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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차 배우 이석준의 첫 연출작 - 연극 <썸걸즈>
다시 기회를 준다면 정말 잘할 수 있습니까?
<썸걸즈>는 대학로에서 핫한 배우인 정상윤과 전미도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지만, 배우 이석준의 연출작으로도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태국희, 김남희, 이은, 노수산나 등 정상윤과 무대에서 함께 호흡하는 여자 배우들의 연기력은 물론이고 캐미도 훌륭하다.
“잘못된 걸 바로잡고 싶어서”
시간은 일직선으로만 흐르고, 그 위에서 삶을 꾸려가는 우리는 앞으로 뭘 할 수는 있으나, 뒤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나마 정신이 과거로 가서, 유추 반추 회상 기억 등의 활동을 할 수는 있으니 지금 현재 이곳, 물리적인 세계를 크게 바꾸는 일은 드물다. 무시무시한 일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는 새해를 기점으로 한 해가 ‘다시’ 시작되고, 의미 있는 몇 번째 생일, 몇 번째 크리스마스를 손꼽지만, 이 1인칭 관점을 우주 저 멀리 끌어 올려 전지적 시점으로 본다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중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매번 다른 시간 속에 다른 일이 한 번씩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one chance! 인생은 결국 단 한 번의 일들이 모여 평생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반복도 재탕도 없으므로, 우리네 인생에 역전도 생기고 드라마도 생긴다.
반복할 수 있다면, 되돌아갈 수 있다면, 누군가의 의지로 조작될 수 있겠지만, 언제나 단 한 번의 순간 위에 놓인 시간은 늘 예측 불가능하게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 때문에 시간 여행에 대한 인간의 염원 또한 알만하다. 타임머신부터 터미네이터 등 이전부터 근래까지 시간 여행은 이야기의 매력적인 메타포였고,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앞서나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상상은 오랜 시간동안 질리지 않고 사랑받는 이야깃거리였다.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시간 여행이라는 걸 꿈꾸는 까닭은, 결국 지금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는 데에서 기인한다. 과거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을 변화시키려는 일이니까 말이다. 간단하게,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경험치를 안고 학생이 된다면 나는 그때와 다른 삶을 살겠지. 그렇게 다른 학창시절을 보낸다면 아마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내가 되었으리라.
물론 여기서 ‘또 다른’이라는 말이 무조건 긍정적인 말은 아니다. 또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과 우연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 과연, 내가 지금처럼 살게 될 줄 알았더라면,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나는 더 좋은 대학을 가려고 노력했을까? 더 놀았을까? 영어공부라도 더 해두었을까?
머릿속으로는 ‘또 다른’이라는 말을 무조건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지만, 실제로는 다르지 않을까? 마치 내가 언제나 완벽한 계획을 짜두고도 실행하지 못해서, 혹은 예기치 못한 변수로 실패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나 결혼해…. 그 전에 한 번만 만나”
차마 타임머신을 준비하지도 못했고, 기꺼이 시간 여행에 몸을 실을 만한 용기를 가지지도 못한 한 남자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일을 되돌려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여기 극장 안 근사하게 차려진 호텔 방의 한 남자, 영민 말이다. 어리고 예쁜 약혼녀와의 결혼을 앞둔 영민은 과거에 만났던 여자들에게 연락해, 그녀들과의 추억이 있는 호텔 방으로 부른다.
웬 수작인가! 싶지만, 영민의 말에 의하면 이건 ‘정직 프로젝트’다. 훤칠한 키에 호감형 외모, 여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솜씨까지 갖춘 영민은 그야말로 나쁜 남자의 전형. 게다가 그간의 숱한 연애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TV 출연까지 하게 된 유명한 소설가. 나쁜 남자가 세간의 인기와 권력까지 쥐었으니 날개를 단 셈이다.
그는 연애할 때마다 늘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치고 ‘잠수’타는 것으로 이별을 대신했다. 그때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이별을 당해야 했던 옛 여자 친구들을 만나 영민은 무언가 확인하려고 한다. ‘참 오랜만이지……? 우리 한번 만나. 그때 그 호텔에서.’ 요상하기 짝이 없는 제안에 그때 그녀들, 호텔로 한 명씩 찾아온다.
