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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적인 풍경 속에 숨은 유원지, 루스츠 리조트

일본에서 참가한 첫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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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야외로 나가면 그게 소풍이다. 누군가와 함께 갈 수도, 때로는 혼자일 수도 있다. 시인 천상병은 잠깐 머물다 가는 인생도 소풍이라고 했다.

홋카이도

 

추억의 파장

 

누구의 삶도 영원하지 않지만, 시간은 여전히 잘 흐른다. 그걸 알면서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선 시간 앞에 거만해진다. 어제 저녁 반찬도 기억하지 못하며, 오늘의 밥상에 감사할 줄 모른다. 수백 수천 번 반복했던 일도 몇 달이 지나면 까마득하다. 한편, 점점 생생해지는 과거의 순간도 있다. 그것들은 기억이란 이름으로 떠올라 추억이란 파장을 일으키고 간다. 동녘으로 난 창문을 열다가, 혹은 늦은 시각 막차에서, 새벽 꿈속에서 불쑥 떠오른다. 그때는 사위가 조용해지고 시간을 옮겨 추억 속에 빠져든다.

 

나에게 가장 오래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은 첫 소풍이다. 오늘 일처럼 꽤 자세히 쓸 수 있다. 때는 국민학교 1학년 봄, 장소는 우이동 ‘훼미리랜드’였다. 입구엔 여러 번 색을 덧칠한 빨간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엄마와 동생, 짝꿍네 식구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돗자리를 깔았지만, 모래 알갱이가 엉덩이에 배겼다. ‘청룡열차’가 가장 큰 경사로 떨어지는 곳 옆이었다. 초록색 용 그림이 무색하게 시시했어도, 훼미리랜드 최고의 놀이기구였다. ‘엄마, 나도 저거 타고 싶어.’라고 칭얼댔지만, 3학년 키가 되면 탈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멀리서 꺅꺅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김밥을 한가득 입에 넣고 울타리에 달라붙었다. 철조망 너머로 청룡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열차가 고꾸라지며 일으킨 바람을 맞으며 3학년이 되기를 꿈꿨다.

 

점심이 끝날 무렵, 다섯 살배기 동생이 바지에 큰일을 저질렀다. 뒤처리를 하고 온 엄마의 표정은 지쳐있었지만,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첫째 딸의 첫 번째 소풍이었으니 없던 기운도 막 솟아났을 것이다. 소풍의 하이라이트, 보물찾기에선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방금 뒤졌던 화단 뒤에서 다른 아이가 보물 쪽지를 찾았다. 그 장면은 요즘도 가끔 꿈에 나오는데, 어찌나 억울한지 모른다. 소풍 다음 날이면 기행문을 써서 내는 숙제가 항상 있었다. 마지막 문장은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 적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다음에 또 가고 싶습니다.’

 

홋카이도


13년 만의 소풍

 

학생으로서 떠나는 소풍은 정확히 13년 만이었다. 3월에 나는 일본어 초급 2-2반이 됐다. (아무리 무작정 살러 왔다지만, 일단 말부터 배워야 살 수 있다.) 지나가는 유치원생의 유창한 회화 실력을 동경하는 동질감을 가진 학급이다. 어학원에선 계절마다 행사가 열리는데, 봄에는 소풍이었다. 나는 일단 ‘안 간다’고 못을 박았다. 돈 주고 담력 체험하는 데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단체 생활이라는 게 나도 모르게 쓸려 가고 그런 것이라, 결국은 버스에 올라탔다. ‘소풍 떠나는 서른 살 만학도가 뭐 어때서’ 하며 입 벌리고 잠이 들었다.

 

삿포로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을 달리자 ‘루스츠’에 닿았다. 아이누어(語) 지명으로 ‘길이 산기슭에 있다’는 뜻이었다.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 족이 붙인 이 마을 이름은 날 것 그대로였다. 입으로 되뇌다 보면, 모국어가 아닌데도 뜻이 와 닿는 듯했다. ‘루스츠, 루스츠, 루스츠…….’ 실제로 꼬불대는 산길을 따라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목적지는 리조트 유원지였다. 회전목마와 그네가 돌아가고 롤러코스터가 튀어 오르는 산기슭이었다. 겨울에는 스키장이 된다고 했다. 리조트는 루스츠의 목가적인 풍경 속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뒤로는 ‘요테이산(羊蹄山)’이 가까웠다. 홋카이도의 후지산이라고도 하는데, 눈 덮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천혜의 자연 한가운데에 세워진 유원지였다. 오래된 놀이기구와 더 오래된 자연은 어색한 듯해도 잘 어울렸다. 왜 하필 여기에 리조트를 세워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환경적인 비판은 살짝 제쳐놓기로 했다. 13년 만의 소풍 장소로 이만한 곳도 없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지형이었다.

 

홋카이도


다시 만난 동심(童心)

 

소풍날의 하루는 후딱 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침까지 흘리고 잤다. 3종 롤러코스터에 바이킹, 후룹라이드, 범퍼카를 섭렵하고, 회전 그네, 회전목마, 대관람차까지 자유이용권을 아낌없이 이용했으니 그럴 만했다. 첫 소풍의 보물찾기 때보다 더 열심이었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 가까이 사는 사람이 지각하고, 관심 없다 했던 사람이 가장 신 나게 노는 법이다.

 

무리를 지어 놀이기구를 타러 다녔다. 우리가 지나가면 주변의 이목을 샀다. 제 각각의 억양으로 내뱉는 감탄사에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통하는 말이 한정적이라 목소리만 점점 커졌다. 이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 나이도 인종도 모두 달랐다. 대학생, 종교인, 여행자, 게이, 사업가, 바람둥이 등 배경도 각양각색이었다. 말은 서툴렀지만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었다. 떠나온 자들끼리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다른 나라에 살았던 이들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이 팽그르르 돌았고, 꺅꺅대는 소리가 언덕으로 울려 퍼졌다. 수십만 시간 전에 잃어버린 동심(童心)이 몰려왔다. 잡생각은 사라지고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런 신기한 인연과 시간 속에서 롤러코스터가 질주했다. 우리는 인생의 행복한 순간 중 하나를 관통하는 중이었다. 꼭대기에서 곤두박질칠 때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오랜만의 기분이었다. 그날의 사진 속엔 저마다의 어린 시절과 닮은 미소가 새겨졌다. 눈가에 패인 주름이 도드라졌다.

 

집에 돌아와 창문을 열었더니 노란 달이 구름에 짓이겨지고 있었다. 아스팔트 틈새에서 돋아난 풀 냄새가 새어 들어왔다. 꺅꺅거리는 쉰 목소리가 가득한 동영상을 돌려 봤다. 하얀 벽지로 메아리가 퍼졌다. 언젠가 큰 파장으로 돌아올 추억이었다. 잠들기 전, 단체 채팅 창에 알맞은 일본어를 골라 또박또박 찍었다. ‘참 즐거웠습니다. 또다시 가고 싶어요.’ 그리고 다음 날 수업시간엔 유난히 졸음이 몰려왔다. 내 어린 마음은 지금쯤 어디에 숨어있을까 궁금했다.

 

 

* 루스츠 리조트 (Rusutsu Resort)

 

도쿄돔 178개 크기의 리조트. 호텔, 유원지, 골프장, 스키장, 테니스 코트, 파크 골프장, 실내외 수영장, 회의장 및 컨벤션 시설 등이 있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직행 송영 버스가 있다. 노선버스는 삿포로, 도야호, 굿찬에서 운행한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참조. (//rusutsu.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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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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