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라는 낯설고 위험한 시간에 관하여
책은 책상 위 ‘거기에’ 놓여 있지 않다
책(지식)의 종류에 관한 세 가지 고전적인 정의가 있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책(지식)의 종류에 관한 세 가지 고전적인 정의가 있다.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책, 알고 있던 사실의 부정확함을 교정해 주는 책, 알고 있던 지식을 다시 한 번 정리해 주는 책. 세 가지 종류의 책은 조금씩 다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책을 고정된 사실들의 묶음으로서 지식패키지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이해지반 위에 있다. 책은 하나의 물건이자 ‘명사형’이다. 물건으로서의 책은 이미 완료된 사물이며, 독자는 그 사물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다. 여기에서 책은 사각형의 종이묶음으로, 서점이나 책상 위에 놓여 특정 공간을 점유한 물건 형식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내가 들고 다닐 수 있으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물건이다. 그것은 내 손에 있으며, 그 내용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사실들의 목록이며, 내 현실의 삶에 유익한 무언가를 준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은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책은 ‘좋은 물건’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전래의 교훈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여기에는 책이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 현실적 유용성에 관한 확고부동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삶(세계)을 ‘쓸모’를 고려하여 구축된 유기적 의미 연관체계로 규정했다. 여기에서 삶은 쓸모로 이어진 도구들의 연관체계다. 책이란 그런 점에서 보면 현실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도구’다.
그런데 책은 정말 ‘도구’인가. 책도 분명히 어떤 종류의 ‘쓸모’를 지니고 있을 테니 ‘도구’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쓸모’가 문제가 된다. 책의 쓸모는 정말 ‘쓸모’일까? 우리는 하나의 책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매일 자기 책상 앞에서 확인한다. 그러나 책은 ‘거기’ 정말 ‘놓여’ 있는가? 그것을 완료된 지식의 종이묶음, 하나의 소유물, 물질성을 소비하는 물건이라고 보면 그렇다. 하지만 책은 정말 완료된 사물인가. 책을 소유한 사람은 책을 다른 물건처럼 ‘소비’할 수 있는가. ‘소비’라는 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우선 물건이 내 현실의 필요성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이 필요성은 내 의지에 의해 조정될 수 있고 제어될 수 있어야만 한다. 둘째 소비되기 위해서는 잉여가 남아서는 안 된다. 맛있는 음식을 튀기기 위해 달궈지고 끓고 결국에는 다 타버린 기름처럼, 내 의지와 필요에 의해 남김없이 쓸모가 탕진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또 있다. 책이 놓여 있는 ‘거기’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은 정말 ‘거기’에 있는 것일까. 책은 놓여 있는 그 공간 위, 그 공간을 둘러싼 삶의 현실, 더 정확히는 현실의 쓸모를 ‘향해’ 놓여 있는 것일까. ‘거기’는 현실의 공간에 부합하는가. 책이 정말 놓여 있는 ‘거기’는 어디인가.
성 남쪽에 사는 자기라는 사람이 책상에 기대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 앞에 있던 제자 안성자유가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도 이렇게 마른 나무 같아질 수 있고, 마음도 죽은 재 같아질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앉아 계신 분은 이전에 이 책상에 앉아 계시던 그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가 말했다. “언아, 참 잘 보았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吾喪我). 그런데 네가 그 뜻을 알 수 있을까? 너는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들어보았겠지만,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겠지. 설령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가 물었다. “감히 물어도 되겠습니까?” 자기가 대답했다. “땅덩어리가 뿜어내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것이 불지 않으면 별일 없이 고요하지만, 한번 불면 수많은 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지. 너도 그 윙윙하는 소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산의 숲이 심하게 움직이면, 큰 아름드리나무의 구멍들, 더러는 코처럼, 더러는 입처럼, 더러는 절구처럼, 더러는 깊은 웅덩이처럼, 더러는 좁은 웅덩이처럼 제 각기 생긴 대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 화살이 씽씽 나는 소리, 나직이 꾸짖는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은 데서 나오는 듯한 소리, 새가 재잘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내지. 앞에서 가볍게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면, 뒤따라서 우우 하는 소리를 내고,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하지. 그러다가 바람이 멎으면 그 모든 구멍은 다시 고요해진다. 너도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 구부러지거나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겠지.”
