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꼭 맞는 장르소설
장르문학, 어디까지 읽어보셨나요?
지금부터 각각의 단계에 꼭 맞는 레벨별 장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또한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자신의 현주소를 짐작해볼 수 있는 자리도 될 것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소설 또 없어?
장르문학 편집자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국내 영화화되기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재밌고 감동적이면서도 너무 복잡하지 않아 읽기 편한’ 장르소설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로 미스터리에 입문한 ‘일반 독자’는 또 다른 작품을 찾고 있습니다. BBC 드라마 <셜록>에 반해 원작 소설을 읽고 재미를 붙여 이와 비슷한 소설을 찾는 독자도 있습니다. 한편 이미 이런 소설은 진즉에 ‘떼고’ 좀 더 장르적인 풍미가 강한 소설을 찾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마다 내공이 다른 독자들에게 어떤 작품을 소개해야 마지막 한 장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을까요. 이런 고민 끝에 ‘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가 탄생하였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을 막 끝내고 또 다른 책을 찾는 분들을 위한 ‘입문’, 일반 독자나 장르소설 입문자는 아는 책 정도는 이미 다 읽었다는 분들을 위한 ‘심화’, 마지막으로는 오히려 책을 추천해줘야 할 경지에 오른 ‘마니아’까지. 지금부터 각각의 단계에 꼭 맞는 레벨별 장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또한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자신의 현주소를 짐작해볼 수 있는 자리도 될 것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시작은 『이누가미 일족』부터
(※긴다이치 코스케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
다시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작품으로 장르적 재미의 맛을 본 독자에게 어떤 작품을 소개해줘야 ‘와, 재밌다! 다른 것도 또 읽고 싶어!’라는 반응이 나올까요. 아무래도 이제 막 미스터리 소설을 접한 분이니, 장르적 코드가 좀 덜한 작품이 좋을 것입니다. 모든 ‘장르’소설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코드, 설정상의 약속이 있습니다. 로맨스소설의 여주인공은 반드시 독자인 나와 같이 평범해야 하고, 탐정소설의 경우 살인 등의 사건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탐정(형사가 많지만 요즘은 여학생이나 바리스타도 뛰어난 탐정입니다)이 등장해, 독자와 동등한 조건에서 공정하게 수수께끼를 풉니다.
하지만 이제 막 장르소설을 접한 독자에게 『이즈모 특급 살인』처럼 ‘토막 시체를 처리할 때 땅에 묻으면 될 것을 굳이 여러 대의 열차에 실어 경찰이 발견하도록 한다’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이고 읽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독자에겐 복잡한 트릭보다는 미스터리적 요소는 이야기를 견인해나가는 힘 정도로 사용되는 스토리텔링 위주의 작품이 좋을 것입니다. ‘범인이 누군지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는데 재밌더라’는 감상을 이끌어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죠.
