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우리’는 시간을 공유했을까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다. 가까운 식구의 부고(訃告)를 전해 듣는 순간만큼이나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까. 무슨 근거로 ‘그’를 ‘우리’라고 생각했을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은 실은 생의 시간 역시 각자의 몫일뿐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자기조차 제어할 수 없는 죽음이란 곁의 식구에게는 더더욱 무력하다. 공동의 시간에 거주했다고 생각하지만, 삶의 시간은 제 각각 다른 시계침을 작동시키고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생의 시간에서 식구의 시간이란 교집합이지 동치가 아니다. 교집합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영속하지 않는 생은 우주적 시간에서 그와 나를 아주 부분적인 순간 교차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와 나는 매우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지만 따지고 보면 공유한 시간은 미미하다.
우리 몸에 어떤 혈연적 유사성, DNA의 상동성이 깃들었다고 한들 삶의 개별성은 각자의 몫으로 주어지고 보존된다. ‘시간’을 만드는 것은 체험이지 피가 아니다. 물론 공동공간, 혹은 유사 공동세계에 거주하는 식구는 상대적으로 이 체험의 상호성을 ‘남’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이 공유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쉽게 더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를 ‘나’의 연장선이라고. 피의 동질성과 공간의 공동거주, 그리하여 시간을, 체험을 ‘전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의 시간이 곧 나의 시간이다. 그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그는 나의 의지다. 그는 곧 나다!
존재의 시간은 개별적이다
그러나 어느 날 매우 느닷없는 죽음을 전해 듣는다. 가까운 식구(또는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좋다)의 단순한 부고가 아니라 ‘스스로 끊은 목숨’이란 얘기를 전해 듣는다. 이러한 종류의 부고가 주는 충격은 몇 가지 차원에서 우리의 일반적 ‘시간관’을 해체해버린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생’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지나치게 안이했다는 생각을 겨우, 그러나 분명하게 지각한다. 평균적 수명에 대한 산술적이고 기계적인 적용을 통해 우리는 개별적 생의 시간을 무차별적인 것으로, 모든 존재의 시간을 부지불식 간 ‘양(量)’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각자 개별적 생의 시간을 산다는 걸 그제야 새삼스레 알게 된다. 저 인생의 시간은 이 인생의 시간과 똑같은 것으로 예비되어 있지 않다. 나의 생의 시간 역시 그들의 시간과 비슷한 ‘양’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근거 없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폭력적’ 부고가 주는 가장 큰 충격은 그와 내가 ‘나눈 시간’이라는 생각이 근거 없다는 걸 확인하는 데에서 온다. 그것은 어떤 동질성, 그와 내가 나누었다고 생각했던 체험들이 나의 상당한 오해였음을 확인시킨다. 내 오해와는 달리 나의 시간과 그의 시간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음을 확인시킨다. 이러한 시간의 분리는 ‘주체성’ 또는 ‘주관’이라는 이름의 ‘나’가 오해하고 있는 ‘타자’에 뒤늦게 눈뜨게 한다. 그는 내가 아니었으며, 그는 나와 다른 것을 보고 있었으며, 그는 나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꿔 말해 나는 그의 생각과 고민과 절망에 대해 타인이었으며, 그의 가장 절박한 시간에조차 그의 ‘곁에’ 있지 못했던(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던 것일까. 나와 그는 서로에게 타인이었을 뿐.
영정의 얼굴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느닷없는 전화를 받고 황망한 정신을 수습도 하지 못한 채 장례식장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막상 장례식장에 와서는 머뭇대며 그 안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사실 확인의 순간을 지연시키고자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초조감 속에 주춤댄다. 하지만 상황을 마냥 지연시킬 수는 없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간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라고 여겼던 ‘그’의 사진을 ‘영정’으로 마주한다. 사진 속에 얼굴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웃고 있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 그러나 나의 얼굴이 그의 얼굴을 대면하는 이 순간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시간 지평으로 시간이 분할되는 순간이다.
사진 속의 얼굴은 생전의 얼굴이다. 나는 그의 생전의 얼굴을 ‘영정’으로 마주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얼굴은 산 자의 얼굴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그들’의 죽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현재 이 세계시간의 표면이자 공동공간의 표정이다. 장례식장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스스로는 경험해보지 않은(경험 불가능한) 죽음이라는 다른 시간, 다른 차원과의 조우를 방금까지 살아있던 타인의 ‘생생한’ 얼굴을 통해 마주한다는 사실에도 있다. 산 자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한 표면이었던 생생한 얼굴은 국화꽃과 향로의 작은 불씨가 만드는 가느다란 연기에 휩싸여 제대 한가운데 무심히 놓여 있다. 사진 속 얼굴은 나를 마주하고 있지만 그 얼굴은 이제 다른 시간으로 물러나 있는 얼굴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그의 얼굴을 갑작스럽고 폭력적으로 현재 시간에서 과거의 벽장으로 밀어 넣는다. 얼굴을 서로 ‘실시간으로’ 맞대고 있다는 뜻의 ‘대면(對面)’은 말이 가 닿지 못하는 물리적 어긋남에 직면한다. 맞대고 있으나 이 맞댐은 물리적으로 실체에 가 닿지 못한다. 대면은 일종에 어떤 허깨비와의 조우 비슷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대면을 전적으로 허깨비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영정’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존재의 표면이다. 영정과의 ‘대면’은 저 시간으로 물러났으나 아직 물리적으로는 여기 시간에 흔적을 지우지 못한 그림자와의 조우다. 그의 얼굴은 현재에서 막 과거가 되었지만, 이 과거는 현재에 깊은 시간의 웅덩이를 만든다. 깊이 패인 웅덩이는 ‘우리’의 공동시간을 함몰시킨다.
영정을 마주한 순간 우리는 갑자기 교란된 시간의 웅덩이에 빠져 당황스럽다. 매끄럽고 연속적이던 이승의 지표면에 다른 차원으로 열린 깊은 웅덩이가 패였기 때문이다. 영정의 얼굴은 그 웅덩이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이해할 수 없어 극도로 당황스러워하는 여기 공동시간 속 존재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영정의 얼굴은 우리를 마주하고 있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두 시간의 어긋남을 표면화한다.
자기 의지에 의해 스스로 다른 시간을 선택한 식구의 얼굴은 이 어긋남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괴상하고 폭력적인 시간의 절단면이다. ‘우리’였던 줄 알았던 그는 이 선택을 통해 자신이 공동공간 속에서 실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던 ‘타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천명한다. 이러한 종류의 얼굴에서 진정한 비극성은 ‘이승’과 ‘저승’의 시간 지평 사이에 펼쳐져 있지 않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이 얼굴이 ‘우리’라는 이름의 안이한 공동공간, 공동시간에서 이미 철저히 ‘타자의 시간’에 결박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을 뒤늦게 확인하는 일이다. 부조리한 죽음은 '우리'라는 인칭적 공동주관성에 내재한 허위, 부조리한 고독과 타자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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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