제아무리 과거로 돌아가도 안되는 까닭은….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예전에 많이 사랑했다가 급작스럽게 나를 차버리고 간 남자가, 한참이 지난 후에 보고 싶다며 연락이 온다면 어떨까? 어처구니없긴 하겠지만, 이유도 모르는 아픈 이별을 겪었다면,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지금, 그 이유라도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나갔을 법도 하다. 그리고 괜히, ‘네가 얼마나 아까운 여자를 찼는지 한번 보시지?’하는 마음으로 꽃단장하고 나갔을 것도 같다. 결혼 이후 한 번도 가지 않은 미용실까지 들렀다 온 상희처럼 말이다.
영민의 고등학교 첫사랑 상희는 여전히 순수하고 청순한 모습이다. 물론 그때는 소녀였으나, 지금은 아이가 딸린 아줌마가 됐다는 게 다르지만. 영민은 그 둘이 헤어졌던 그때의 얘기를 꺼내며, 상희에게 악몽 같았던 이별의 기억을 순화시키려 하지만, 이야기는 엉뚱하게 꼬여가고 좀체 영민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어 두 번째로 나타난 태림은 상희와 딴 판으로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여동생 스타일. 침대 위에서 깔깔거리고 시종 유쾌한 두 사람이지만, 그 둘의 대화 역시 가만히 들어보면, 그때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두 사람이 계속 사랑을 유지해나갈 수 없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때 일을 꺼내서 기억을 되돌려 봐도, 시간이 한참 지난 일이지만, 두 사람은 같은 문제로 티격태격하게 되는 거다.
이어 나타난 영민의 지도교수 미숙, 근래에 만났다 헤어진 연인 소진 역시 마찬가지다. 영민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어려운 상황이 오면 그 자리에서 도망쳐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다. 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충분히 의도적인 멘트를 날렸다가도 영 먹히지 않으면, 옹졸하게 상처를 건드려 반응하게 한다.
그러니까 예전에 그 나쁜 남자, 아니 (어른이) 못 된 남자 영민은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영민은 제아무리 과거의 일을 돌리고, 망가진 순간을 고치려고 해도 그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별의 순간에서부터 흐른 시간은 이별의 상처에 후시딘 같은 역할은 할 수 있어도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진 않는다. 그날로부터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영민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현재를 바꿀 수 없다.
나쁜 남자 버전 <썸걸즈> 나쁜 여자 버전 <썸걸’즈>
<썸걸즈>는 데뷔 18년차 배우 이석준이 연출한 첫 작품이다
<썸걸즈>는 두 가지 버전의 연극이 상연되고 있다. 그러니까 나쁜 남자 영민이 과거의 네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인 <썸걸즈(some girls)>가 있고, 나쁜 여자 버전으로 잘 나가는 여배우 ‘미도’가 과거의 네 남자를 만나는 이야기인 <썸걸’즈(some girl’s)>가 있다. 나쁜 남자가 나오는 <썸걸즈>는 많은 여성 팬을 가진 정상윤 배우가 나오니만큼, 여성 관객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쁜 남자 영민의 어처구니없는 대사와 행동으로 ‘보고나면 빡친다(!)’는 평.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안내 멘트에 ‘나쁜 남자의 얄미운 행동 때문에 고성을 지르거나 객석에서 물건을 던지면 안 된다’고까지 주의를 시킬 정도다. 나쁜 여자 버전의 <썸걸‘즈>는 그에 비해 여자 입장에서 감정을 이입할만한 지점이라든지, 연애할 때 저지르게 되는 통상적인 실수들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영민의 <썸걸즈>는 보고 나서 그다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상황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고 현실감 넘치는 대사들은 코믹해서 내내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나쁜 남자와 그 남자에 대응하는 여자들의 모습 속에서 철없이 연애할 때의 내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진심이 아닌 줄 알면서도, 진심으로 믿어버리고 만 지난날의 착각들. 상처받을 게 뻔한데도 고난의 길로 걸어 들어간 어리석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달까.
<썸걸즈>는 대학로에서 핫한 배우인 정상윤과 전미도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지만, 배우 이석준의 연출작으로도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태국희, 김남희, 이은, 노수산나 등 정상윤과 무대에서 함께 호흡하는 여자 배우들의 연기력은 물론이고 캐미도 훌륭하다. 극에 쉽게 몰입하게 된다는 얘기다. 가볍게 친구들과 혹은 곁에 있는 연인과 봐도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연. 7월 20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그 남자, 그 여자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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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