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볼리비아에서 어디까지 털려봤니?
도둑이 무엇을 상상했든 내 가방엔 그 이상이 들어 있었다
여행을 하게 되면 삶의 무게를 느낀다. 자신의 두 어깨에 얹을 수 있는 만큼이 얼마인지 실감하게 된다. 여행가방에는 생각보다 얼마 들어가지 않고, 무겁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한 가방을 한 번 더 정리할 비자발적인 기회가 오는데, 그건 바로 도난이다. 다 잃어버리고 새로 채워 넣게 되면, 꼭 필요한 게 뭔지 알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나 흥미로워야 한다. 그래서 첫회에는 여행지에서 경험한 것 중 가장 흥분되다 못해 아직도 이가 박박 갈리는 도난 사건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볼리비아, 그 곳은 배낭여행자의 천국이라 불리는 곳. 1불 생활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저렴한 물가와 친절한 현지인, 그리고 아름다운 소금사막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도둑들의 소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지 물가가 매우 저렴한 만큼 여행자의 배낭은 도둑들에게 굉장한 유혹이다.
전부 다 하얘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릿한 소금사막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뒤엔 여행자의 고충이 녹아있다.
소금을 캐내서 만든 소금벽돌
전부 다 하얘서 이런 착시사진을 찍을 수 있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에 도착한 첫날 저녁, 배가 고팠다. 숙소에 짐을 놔두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뭘 먹을까 고민하며 거리를 걸었다. 카메라와 돈만 들고 처음 보는 이국의 거리에 빠져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물론, 괜찮은 사진이 나올 것 같으면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난은 순식간이었다. 도둑은 주머니에 삐죽 나와 있던 스트랩을 잡아 한순간에 카메라를 빼내곤 유유히 사라졌다. 친절한 시장 상인들이 현장을 목격하곤 ‘너 카메라 털렸어.’라고 얘기해줬지만, 스페인어를 못 알아듣는 내가 사태를 파악할 때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주머니? 제 주머니가 왜요? 헉, 내 카메라.’
사태를 깨달았을 땐, 이미 상황종료. 볼리비아에 오기 전 들렸던 페루에서 찍었던 사진과 함께 카메라는 영영 사라졌다. 그 날 저녁, 라파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닫고 이 도시를 바로 떠났으면 좋았을 텐데, 경찰서에 들려 폴리스 리포트를 작성하려고 했다. 여행자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고, 이 허탈한 마음을 돈으로나마 보상받고 싶었다. 그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 다음날 경찰서에 가기 전 가방까지 털린 것이다. 잠시 숙소 로비에 짐을 내려놓고 잠깐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숙소까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준 친절한 볼리비아 사람이 가방을 가지고 날랐다. 바로 눈앞에서 뛰어갔지만 잡지 못했다. 심지어 인상착의도 기억하지 못했고.
볼리비아의 숙소에는 대개 철장이나 안전 문이 설치되어 있지만, 길을 안내하는 척 같이 들어왔기에 여관 주인도 특별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의 작은 친절을 언제나 경계할 것. 늘 귀에 박히게 들었는데도 당하고 말았다. 옛말에 틀린 말은 없지만, 그 말을 지키긴 참 어렵다.
털린 가방 안엔 앞으로 남미를 여행할 경비 1,200 달러가량과 노트북, 그리고 기타 귀중품들이 들어 있었다. 도둑이 무엇을 상상하던 그 가방 안엔 그 이상이 들어있었을 거라고 다른 여행자들에게 농담을 던졌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웃음만 실실 나오는 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심지어 여권도 그 안에 들어있었기에 여권재발급을 받기 전까지 볼리비아를 떠날 수도 없는 신세.
너무 많은 것이 들어있어서 그랬을까. 가방은 며칠 후 우체국에서 발견되었다. 가방 안에 한국여권이 들어있어 바로 주한대사관으로 연락이 되었고, 여권 때문에 대사관에 도움을 청했던 터라 생각보다 금방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돈과 귀중품과 전자기기들이 모두 사라진 데다 가방도 찢어져, 허술한 비닐봉지 안에 여권과 돈이 안 되는 물건들만 남아있긴 했지만. 여행자가 떠나야, 수사가 빨리 종결되기에 여권을 다시 돌려줬던 것 같다.
남미여행에선 누구나 한번은 털리게 되어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사실, 나만은 안 털릴 거라는 자신감도 조금 있었다. 처음 카메라를 털렸을 때도 허탈하긴 했지만 드디어 나에게도 그 일이 닥쳤구나 싶었다. 그런데 인생은 더 큰 깨달음을 줬다. 한 번 털렸다고 해서, 두 번 털리지 마란 법은 없다는 가르침.