『이누가미 일족』,『삼수탑』,『여왕벌』등의 저자 요코미조 세이시
『변호 측 증인』처럼 사건 자체는 평범(?)하지만 알고 보니 서술 자체가 트릭이라 반전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좋겠습니다. 서술트릭으로 분류되는 이러한 작품들은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데 수요만큼 수작이 드물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 이미 한 번 들어본 작품도 좋겠습니다. 영상화된 작품일수록 트릭보다는 스토리텔링이 강력하죠. 드라마 <로열 패밀리>의 원작 『인간의 증명』, 존 그리샴의 <의뢰인>, 송강호 주연 영화 <하울링>의 원작 『얼어붙은 송곳니』가 그렇습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읽고 싶은데 어떤 것부터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는 『이누가미 일족』을 추천합니다. 통속 지수가 높아 쭉쭉 읽히는 『삼수탑』이나 『여왕벌』을 먼저 권하는 게 맞겠지만, 아무래도 수면 위에 기괴한 모양으로 뻗어 있는 두 다리가 인상적인 영화의 영향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아는 명작? 숨겨진 명작
‘『용의자 X의 헌신』이라니, 그건 벌써 한참 전에 읽었어.’ 싶은 분들, 공부에도 심화학습이 필요하듯 좀 더 장르적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소설을 원하는 독자에게 어떤 작품을 권할 수 있을까요? 트릭도 좀 더 복잡해도 될 것 같고 히가시노 게이고 붐 때 같이 장르문학을 읽기 시작한 친구들은 아직 읽지 못했을 것 같은 소설, 그렇다고 너무 마니악한 소설은 아직은 선뜻 손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래식 미스터리로 보자면 이런 독자는 이미 엘러리 퀸의 『Y의 비극』이나 『주홍색 연구』를 비롯한 셜록 홈즈 시리즈 몇 편 이상은 읽었겠지요. 그렇다면 그다음으로는 엘리리 퀸의 ‘라이츠빌 시리즈’나 니콜라스 메이어의 『셜록 홈즈의 7퍼센트 용액』가 좋겠습니다. 엘러리 퀸의 『Y의 비극』은 알지만 ‘라이츠빌 시리즈’는 글쎄, 이름만 들어보셨을 확률이 더 클 것입니다. 게다가 이 시리즈는 다른 것에 비해 스토리성이 강해 술술 읽힙니다. 정교하고 촘촘한 트릭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분들께는 딱이죠. 『셜록 홈즈의 7퍼센트 용액』은 패스티시입니다. 원작에 등장하는 소재를 그대로 갖고 와 새로운 스토리를 쓴 것이니, 기본적으로 셜록 홈즈를 알아야 그 재미를 알 수 있죠. 하지만 머리를 싸잡을 정도의 트릭은 아니니 편히 읽을 수 있습니다.
『Y의 비극』저자 엘러리 퀸
또한 높은 명성에 덥석 집어 든 『점성술 살인사건』을 도무지 마지막까지 읽을 수 없었던 독자라면 같은 작가의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를 이때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기괴한 트릭 탓에 입문 독자에게는 버겁지만, 감정을 움직이는 스토리와 판타지와 호러를 넘나드는 소재 덕분에 『점성술 살인사건』보다는 빨리 책장을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작품 안에 여러 장르를 담은 소설을 이 시점에 읽으셔도 좋겠습니다. 다양한 장르를 품는 것, 이것 또한 어느 정도의 독서량이 뒤따라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장르소설 마니아가 된다
‘이 정도면 장르소설 좀 읽는다고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건 어떨까요. 맨 처음 모든 장르소설에는 설정상의 약속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걸 뒤틀고 뒤집으면서도 결국 근본을 지키는 소설은 어떠신가요. 야마구치 마사야의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은 제목부터 이상합니다. ‘시체’인데 ‘살아’ 있고, 살았는데 ‘죽었다’니 도통 무슨 말인지. 말만 들어도 뒤통수가 조여오는 세계관을 너무나 완벽하게 구축해놓은 장르소설은 그야말로 독자와의 두뇌 싸움을 위한, 순수하게 지적 유희만을 추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시체가 죽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이야?’라고 생각하신다면 아직 마니아 단계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을 읽고 ‘저렇게 번거로운 방법으로 살인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라고 생각하신다면 역시 아직은 이른 것 같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과격한 설정이 중심이 되는 작품도 이 단계에 포진해놓았습니다. 장르소설은 기괴하고 잔인하다는 편견이 생기는 것은 장르소설을 사랑하는 1인으로서도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리가 되셨습니까? 그럼 이제부터 여러분께 꼭 맞는 장르소설을 찾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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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숲 장르문학 편집자. 동네 꼬마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만화 가게 둘째 딸. 갱지로 만든 무협지부터 해적판 만화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곤 했던 잡식성 취향 덕에 어떤 장르도 편견 없이 소화 가능한 다기능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