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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역을 둘러싼 거대한 쇼핑 단지

겨울은 길었고, 봄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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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 줄무늬 식기가, 나풀거리는 꽃무늬 치마가, 제철 채소와 벚꽃 홍차가 오감을 자극했다. 그것들은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 봄이여.

올 게 왔다


창가에 고양이가 부쩍 늘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다가 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그루밍을 한다. 요즘은 길을 걷다가 자꾸만 남의 집 창문을 올려다본다. 끔뻑끔뻑 바깥 움직임을 주시하던 집고양이에게 눈인사를 보내면 기분이 좋다. 홋카이도는 3월이 다 가도록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드디어 놔주고 말았나, 이제 막 봄이 들어선다. 언제나 다정해서 그리웠던 봄볕에 곁을 내주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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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눈이 녹아 길이 질척하다. 부츠를 신지 않고선 걷기 힘들다. 어쨌든 올 게 왔다. 그림자 옆으로 산들바람도 지나가고 아지랑이도 피어난다. 어느 시인이 말한 대로 ‘사람의 눈빛이 제철’인 봄날이다. 사람이 만나고 싶어진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싶다. 춥다는 핑계로 게을렀던 인간관계에 다시 한 번 용기를 낸다.



세상에 손수건이라니, 얼마나 요긴한 물건인가


낮에 아는 언니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만난다는 건 곧, 밥 한 끼 같이 먹는 일이다. 다 먹고 나면 ‘차라도 한 잔’하는 게 요즘의 정(情)이다.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배도 부르고 정도 두둑이 쌓았다. 뭔가 아쉬웠던 건 혼자만의 기분이 아니었다. 언니들도 그랬고, 약속장소인 쇼핑몰 설계자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식당과 카페는 꼭대기에, 에스컬레이터는 여기저기 얽히고설켜 있었다. 딴 길로 새기 딱 좋은 치밀한 설계였다.


식당 가에서 뻗어나간 길은 놀라운 세상으로 이어져 있었다. 주차장까지, 지하철역까지 가려면 수백 개의 상점을 지나야 했다. 층별 안내도를 한참 들여다봐도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그보다 확실한 건, 언니들의 코스였다. 다섯 개의 쇼핑몰 중에서 엄선된 상점으로만 데려다 주었다. 일본어가 서툰 나를 위해 “요거야 요거.” 하며 추천 상품을 집어줄 땐 감격스러웠다. 파스텔 줄무늬 식기가, 나풀거리는 꽃무늬 치마가, 제철 채소와 벚꽃 홍차가 오감을 자극했다. 그것들은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며 반짝이고 있었다. 구석진 의자에서 졸고 있는, 꽉 막힌 주차장 진입로에서 짜증 내고 있을, 그릇가게 앞에서 혀를 끌끌 차는 남편들도 없었다. ‘저녁밥’이라는 주부에게 주어진 최고의 난제가 아니었다면, 떠나기 힘들었을 게다. 나는 손수건 두 장을 샀다. 세상에 손수건이라니, 얼마나 요긴한 물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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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 핑계를 대보겠다. 최근 실험 결과에 따르면, 쇼핑몰에서 성인 남자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은 26분이라고 한다. 여성의 ‘쇼핑 본능’과 남성의 ‘쇼핑 기피증’을 뒷받침하는 학설로는 ‘진화론’이 버티고 있다. 원시 시대부터 성별에 따라 각인된 생활 방식이 DNA 속에 남아있다는 게 핵심이다. 남성은 사냥을 하며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 반면 여성은 식물, 과일 등을 채집하며 좋은 것을 고르기 위해 살피고 또 살핀다. 채집한 것들은 나중을 위해 쟁여놓는다. 어디서 많이 본 행동 방식이다. 보통의 여성, 바로 나와 언니들이 지닌 강력한 채집 DNA가 그 원인이다. 나는 미래의 어떤 순간을 예견하고 손수건을 채집한 걸까. 옷에 튄 양념도 귀찮아서 내버려 두는 주제에 말이다.


