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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함박조개를 넣은 카레와 무로란 8경

잃어버린 시간의 부표가 떠오르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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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바다를 찾아가는 여행은 권태를 이겨내고 변태(變態)를 가능하게 한다.

홋카이도

 

권태와 불면의 시공간

 

기억하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있다. 섬유들 사이에 비스듬히 누워 하루를 마감하는 밤이었다. 천장은 곧고 새하얬으며 커튼은 날카롭게 재단되어 있었다. 소리 내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 채 눈으로만 글자를 썼다. 두렵다고 썼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돌아보는 게 아닌, 어떻게 잠들 것인지가 의문이었다. 꽤 어려운 문제가 침대 머리맡에 놓였다. 불면이었다.

 

 다음날 새벽, 바람이 부는데 할 수 있는 게 몇 없었다. 창문을 열고 멍하니 허공의 먼지를 세어 봤다. 권태였다.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었다. 외벽을 녹색으로 물 들이고 있는 덩굴 앞에 섰다. 건물과 건물 사이 한 걸음 정도의 공간이었다. 물건을 쌓아두는 것 말고도 쓸모 있는 틈새였다. 거기에선 바람이 지나갔고 하늘이 보였으며, 하여 걸음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는 게 떠올랐다. 무미건조한 단어를 나열하거나, 바다를 보러 가는 여행 같은 거였다. 후자를 택했다. 나약해서 가여운 여느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무작정 떠났다. 그래서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 수 있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은 여행자는 과감해야 한다. 십 년 전쯤이었나, 바다 보러 가기로 하고 동서울터미널에서 만난 친구와 그랬던 게 떠오른다. 남해는 너무 멀었고, 서해는 왠지 가깝게 느껴졌다. ‘바다라면 동해지!’라며 강원도 지도를 훑었다. 고성부터 삼척까지 길게 늘어진 바닷가 지명 중에 잠시 고민을 하다, ‘동해니까 동해시(市)지!’ 하고선 네 시간 뒤에 그곳에 닿았다. 희귀석이 빛나고 있던 천곡동굴은 시가지 중심부의 오래된 금은방이었다. 내로라하는 사진가들이 찍었던 일출의 장관은 3만 원짜리 민박집에서 볼 수 있었다. 편의점 주인이 부업 삼아 한 그릇 5천 원에 팔던 물회도 먹었다. 이후 그 어떤 맛집의 물회에도 실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로 동해시를 간 적은 없다. 추암 해변의 촛대 바위는 여전히 동해물이 마르고 닳도록 투박한 심지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어떤 정보도 없이 닿았던 여행지는 다시 찾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변한 모습을 보고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다.


토마코마이행 역주행과 함박조개 카레

 

홋카이도에 고속도로라고 해 봤자 동서남북 네 갈래 중 하나였고, 나는 남쪽을 택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정말 남쪽에 닿았더니 ‘토마코마이’라는 항구 도시가 나왔다. 거기서부턴 동쪽이냐 서쪽이냐의 문제였지만, 일단 배가 고파져 무엇을 먹을까가 먼저였다. 지난밤 천장에 두려움이라고 썼던 건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얼마간 나를 괴롭혔던 권태는 어이없는 순간에 해결됐다.

 

 렌터카 직원에게 일본의 도로교통법 속성 교육을 받고도, 처음부터 오른쪽 차선으로 나가 버렸다. 사방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전방에서 돌진하는 차를 보고 차선을 반대로 섰다는 걸 깨달았다. 깜빡이를 켜려고 하면 와이퍼가 움직였고, 우회전 신호를 받기 전에 비보호로 핸들을 꺾는 용기를 내야 했다. (일본 대부분의 우회전 신호는 매우 짧고, 직진 차량이 없으면 비보호 우회전을 하는 게 원칙이다.) 방안에 처박혀 먼지를 쫓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단 바깥으로 나와 역주행 한 번이면 정신차릴 수 있는 거였다. 똑바로 살고 싶은 의지가 샘솟았다.

 

홋카이도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연안에서 주로 나는 ‘홋키’ 조개가 토마코마이의 특산물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함박조개’라고 하는데, 함박꽃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함박꽃이 무엇인가 찾아보니 부케로 많이 쓰는 작약이었다. 작약의 꽃말이 무엇인가 하니 ‘부끄러움, 수줍음’이고, 함박조개의 효능이 무엇인가 하니 ‘성인병과 노화 예방’이라고 한다. 이런 걸 검색한 건 유명한 함박조개 카레 집의 줄이 길었기 때문이었다. 신선한 함박조개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어 그 육수로 카레를 만들어 밥 위에 올려내는 식당이었다. 해물 맛이 깊게 밴 미소 된장국과 두껍게 부친 달곰한 계란말이를 곁들여 먹었다. 동해시의 편의점 물회와 동급으로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주방 앞에는 그날 들어온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로 만든 반찬을 진열해 놓아 입맛을 자극했다. 수산시장 구석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식당에 홋카이도의 바다가 들어와 있었다.


