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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서럽고 낯설고 설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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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나이歲)이라는 단어와 결합된 ‘서른 살’은 ‘서른’이라는 소릿값의 물질적 복합성을 특히 잘 보존하는 듯하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서럽거나 설익거나 낯설거나


불가리아의 언어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말의 본질은 음성, 즉 소릿값이다. 소릿값에는 문화의 세계 속에서 말의 의미가 분화되어 자리 잡히기 전 ‘질감’이 존재한다. 소리에는 물질성의 차원이 있다는 말이며, 그 물질성에 문화가 분화시키지 않아도 이미 내재해 있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문득 ‘서른 살’이라는 단어를 발음해 보다가, 이 단어의 소릿값이야말로 이상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살’은 ‘서른’과 ‘살’이라는 두 단어를 합친 복합어지만, 이 두 단어의 결합은 좀 특이한 인상을 자아낸다. 


‘서른’ ‘서른’ ‘서른’……이라고 입으로 몇 번 계속 소리 내어 보자. 단지 30이라는 수가 아니라 ‘서러운’이라고도 들리고, 밥이 ‘설다’(설익다)고 할 때 ‘설은’으로도 들리지 않는가. 또 어떻게 들어보면 ‘낯설다’ 할 때 ‘(낯)설은’으로도 들린다. 말놀이 같지만, 저 언어철학적 통찰에 따르면 ‘서른’의 의미에는 부지불식간에 이 소릿값 모두가 반영되어 있다.


‘살’(나이歲)이라는 단어와 결합된 ‘서른 살’은 ‘서른’이라는 소릿값의 물질적 복합성을 특히 잘 보존하는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서른’과 결합되면서, ‘살’이라는 말조차도 ‘나이’만이 아니라 몸을 뜻하는 단어인 ‘살’(flesh)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서른 살’은 ‘서러운 몸’이거나 ‘설익은 몸’이거나 ‘낯선 몸’이 된다. 


서른살.jpg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가수 김광석이 죽은 지 20년 즈음 됐다. 갓 서른 살이 넘어 요절한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고 해봐야 쉰 살 남짓이다. 인생의 중년을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그는 ‘서른 살’을 “또 하루 멀어져” 가는 시간, “매일 이별하며” 사는 시간으로 체험했다. 이 시간 체험의 이미지는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드러난다. 서른 살은 내 몸과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열망이 몸 바깥으로 한숨처럼 허탈하게 빠져나가는 경험이며, 강렬하게 체험되었으나 곧 실체 없이 허공에 사라질 덧없는 연기에 관련된 이미지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서른 살이란 “떠나간 내 사랑”의 “기억”의 시간이었다. 이 상실된 사랑 자체가 서른 살이라는 ‘청춘’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에게 서른 살은 ‘서러운 몸’을 사는 시간이 된다. 


서른 살 즈음에 우리는 한 번쯤 인생의 나침반을 돌려놓는 사랑과 제 몸의 일부를 상실하는 듯한 이별을 겪는다. 하지만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저 감수성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이별이 일회적인 불행이 아니라 “매일” 지속되고 반복되는 삶의 시간으로 추체험된다는 사실이다. “조금씩 잊혀져간다”고 말하지만, 노래하는 동안 기억은 지속된다. 이것은 무감각이 아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노래의 역설은 노래 속에서 사랑의 시간이 반복되어 재생되고,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시간을 여전히 살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라는 시구가 저와 크게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요즘 세태에서는 ‘쿨하게’ 잊어버리는 것이 멋진 젊은이의 한 페르소나처럼 되어 있으나, 상처를 사랑의 시간으로 되돌리며 다시 사는 ‘서른 즈음에’의 기억의 작동 방식이야말로 그 시간이 지닌 진정한 능력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인생의 시간도 ‘서른 살’이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나는 엄마, 라고 말했다.

얘야, 너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세상은 많이 변했단다. 여자가 유모차를 밀던 손을 놓았다.

구른 건 바퀴뿐이었을까? …… 내 차가 들이받은 나무는 허리를 꺾었다. 나뭇잎 나뭇잎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를 나는 들은 것 같다. 아아아, 내가 처박힌 여기는 어딜까?

당신, 왜 그래? 헝클어진 당신이 묻는다. 나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나요? 멈출 수가 없었어요. 나는 천천히 당신을 올려다본다.

당신도 어딘가를 올려다본다. 답을 구하는 태도는 누구나 유아적이군요. 그런데, 구른 건 정말 바퀴뿐이었을까요?

나는 엄마, 생각을 했다. 나는 방향을 틀기위해 잠시 후진을 해야 한다. 천천히 핸들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 김행숙『사춘기』


이 시에서 시인은 서른 살을 ‘나무에 들이 박은 자가용’으로 체험한다. 이 시에는 현재와 과거 회상이 동시에 섞여 있다. 현재 상황은 “내 차가 들이 받은 나무는 허리를 꺾”인 상황이다. 이때 “나는 엄마, 생각을 했다”. 이유는 절박한 위험 상황에서 어릴 때 화자의 절대적 보호자였던 유모차를 밀어주던 엄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른 살은 엄마가 밀어주던 유모차가 내가 모는 자가용으로 바뀌는 시간이다.


‘삼십 세’는 “핸들에 손을 얹고” 도로의 표지판을 살피며 자기 스스로 도로를 운전해야만 하는 불안한 시간이다. 혼자 달리는 도로는 ‘낯설고’ 운전 능력도 아직 ‘설익’다. 손수 운전을 하다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사고를 낸 그 곁에 엄마를 대신한 ‘당신’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내가 쥔 인생의 핸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서른 살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선택한 인생에 어렴풋한 방향이 생긴다. 그 길은 낯설다. 길의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그 길이 어디에 닿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가 없다. 때로 내가 도로를 선택하여 운전한다기보다는, 도로에 맞추어 운전하는 ‘기사’가 되기 시작하는 게 이 시간이다. 


10대나 20대와는 달리, 삶의 전체적 방향이나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율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인생의 누추함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 인생 시간대도 이 즈음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고의 자동성이 중단되고, 인생의 운전 방향에 대한 성찰적 자문을 하게 되는 계기는 ‘사고’가 나는 때다. 이때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나요? 멈출 수가 없었어요” 라는 식의 당황스러운 질문들이 나를 엄습하는 것이다. 


시인 최승자는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이 시대의 사랑』)고 말했다. ‘서른 살’이라는 시간이 지닌 모호하고 복합적인 성격에 대한 직관을 포함한 시구다. 서른 살이라는 시간은 시작이고 이별이며, 설렘이고 불안이다. 자발적 선택과 비자발적 선택이 섞여 있고,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여름이자 가을을 향한 도로의 시작이다. 


아이의 천진한 웃음과 어른의 사회적 마스크가 공존하는 무대다. 최근 출간된 한 소설의 주인공은 “나는 어째서 언제나 어중간하고 타협적인 것일까?”라고 질문하다가, “멋지게 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것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천국보다 낯선』中)라고 자못 다시 비장하게 결심한다. 성찰적 자문과 자기정당화를 하는 자답이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그 나이가 서른 즈음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지만 최승자는 이 시간에 대해서도 얼굴에 “철판 깔”고 변명하지는 말자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행복행복행복한 항복”을 하게 되는 서른 살의 ‘항복’ 역시 결국 내 선택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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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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