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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이방인

프라하의 여행자처럼, 생활인처럼, 학생처럼, 예술가처럼! 인형극, 벼룩시장, 잡화점, 도서관, 헌책방, 문방구…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머물며 프라하 구석구석을 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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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눈앞에 둔 그때, 문득 서른이 넘은 자신이 ‘어른’이 되어 날 맞이해줄 일은 없으리란 깨달음이 찾아왔다.

프라하

 

계절이 바뀌기 직전, 이른 아침에 일어나 어제와 다른 공기 냄새가 느껴지면 내 마음은 낯선 곳으로 멀리 떠나곤 했다. 다행히 프라하에는 마음만 먼저 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결혼식을 단출하게 치르고, 몇 년간 애써 모은 얼마 안 되는 전 재산만 믿고 ‘진짜로’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서른을 눈앞에 둔 그때, 문득 서른이 넘은 자신이 ‘어른’이 되어 날 맞이해줄 일은 없으리란 깨달음이 찾아왔다. 불안한 마음과 달리 몸은 저 혼자 느긋했다. 모든 일에 시큰둥한 채 출퇴근을 반복하고, 기계적으로 컴퓨터만 두드리는 달팽이 한 마리가 바로 나였다. 반면 인형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남편은 꽤 오랫동안 유학을 꿈꿔왔다. 유학 계획은 점차 구체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둘이 함께 떠나기로 했다. 여기서 나의 역할은 ‘유학 가는 남편을 따라가는 여자’였다. 공부를 하겠다거나, 내조를 확실히 하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저 ‘삼십대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시작해보자’라는 흐릿한 이정표만 저 너머에서 흔들거렸을 뿐이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이국에서의 생활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것이다. 체코어 수업은 가을부터 시작이었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프라하의 루지네 공항은 텅 빈 듯 조용했다. 소독약 냄새가 섞인 낯선 공기가 밀려왔다. 체코라는 땅이 예전부터 간직해 왔을 오래된 냄새. 남편은 어마어마한 우리 짐은 뒤로한 채 유모차를 힘겹게 옮기던 아기 엄마를 살갑게 도와주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그런 친절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그를 말리는 내 표정을 읽은 체코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 남편은 지금 굉장히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순식간에 인정머리가 없는 여자가 돼버린 나는 멋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싶었다.

 

“Jake je jizdne?”(야케 예 이즈드네?)
“얼, 마, 입니까?”

 

숙소 주소를 건네주며 연습한 체코어를 제대로 읊어보기도 전에 택시 기사는 이미 우리 짐을 차에 싣고 있었다. 공항을 떠나 도심으로 향하는 택시의 창밖은 짙고 습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남편은 한참 동안 컴컴한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저 너머에 동화 속에 나오는 예쁜 중세 도시가 있을 걸 생각하니 들뜬다고 했다. 그러나 거대한 트렁크와 배낭을 줄줄이 매달고 장시간 비행하느라 지친 나는 어쩐지 시큰둥한 상태였다. 체코에 오기 위해 준비했던 기나긴 시간들이 어둠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결혼식을 하고, 체코어학교를 알아보고 등록하고, 속을 바짝 태우다못해 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던 비자 신청까지.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여기, 지금, 이 택시에 앉아있는 것이 신기했다. 갑자기 기사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알 수 없는 충동으로 그에게 짤막한 인사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냉랭한 반응이란.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새로운 땅, 대답 없는 낯선 사람 곁에서 나는 왜인지 담담한 동시에 막막해졌다. 그리고 이유 없는 시간이란, 0킬로그램짜리 시간이란 없을 거라고,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가능할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프라하  프라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설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될 프라하에서의 생활, 체코어는 까막눈 수준인 현실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상념 속을 끝없이 헤매다가 피로와 노곤함에 기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아 창문을 열자, 야트막한 언덕 사이로 띄엄띄엄 꽂아놓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이 보였다.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중세 도시, 프라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앞으로 우리가 반 년 이상 머물게 될 숙소는 프라하 4지구 외곽 모드좌니Mod?any에 있는 낡은 호텔이었다. 호텔 이름은 ‘D?m’. 체코어로 ‘집’을 뜻한다. 옛 사회주의 시절의 정취가 남아 있는 동네는 전반적으로 쓸쓸하고 무뚝뚝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덩치 크고 푸석한 외관의 아파트 단지는 어딘지 1980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숙소도 아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낡은 복도, 지나치게 높은 천장, 아무도 사용할 것 같지 않은 ?그러나 나중에 내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낡고 더러운 오븐과 핫플레이트가 있는 공동 부엌, 뭐 하나 정이 가지 않았다.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는 절세미인 아가씨도 이방인에겐 좀처럼 웃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오래된 극장처럼 고풍스러운 외관, 빛바랜 자주색 카펫이 깔린 바닥, 소박한 가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투숙객들이 별로 없어 조용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방과 화장실 하나, 욕실 하나로 이루어진 공간이 주어졌다. 집이라기보다는 중학생 시절의 과학실 같은 곳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자연스레 그곳을 ‘우리 집’이라 부르게 됐다. 살면서 우리의 일상, 기운, 냄새 등이 더해지면서 차차 마음을 붙일 수 있었다. 아기자기하거나 이국적인 멋 따위와는 거리가 먼 집이었지만, 군더더기 없이 실용적인 가구와 공간이 특유의 ‘동유럽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흰색으로 말끔하게 칠해놓은 벽에 희끗희끗 비쳤던 하늘색 페인트 자국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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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소풍 전선명 저 | 북노마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인 전선명의 프라하 ‘생활 여행’ 에세이. 애니메이션 감독인 남편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체코 프라하로 떠나, 1년 넘게 머물며 프라하 곳곳을 누빈 기록들을 담았다.이방인에서 시작해 여행자처럼, 생활인처럼, 예술가처럼 프라하를 겪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또한 흥미롭다. 타지에서의 일상을 극복해나가는 성취감과 외로움 등 미묘한 감정 변화를 독자에게 선사함으로써 여행서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간접 경험’과 ‘대리 만족’의 기능을 톡톡히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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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전선명

프라하,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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