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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으로 빛나는 온네토 호수

앞으로의 삶에 대한 뭉근한 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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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들은 내가 먹어 치운 호수의 동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것들은 지금 내 핏줄과 살, 근육의 일부가 되어 온몸 곳곳을 떠돌고 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미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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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겨울 문턱에 와서야 고백하는 말

 

이 고백은 새삼스럽다. 마냥 여유롭고 한량처럼 보이는 나의 홋카이도 생활은 사실 그렇지 않은 점이 많다. 적을 두고 있는 곳으로부터 떨어진다는 건, 많은 게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정되지 않은 매일 속에는 지속적인 불안이 불쾌하게 맴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작은 것에도 끙끙대며 유난을 피우는 편이긴 하다.) 그것도 익숙해지다 보면 무엇이 기쁘고 무엇이 슬픈지 경계가 흐물흐물해진다. 까닭 없이 걷잡을 수 없어지기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의 나를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떠나고 싶다. 그게 미욱한 나를 타이르는 방법이다. 이번엔 멀리, 다음엔 조금 더 멀리 갈 궁리를 한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싶다. 아니,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버리고 싶다. 만성적인 배고픔이다. 보고 듣고 만져서 허기를 채운다. 눅눅한 곰팡내가 날 것 같은 과거의 ‘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천천히 변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떠남(여행)의 근본적인 효용이다.

 

물음 꾸러미들

 

닥치는 대로 물음을 쓸어 담기로 했다. 오래도록 생각할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물음엔 답을 해야 하고, 이곳에서의 겨울엔 생각할 시간이 많을 것이다. 눈이 쌓이고 도로가 얼고, 그것들이 역순으로 녹아 마른 바닥과 새싹이 멀끔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반년 정도 걸린다. 웅크리고만 지내기엔 꽤 많은 시간이다. 물음표와 문장들을 쌓아 두기 시작하자, 동면에 드는 산 짐승이 양껏 먹어두는 것처럼 든든했다.

 

단출한 짐 가방엔 8년 전에 태어난, 소설 속 사람들이 꺼내 놓은 말들을 골라 담았다.

 

 희로애락이 희박해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건 나쁜 걸까?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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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 산과 전망대

짐을 꾸려 떠난 곳은 아주 멀리 있는 호수였다. 최고 제한 속도를 슬쩍 넘긴 채 네 시간을 달렸다. ‘온네토’의 물결은 단지 속의 꿀처럼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유영하고 있었다. 만지면 끈적한 점액이 묻어나올 듯 깊고 진했다. 기후나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계속 바뀐다고 해서 ‘오색습지’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유황 성분이 섞여있어 물고기는 살지 않았다. 물은 에메랄드 빛을 뽐내다가 어느 순간 검푸른 색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수면 위로 땅 위의 것들이 반사됐다. 봉우리에서 흘러나온 화산의 흰 연기는 두꺼운 구름장 사이로 사라졌다. 사방을 둘러싼 산이 분명 어떤 기운들을 호수에 가두고 있었다. 어지러운 듯 하면서 머리가 멍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1초 동안 50만 개가 사멸하는 동시에 생성된다는 세포들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였다. 세포들은 내가 먹어 치운 호수의 동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것들은 지금 내 핏줄과 살, 근육의 일부가 되어 온몸 곳곳을 떠돌고 있다.

 

호숫가에서 물음 꾸러미들을 꺼내보지는 않았다. ‘희로애락이 희박’하거나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라 해도, 그 말 속에선 앞으로의 삶에 대한 미열이 느껴졌다. 오래도록 꺼지지 않을 뭉근한 열기여서 다행스러웠다. 나는 온네토의 빛깔이 정말 다섯 가지인지 여러 번 (대충) 세어 보았다. 그리고 근처의 전망대 두 군데에 올라 두 개의 호수와 두 개의 산 봉우리를 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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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경계선

 

홋카이도 중부가 한적한 전원의 풍경이라면, 동부는 야생과 원시림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밤의 도로에서 달과 별 말고 빛나는 걸 보았다면, 그건 산짐승의 굶주린 눈동자다. 늦은 오후에는 사슴이나 여우도 나타났다. 비교적 인간과 친숙한 편인 여우는 이차선 도로 한 가운데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나는 던져줄 것이 없었다. 녀석은 도로의 경계를 넘어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세상의 모든 경계선은 공평과 불공평, 느긋함과 조바심, 바라보기와 받아들임 같은 것들의 언저리를 맴돈다.’ 여우가 미련 없이 사라진 텅 빈 도로를 뒤돌아 보며 이런 식의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떴다가 지는 해에 대해서, 언젠가는 헤어짐으로 뒤바뀔 끝없는 만남들에 대해서, 밤낮없이 일렁이는 세포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것들이 건네는 말을 쓰는 겨울을 가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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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다녀왔다. 그 후에도 나를 뒤흔드는 일이 (모두에게처럼) 몇 가지 일어났다. 하지만 그걸 들여다보는 나는 어쩐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 타인의 것이 아닌, 온전한 나만의 욕망이 온기를 내고 있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오색 호수가 건넨 한 장면이, 세계의 먼지 같은 존재인 나에게도 그런 게 있다고 말해주었다. 가슴이 우둔우둔해졌다. 잘 보이지 않는 앞날이라도 나는 그곳을 향해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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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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