-『장자(莊子)』 중에서
책상 위 ‘거기에’ ‘놓인’ 『장자(莊子)』와 같은 책을 집어 드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런 책의 경우 책이 지시하는 ‘거기’는 어디인가. 이런 문장들을 접하는 순간 책은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낸다. 그것은 현실을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절단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책(속)의 세계를 선택할 수 없다. 선택당하는 것은 책의 문장과 마주한 독자로서 나 자신이다. 나는 책의 세계로 오히려 끌려들어간다. 나는 그 세계 안에 붙잡혀 그곳 안의 시간을 살게 된다. ‘거기’는 어디인가. 적어도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다. 거기는 ‘다른 곳’이다. 왜냐하면 거기는 ‘쓸모’의 연관체계로 이루어진 삶의 범주 너머에 있는 어떤 곳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여기에서 유용성의 관념은 그 자체로 폐기된다. 아름드리나무의 구멍들, 제 각각의 웅덩이에서 들리는 저 갖가지 온갖 우주의 소리들은 쓸모도 쓸모없음도 아닌 세계다. 여기는 도구의 세계가 아니다. 유용성의 체계 속에 들어 있지 않음으로 이 세계는 소모되거나 소비될 수 없다. 탕진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물건’으로 다룰 수 없고 대할 수 없다. 책의 세계에서 우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성적인(neutal) 시간에 단박에 거주하게 된다.
이런 독서 체험에서 우리는 책이 내 손아귀에 있는 물건이 아니며 도구적 유용성을 지닌 소모품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나는 책으로 인하여 우주의 바람 앞에 마주하며 그 소리를 청종하게 된다. 책을 읽는 시간은 내가 책을 소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책이라는 타자의 세계에 끌려들어가는 수동적 시간을 선사한다. 가장 매혹적인 독서의 시간은 통념과는 달리 주체의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를 무너뜨리는 시간이다. 그런데 주체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수동적 시간이란 무슨 뜻인가.
이 장면에서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평소에는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리는 ‘없지 않았던 소리’다. ‘없지 않음’은 ‘없음’과 ‘있음’의 경계에 존재한다. 그것은 ‘없음’도 아니지만 온전한 ‘있음’도 아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만 들리고,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리지 않는가. 왜 그 소리만 귀에 ‘나타나는가’. 우리가 사는 현실이 도구 연관, 즉 현실 유용성에 지향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는 그 현실 유용성에 접합된 소리들이다. 거기에서 ‘의미’는 ‘쓸모’의 관점으로 나타나고 가치서열이 매겨진다. 긍정과 부정, 미추의 개념이 여기서 발생한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없지 않았으나, 쓸모의 도구 연관에 속하지 않음으로 인해 아직 나타나지 않는 세계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세계, 모르는 세계이다. 그러나 독서의 시간은 이러한 있음과 없음 사이의 세계, 있음의 잠재성을 현재화한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 미추의 판단 이전의 중성적 사물들과 나를 마주 세운다. 이 특이한 시간 체험은 그래서 낯설고 두렵다. 그리고 이 시간체험은 이중의 의미에서 주체성을 무화시킨다.
이 시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가 “땅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듣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나를 잃어버”려야(吾喪我)한다. 그것은 개인의 주관성, 즉 완강한 자아를 누그러뜨리고 책 속의 사물들, 책 속의 인간들, 책 속의 갖가지 타자들에 나를 개방하는 체험이다. 타자들의 소리는 내 완강한 주관성, 자기 확신을 누그러뜨려야 들리는 세계다. 그것은 없지 않았으나 그제야 들린다. 다른 시간으로 진입하는 데 장벽은 내 주관성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지식의 습득을 통해 ‘나’를 단단하게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무너뜨림으로써 세계를 청종하고 나의 유한성을 각성하면서 나를 해체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서 ‘나’는 현실의 공동공간을 살고 있는 수많은 ‘나’의 유사 버젼인 ‘너’도 아닌 중성적인 ‘그것’이 된다. 1인칭도 2인칭도 아닌, 사람인 것도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 다른 시간을 사는 지칭할 수 없는 비인칭적 존재가 된다. 나아가 이러한 시간 체험은 나를 둘러싼 현실, 그 현실을 구축하는 ‘쓸모’의 연관체계가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없지 않았으나 나타나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나타나지 않은 세계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고지한다. 진정한 독서의 시간은 ‘나’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현실의 가치 체계를 판단 중지시키는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시간이다. 『장자』에서는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땅 또는 어디에도 없는 땅(無何有之鄕)’이라고 했다.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론에 근거하자면 책을 읽는 시간은 몽상도, 진실의 묘사도, 건설도, 구원을 꿈꾸는 시간도 아니다. 책은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책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어떻게, 어디에? 그 어떤 세계라 할지라도, 세계의 그 어느 곳도 아닌 다만 ‘다른 곳’에! 책은 희망을 원한다. 그러나 책의 희망은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떠한 절망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장 매혹적인 책들은 우리를 결코 가나안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주의 방향은 사막이다. 그곳은 유용성을 지시하지 않는 세계라는 점에서 어쩌면 거주의 조건이 상실된 곳이며, 누구의 이해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의미와 가치의 유배지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책의 희망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희망 없는 시간에 희망을 거는 기이한 시간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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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