무로란 8경

 

한가득 배를 채우고 서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육지의 끝을 따라가는 해안도로를 달렸다. 조그만 마을의 바닷가 산책로에 잠시 섰다. 파도는 솟구쳤다가 수천수만 물방울로 부서졌다. 그러다 방파제로 흩어지기도, 조약돌을 적시기도, 다시 바다로 돌아가기도 했다. 내가 나태함에 찌들어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는 동안에도 파도는 부서지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닿아야 하는지, 어느 순간 가장 힘을 주어야 하는지 아는 움직임이었다.

 

‘무로란(室蘭)’에 들어갔다. 지형이 꽤 구불구불하고 험난한 편이었다. 무로란 8경(八景) 안내판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산동네 가파른 언덕을 넘어 ‘지큐미사키(지구곶)’에 도착했다.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족의 ‘포로 치켓프(아버지의 절벽)’라는 말이 한자로 변형된 이름이었다. 태평양 쓰가루 해협이 지나는 이곳에 얽힌 괴담도 많았다. 절벽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꽤 많고,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종종 안개와 구름이 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다행히 내가 찾은 날은 맑고 청명했다. 하얀 등대와 사방에서 빛나는 바다가 있었다. 구름은 수조 안에 막 풀어 놓은 물감처럼 여유 있는 곡선으로 늘어지고 있었다. 곶의 절벽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는 빠져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게 반짝이는 바다가 주는 충고였다. 바다와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정수리를 내리쳤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뜨거워지는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

 

8경의 하나인 ‘은병풍(銀?風)’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이었다. 산 너머로 파도 소리는 들리는데 사방은 온통 숲이었다. 산 꼭대기에선 무성한 잡초 사이로 바다와 닿은 절벽이 보였다. 내려가는 길이 보니 이름도 없을 것 같은 동네 뒷산이었다. 마을 끝에는 은병풍이 있었고, 초입엔 ‘에모토미사키(에모토곶)’가 있었다. 8경 중 두 곳이 이 마을의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에모토미사키에선 도넛 모양의 구름으로 둘러싸인 요테이 산과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백조대교를 전망할 수 있었다. 살아보고 싶은 동네였다.

 

홋카이도

 

잃어버린 시간의 부표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도 뛰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파란 물결을 보는 걸로 ‘아, 살만한 세상이구나.’ 하며 단정 지었다. 그럴 거였으면 고민이 웬 말이었는가. 오늘보다 젊었던 어제까지의 시간을 헛된 마음가짐으로 잃어버리고 있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팔베개를 베고 가만히 누워 밤을 지새우면서 빗소리를 듣던, 젊은 나날의 조각들 

 

-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권태라는 이름으로 최면을 걸고 불면이란 증상으로 과대포장 했다. 시간에 대한 기만이자 삶에 대한 오만이었다. 젊은 날의 조각을 게으름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역주행을 했고, 함박조개 카레를 맛있게 먹었으며, 아름다운 무로란 8경을 눈에 담았다. 잃어버린 시간의 부표들이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푹 잤다. 이른 아침, 빈 병과 캔이 부딪히는 소리에 잠이 깼다. 분리수거 날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이 잊힐 게 뻔한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어김없이 시작됐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 어디에나 외롭고 슬픈 사람은 있다.’ 이는 곧, 삶의 조각 중에 외롭고 슬픈 시간은 언제나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런 순간이라면, 낯선 길로 나서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 토마코마이(?小牧) 마루토마 식당 (함박조개 카레 전문점)

- 새벽 6시~오후 2시 영업. 일요일과 공휴일 휴무

- 수산물 도매시장 안에 위치 (주소: 北海道?小牧市汐見町1-1-13)
- //h-machine.jp/marutoma/

 

* 무로란(室蘭) 8경 안내

- //www.city.muroran.lg.jp/main/org6400/hatikei_index.html

 

* 무로란을 찾을 계획이라면 2010년 방영한 일본 드라마 ‘마더(Mother)’를 보고 가는 것도 좋다.

 이 지역을 배경으로 감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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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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