되찾은 여권을 들고 이를 박박 갈며, 라파즈를 떠나는 버스터미널에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아 훈훈한 분위기였다. 나는 가방을 털렸네, 나는 카메라를 털렸네. 고백이 이어지고 우는 여행자도 있었다. 남미 여행의 마지막으로 볼리비아에 들렀다 카메라를 도난당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여행이 카메라와 함께 다 날아갔다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 사람을 보며, 그나마 나에게는 여행지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볼리비아보다 먼저 들렀던 페루에서 찍었던 사진은 다 날아갔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진을 남길 수 있으니까. 아, 잃어버린 카메라는 거금을 들여 다시 샀다. 한국이었으면 사지 않았을 한물간 모델이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도둑들을 봤다. 처음엔 그들이 도둑인 줄도 몰랐다. 한 현지인이 까만 가방을 들고 자연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와서 그 가방에 두꺼운 비닐을 씌웠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고, 세 번째 사람이 와서 그 비닐 쇼핑백을 옮겨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다. 누가 가방을 샀는데, 가방 가게 주인이 뒤늦게 비닐을 가지고 포장을 해줬나 싶었다. 그럼 세 번째 사람은 누구지? 싶었는데, 네 번째 사람이 나타나 쇼핑백을 전달받고는 버스 터미널 밖에 세워져있던 자동차에 탔다. 자동차는 유유히 출발해 사라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곰곰이 생각하다, 다른 여행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크지도 않은 작은 터미널이어서 금방 수런거림이 번졌다. ‘내 가방!’ 그렇다, 엄청나게 치밀한 범죄현장이었다. 아, 이렇게 털어가는 구나. 이러니, 뭘 도둑맞으면 못 찾지.
그래도 이렇게 다 털렸어도,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여행자 보험에 들어뒀으니 한국에 가서 어느 정도는 보상 받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여권, 주민등록증, 보험증 등등 복사본을 챙겨뒀었는데 몇 번이고 보험 약관을 읽어봤다.
* 휴대품 도난, 파손으로 인한 손해보상
해외여행 중 카메라, 노트북, 여행가방 등 값비싼 물건을 도난당하거나, 파손 되는 경우 물품당 20만원 한도 내에서 실제 손해액을 보상해 드립니다.
이 문장이 나를 들뜨게 했다. 노트북 20만 원, 카메라 20만 원, 여행가방 8만 원, 선글라스 10만원 기타 등등. 혼자 계산을 해봤다. 그래봐야 털린 금액에 비하면 세발의 피지만.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 보험사에 보상을 청구했더니 20만원만 나왔다. 혹시 착오가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보험사에 전화를 했더니 물품 당 20만원 한도 내에서, 총 20만원까지만 보장하는 보험이라고 했다. 보험 약관은 잘 읽어보고, 행간도 잘 읽어보고, 내가 가입한 게 어떤 상품인지도 잘 알아봐야 한다.
그래도 이 사건 이후로 하나 나아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여행에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한 일이 없었다는 거다. 물론, 여행 짐을 싸는 게 매우 간소해졌다는 것도 한몫 했지만.
참고로, 도난 후 폴리스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도 잘 고려해 봐야 한다. 나는 처음 간 경찰서에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경찰관을 만나지 못했다. 알고 있는 스페인어와 사용할 수 있는 보디랭귀지를 모두 동원해 한참을 실랑이하다 외국인을 위한 경찰서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 다른 경찰서로 이동해 작성했다. 실제 서류 작성은 말이 통하자 10분 만에 끝났지만, 그곳까지 가기 위해 반나절을 허비해야 했다.
게다가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비싸다. 그 곳까지 가는 교통비, 체재비, 식비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만약, 그 시간이 받을 수 있는 보상금보다 더 비싸다면 잃어버린 물건은 그냥 가슴에 묻고 다음 여행지로 출발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사실, 가장 좋은 건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즐겁게 여행을 계속 하는 거다. 분노하거나, 슬퍼하기에 시간이 너무 아까우니까. 물론,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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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쩌다보니 이곳저곳 여행 다닌 경험이 쌓여가네요. 여행자라기엔 아직도 어설프지만, 그래도 오래 다니다 보니 여행에 대한 생각이 좀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 캐나다,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대만, 중국 등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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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가 준 선물』은 저자가 140일간 중남미를 종단한 이야기를 담은 그 두 번째 책으로 페루, 볼리비아의 여정을 생동감 있게 풀어내고 있다. 시커멓게 탄 피부와 구질구질한 옷차림. 고된 일정에 여행자의 체면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어느덧 남미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 광활한 나스카의 지상화를 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