종이 한 장에 200엔이란다. 도무지 어디에 둘지 모르겠는 손가락만 한 캐릭터 상품은 800엔이다. 쓸데없이 앙증맞기 만한 데에 욕망을 허비하느냐며 비아냥대던 내 입이 말한다. “카와이!”  이 막대기를 청소기에 꽂으면 커튼에 있는 먼지를 빨아들인단다. 수세미가 용도별로 30종류가 넘는다. 내가 뒤처진 건 아닐까, 제대로 살림을 꾸려나가지 못하는 걸까 걱정된다. 이번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유기농 소금이다. 뭐에 쓰는 소금인고, 하니 점원이 손에 마구 문질러 준다. 손등이 새하얘지자, “부들부들하네요.”하고 나는 어색하게 말한다. 멋쩍다고 단정하기 딱 좋은 각도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데 척, 하고 핸드크림을 올려준다. ‘나이스 타이밍.’ 자, 돈을 내자. 지갑을 열자. 어딜 가나 포인트도 적립해준다. 쌓자, 쌓자, 쌓아서 또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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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사는 것의 연속


산다는 건 사는 것의 연속이다.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속속들이 집어내 사도, 필요한 건 또 생기고 만다. 특히 일본은 채집인에겐 천국이다. 인간의 삶을 잘게 분절해서 매 순간 필요한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는다.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고, 물을 버리고, 잡티를 걸러내는 과정마다 필요한 도구가 있는 식이다. 그런 것들 앞에서 ‘너 없이도 잘살 수 있을 거야.’ 하며 매몰차게 생각하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 헤어진 애인도 아닌데.


4월이면 5%였던 소비세가 8%로 오른다. 105엔이던 ‘백엔 샵’ 물건이 108엔이 되고, 집세도 3% 오른다. 당분간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부부의 지갑 사정을 생각하면 꽤 우울한 일이다. 무언가는 포기하고 절약해야 한다고 굳게 마음 먹고 있었다. 막상 3월 말이 다가오니, 뭘 잔뜩 사다가 쟁여 놓을까 하는 음흉한 생각이 든다. 아베노믹스에 단순하게 놀아나는 외국인이 바로 나였다.


봄이라고 공식 관광 홈페이지도 새 단장을 했다. ‘웰컴 투 삿포로’라는 글자 뒤에 큼지막한 사진이 걸려있다. 꽃놀이도 야경도 아닌, 낮에 다녀온 쇼핑몰 사진이다. 내가 기꺼이 헤매길 자처했던 그곳. 여기저기서 실려오고 실려갈 사람들이 사는 데 필요한 건 모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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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록 정이 가는 나라


아까 낮의 수다 중 한 가지, 일본에 살려면 워낙 지켜야 하는 게 많단다. 법이 유난히 엄격한 건 아니다. 사람들은 길에서 마시거나 먹지도 않고, 껌도 잘 안 씹는다. 남의 집에 갈 때는 외투도 바깥에서 벗고 들어오고, 남에게 피해가 갈까 봐 허리를 굽히고 숨죽인다. 속말을 하지 않아 답답하고 배신감도 종종 느낀다. 여기서 오래 살아온 언니들이 그랬다. “이놈의 섬나라, 살수록 정 안 가는 나라.”라고.


그래도 채집을 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일본은 살만한 나라다. 일 년에 두 번은 속 시원한 숫자를 내걸고 세일을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다음날로 이어지는 삶을 잘게 분절한다. 그 나누어진 시간을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물건을 성실히 개발한다. 살수록(buy) 정이 가는 나라다. 돈만 적당히 있다면.


손수건을 끝으로 쇼핑 본능을 절제한 나에게 스스로 칭찬을 했다. 인터넷을 펼치니 ‘봄에 무슨 옷 입으실 건가요?’ 라는 광고문구가 심금을 휘젓는다. 모니터를 닫고 책을 펼친다. 봄이니까 읽어야지 하며 꺼내 놓았던 이외수의 책이다. 언젠가 밑줄을 그어 놓은 부분을 읽는다. “알고 보면 세상 전체를 다 뒤져 봐도 영원한 내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깨달음은 잠시, ‘하늘하늘, 꽃무늬, 봄’이란 단어가 담긴 말풍선이 머릿속에 부풀어 오른다. 아까 그 꽃무늬 치마만 아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이래저래 마음을 흔드는구나. 아, 이런 몹쓸 DNA여, 봄이여.



*삿포로의 쇼핑


홋카이도의 중심인 삿포로역은 기차와 전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다. 출구를 나오면 다섯 개의 쇼핑몰(JR타워, 스텔라플레이스, 아피아, 에스타, 파세오)이 있다. 규모가 크고 유동인구가 많아 층별 안내지도를 미리 보는 게 좋다. 여권을 지참하면 면세ㆍ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매장도 있다. 한 정거장 거리인 ‘버스센터마에 역’에 있는 ‘삿포로 팩토리’는 다양한 상품을 원하는 여행객이 찾을만한 복합 쇼핑몰이다. 오도리역 근처에도 백화점과 브랜드 및 보세 상점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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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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