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이야기
다른’ 세계라는 점은 SF도 유사하지만, 판타지는 과학적인 유추와 추론을 거의 신경 쓰지 않고도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글ㆍ사진 김봉석
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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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역시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시리즈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1954년에 처음 출간되어 판타지의 전범이자 고전으로 후대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상을 구원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해리 포터가 성장하여 악을 물리치는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는 세기말을 판타지 열풍으로 휘감았다. 『반지의 제왕』이 구축한 판타지의 세계와는 다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과 마법사들이 사는 또 하나의 세계를 오가며 벌어지는 『해리 포터』 역시 전형적인 판타지다.


판타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아닌, 다른 시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어반 판타지’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나 역사적 공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등 초자연적인 존재와 마법과 초능력이 상존하는 ‘다른’ 세계다. 일찍이 J.R.R 톨킨은 ‘판타지는 현실의 극한적 왜곡’이라 말했다. 톨킨은 세계 대전을 겪으며 선악과 죄악에 대해 고민한 것을 중간계의 선과 악의 대립에 투영했고, 당대의 문제적 인간을 북구와 켈트의 신화 속 존재에 뒤섞어 현실 이상으로 실감나는, 그럴듯한 ‘환상’을 창조했다. 판타지는 소극적인 도피인 동시에 현실의 적극적인 투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른’ 세계라는 점은 SF도 유사하지만, 판타지는 과학적인 유추와 추론을 거의 신경 쓰지 않고도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외계의 별과 존재를 상상하여 만들어내는 광활한 스페이스 오페라는 판타지에 조금 더 근접해 있다. 일부는 SF가 Science & Fantasy가 되어야 한다고도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SF는 SF대로, 판타지는 판타지대로의 영역과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에드가 앨런 포우 등의 작가에서 비롯된 근대 환상소설의 범주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도 ‘판타지’의 개념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근대의 환상소설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SF, 판타지, 호러 등을 한데 모아 말하는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는 개념도 있다.


『반지의 제왕』처럼 과거의 신화와 전설에서 많은 것을 가져오며 독자적인 세계와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판타지를 서사적 판타지(Epic fantasy)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는 고대의 신화와 전설을 판타지의 원류라고 부를 수도 있다. 신화는 우리가 사는 세계 이전에 있었던, 신들이 사는 가상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과 사랑을 하거나 질투하기도 하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초인적인 영웅이 된다. 현대의 슈퍼히어로 코믹스가 인간의 세계에 겹쳐진 신들의 세계인 것 같기도 하다. 인간과 엘프, 드워프, 트롤, 호빗 등이 사는 중간계의 거대한 역사를 그려내는 『반지의 제왕』 같은 류의 작품을 하이 판타지(high fantasy)라고도 하는데, 로버트 하워드의 『야만인 코난』 같은 극단적인 영웅 판타지를 대비시켜 로우 판타지(Low Fantasy)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검과 마법(sword and sorcery)도 로우 판타지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야기의 형식 자체로서 하이, 로우 판타지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뛰어난 작품이라면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으니까.


다크 판타지는 악마, 괴물, 흡혈귀 등의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키거나 마녀와 악마 숭배 등의 오컬티즘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판타지를 말한다. H.P. 러브크래프트의 공포 소설들은 다크 판타지로 분류되기도 한다. 어반 판타지는 현대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를 말한다. 하지만 다크 판타지, 어반 판타지, 검과 마법, 영웅 판타지 등 판타지의 다양한 분류와 개념은 하나의 작품에서 혼재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모든 장르는 섞이고 변주되면서, 결국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특정한 형식으로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 판타지는 영웅 서사나 ‘사랑과 이별’을 중심에 두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능하기에 여성 독자들도 많이 있다. 기사, 마법사, 도둑 등 각자 능력이 확실한 이들이 모여 파티를 이루어 모험을 하는 판타지는 개인의 성장과 함께 집단의 조화에 대해서도 잘 보여줄 수 있어 ‘성장 소설’로서의 역할도 잘 할 수 있다.


흔히 3대 판타지를 말할 때 『반지의 제왕』과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를 꼽지만 그런 말들에 혹할 필요는 없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들 중에서도 걸작은 숱하게 많다. 최근 HBO에서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 만들어져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조지 R.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도 선대에 견줄 수 있는 걸작이다. 역사광 특히 장미전쟁의 마니아라는 마틴은 7왕국의 권력투쟁을 너무나도 리얼하게 그려낸다. 왕좌에 오르기 위해 배신하고, 음모를 꾸미고, 적과 손을 잡고, 빛의 신과 드래곤까지 등장하며 실제 역사 이상으로 리얼한 가상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영화로는 실패했지만 크리스토퍼 파올리니의 『에라곤』, 필립 풀먼의 황금나침반, 닐 게이먼의 『스타더스트』 등도 훌륭한 작품이다. 피터 잭슨이 영화화하겠다고 했던 나오미 노빅의 『테메레르』 그리고 앤 맥카프리의 『퍼언 연대기』는 판타지의 중요한 캐릭터인 ‘드래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판타지다.


동양의 판타지는 서양의 ‘검과 마법’ 판타지를 가져온 미즈노 료의 『로도스도 전기』와 동양의 신화를 기반으로 한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기』, 애니메이션으로 더 유명한 하지메 칸자카의 『슬레이어즈』 등의 걸작이 있다. 쿠리모토 카오루의 『구인 사가』는 150권 넘게 이어지는 그야말로 초 대하 판타지인데 어쩐 일로 한국에 출간되기 시작했고, 역시나 6권까지만 내고 절판되었다. 주변에서 말리지 않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게임에 빠져든다는 미야베 미유키도 『브레이브 스토리』라는 판타지 소설을 썼다. 게임 『이코-안개의 성』의 소설판도 썼고.


한국에서는 90년대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게임 <울티마> <드래곤 퀘스트>, 일본 판타지 『슬레이어즈』『로도스도 전기』 등의 영향을 받아 『드래곤 라자』의 이영도, 『세월의 돌』의 전민희, 『귀환병 이야기』의 이수영, 『비상하는 매』의 홍정훈 등 뛰어난 작가들이 등장했다. 또한 중국의 판타지 소설이라고 할 무협지의 영향을 받은 전동조의 『묵향』 등 퓨전 판타지도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판타지의 장점이라면 역시나 무한대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합리적인 사고나 논리에서 벗어나도, 자체의 인과관계만 어느 정도 주어진다면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도 창조 가능하다는 점.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하여 실재하지 않는 그러나 현실보다 더욱 리얼한 가상현실이 가능한 21세기의 판타지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어떤 상상력이건 이제는 영상으로 포착하고 묘사하는 것도 가능하기에 미디어믹스의 선두주자로서도 한층 각광받고 있다. 최근 인기인 『메이즈 러너』 같은 영 어덜트 작품들도 SF와 판타지의 경계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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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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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5.02.23

판타지는 과학적인 유추와 추론을 거의 신경 쓰지 않고도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어서 작가들이 무한대로 상상력을 펼칠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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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

2014.10.27

반지의 제왕을 통해 환타지 영화를 처음 접했기에 지금도 환타지 영화는 좋아하는 편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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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