존재가 아니다. 신학기의 이 존재들은 지금까지 타자였지만 지금부터는 당신의 아이덴티티에 영향을 줄 ‘비타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와 타자 사이를 유동하며 출렁인다. A의 과거와 상관없던 그들은, 신학기 이후 A의 미래 시간을 일정 정도 담보하며 때로는 결정적으로 매개하는 특이한 존재가 된다. 학생 A에게 그들의 출현은 그 자체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잠재적 미래 시간을 굴절시키는 ‘사건적’ 존재다. 신학기에 만난 어떤 이들은 ‘사회’가 아닌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묶인 특별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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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넓고 먼 곳을 개방하는 만남의 시간


신학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잠재적 계기를 매개하는 존재로 ‘선생님’이라는 타자가 있다. 학생이란 폭발하는 감성과 지성의 시간성을 제안에 담지하고 있는 존재다. 그 시기는 40대나 50대와는 다르다. 이 시기에 누구와 만나 어떤 대화를 하는가가 결국 그의 삶을 결정짓는다. 어떤 경우 ‘선생님’과 ‘학생’의 조우는 신학기라는 시간에 발생하는 결정적인 존재론적 사건이 된다. 이 ‘사건’은 때로는 두 사람 간 관계를 초월하여 예상할 수 없이 넓고 강력한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비극 작가가 되려고 했던 플라톤은 시장통에서 젊은이들과 논쟁하고 있던 늙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철학자가 됐다. 플라톤이 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인류의 전환을 가져올 특별한 선생님과의 만남이 없으리란 법이 없는 게 신학기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시인들 중에는 자기가 시인이 된 것은 중고등학교 국어시간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인의 시간은 잠재적인 형태로 이미 그 만남의 시간에 예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만남에서 미래는 미리 당겨진다. 어떤 과학도가 한 탁월한 과학자 스승과 조우한 신학기의 영향력은 인류적일 수도 있다. 


대학의 신학기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은 상대적으로 학생 자신의 능동적인 선택에 의해 가능해질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수업과 교수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대학의 신학기이니까. 이 능동적 선택으로 인해 학생으로서 ‘나’는 한 인간의 학문적 엑기스를 만난다. 그러나 강의실의 칠판 앞에 선 그 사람은 학문을 담지한 존재이므로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한 명의 교수가 강의하는 수업은 특정 분야에서 혼신의 전투를 감행하여 인류가 이룬 지금까지 앎의 거의 전체일 수도 있다. 결정적인 만남의 경우 ‘나’는 하나의 새로운 강의를 통해 지금까지 나의 정체성을 이룬 지성과 감성의 대전환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것은 내 정체성의 더 큰 확장을 이룬다. 이것은 내 바깥 존재와의 조우로 인해 발생하는 내 지적 경험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타자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타자는 ‘나’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고 운동하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나와 타자 사이에서 역시 유동하는 타자다.

 

이 유동성, 이 운동성이 클수록 ‘나’라는 정체성을 해체하고 확장하고 전환시키는 타자의 범위는 더욱 확대된다. 새로 쓰는 필기노트는 타자가 겪었던 경험의 시간을 내 시간으로 옮겨오는 일이며, 새로운 책의 목록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타자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고 여행하게 한다. 나는 한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 선생님이 영향 받았던 선생님의 선생님을 만난다. 이때 그 선생님은 사람이 아니라 ‘책’일 수도 있다. 그 선생님의 선생님은 과거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인류라는 유적 존재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이상과 지혜의 지점과 맞닿아 있다. 내가 만난 타자는 생각보다 깊고 멀고 큰 존재의 바다와 닿아 있다. 신학기는 그런 점에서 개별적인 ‘나’를 ‘보편적인 세계’와 연결시킨다.  

 

사건적 시간의 봄


신학기는 매우 ‘사건적인 시간’이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타자와 만나는 시간은 흔치 않으며, 이토록 내 삶에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타자들이 한꺼번에 출현하는 시간은 극히 드물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내 안에 ‘깃드는’ 타자들의 가능성의 출현이다. 그들은 ‘친구’로 ‘연인’으로 ‘선생님’으로 ‘나’라는 좁은 울타리를 기습하고 침투하며 질문하고 반성하게 하고 운동시키며 어딘가로 함께 가자고 말한다. 이 중에는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며, 섞을 수 없는 것을 섞으며, 줄 수 없는 것을 주고 받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알아듣는 타자와의 만남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회’가 아닌 만남이 가능해지는 시간, 그것이 바로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맞이하는 신학기다. 타자는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나도 그들 안으로 들어가서 공감과 우정과 연인들의 공동체를 건설한다. 학생이라는 인생의 가장 유연한 정체성의 시간지평에 서서 친구가 된 둘은 서로의 가장 깊숙한 지점에 닿으며, 연인이 된 그들은 은밀하고 위태로운 세계를 모험하는 자들이 되기도 한다. 어떤 선생님, 어떤 수업과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인류적 고민을 함께 나누고, 인류적 이상에 공동참여하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이때 폐쇄적인 개인은 공동의 지평으로 개방되며, 얄팍한 일상의 시간은 과거의 지층으로 깊어지며 미래의 우주로 확장될 수도 있다.


신학기라는 시간은 과거를 모르는 이들이 만나서 잠재적으로 서로의 미래를 탈취하고 선취하며 공유하는 기적이 예비되는 시간이다. 인생의 유연한 시간지평에서 가장 강력하고 싱그러우며 달콤한 타자를 맞이하는 봄, ‘신학기’는 그러므로 3월에 ‘시작’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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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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