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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대신 이 책을!

100만 번 죽고 다시 살아난 고양이, 그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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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오래 사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여러 번 살았는지도 상관없다. 백만 번이나 살았어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을 만나 태어나고 죽는 이유를 알게 되었노라 고백하는데 이만한 책이 더 있으랴.

광화문 광장을 지나다 깜짝 놀랐다. 벨기에의 유명한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 상점이 문을 열었구나 싶어 들여다보니, 그 작은 가게 안에 여자들이 바글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갸웃거리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발렌타인데이였다. 발렌타인데이는 여자가,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선물하는 날이라는 것도 헷갈릴 지경인데, 점점 무슨 기념일은 많아진다. 요새 어린 연인들이 워낙 빨리 만나고 급히 헤어지다보니 백일이나 천일이 아니라 투투데이(22일)를 기념한다고도 한다. 초콜릿에 심장 한 조각이라도 넣으면 모를까, 초콜릿을 준다고 어찌 사랑일까 싶어 쓴 웃음이 났다.


관성이나 타성에 젖은 초콜릿이 아니라 간절함을 담아 이 책을 선물해보면 어떨까 싶다.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 다. 일본에서는 120만 부가 넘게 팔린 그림책이고 국내에도 1996년 『100만 번 이나 산 고양이』 란 제목으로 처음 소개된 후 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다. 야구를 통해 아버지와의 추억을 풀어낸 그림책 『마이볼』 의 작가 유준재는 대학 시절 이 책으로 그림책의 경이로움에 눈을 떴다고 한다. 자우림의 김윤아는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했으며, 눈 고양이 ‘스노우캣’을 탄생시킨 만화가 권윤주 역시 아끼는 책이다.

책 표지에 그려진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빛나는, 멋진 털을 지닌 수컷 얼룩 고양이가 바로 ‘100만 번이나 산 고양이’다. 백만 번이나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니, 저자인 사노 요코는 불교의 윤회설을 가져다 이야기를 시작한다. 윤회설에 따르면 이생에서 공덕을 쌓거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를 거듭해야 한다. 그러다 마침내 이생에서 삶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경지에 이르면, 즉 부처가 되면 윤회를 끝마칠 수 있다. 그러니 백만 번이나 다시 태어났다는 건 멋지긴 하지만 이 고양이가 아직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고양이는 백만 번 다시 태어날 때마다 다양한 삶을 살았다. 그때마다 고양이를 기르던 주인들은 이 멋진 고양이를 끔찍하게 예뻐하고 아꼈고 고양이가 죽었을 때 말할 수 없이 슬퍼했다. 임금님은 전쟁을 치르다가 그만두고 성으로 돌아왔을 정도고, 뱃사공은 고양이를 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주인들을 모두 싫어했고 한 번도 그들을 위해 운 적이 없었다. 늘 사랑 받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없었던 거다.

백한 번째로 태어난 고양이는 이번에는 도둑고양이가 되었다. 워낙 눈에 띄는 외모라 곁에는 신부가 되고 싶어 하는 숱한 암 고양이들이 모여들어 아양을 떤다. 하지만 얼룩무늬 고양이는 “나는 백만 번이나 죽어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라고 꽥 소리를 질러댔다. 한데 딱 한 마리, 그를 본 척도 않는 하얀 고양이가 있었다. 그녀 앞에서 잘난 척도 하고, 재주도 부리고 “난 백 만 번이나 태어났다고.”하며 자랑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얼룩무늬 고양이는 마음을 바꿔 허세를 부리는 대신 그녀의 곁에 머물기로 했고, 자신보다 더 하얀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하얀 고양이가 죽던 날, 얼룩무늬 고양이는 자신을 사랑했던 백만 명의 사람들이 소리 내어 울었던 것보다 더 슬프게 목 놓아 울었다.

이 그림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저자인 사노 요코가 일흔이 넘어 펴낸 『나의 엄마, 시즈코상』 이란 책이 떠오른다. 평생 엄마를 미워하며 살았던 사노 요코가 치매에 걸린 엄마를 돌보며 화해하는 이야기다. 전후 3명의 자녀를 차례로 떠나보내고, 아버지와도 사별한 엄마와 딸은 서로를 끔찍이 미워했다. 대학생이 되며 완전히 집을 떠나버렸지만 엄마에게 치매가 온 후 사노 요코는 다시 엄마를 돌보게 된다. 이상한 건, 늘 진하게 화장하고 사교적이고 자기 자랑이 심했던 엄마는 사라지고,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 만큼 착한 할머니가 되어 버린 것. 사노 요코는 처음으로 엄마 옆에 나란히 누워 엄마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아, 엄마 손을 잡는 게 별 거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며 해묵은 갈등이 눈 녹듯 사라졌다. 사노 요코는 스스로를 용서한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얼룩무늬 고양이의 얼굴에 사노 요코가 살포시 겹치는 순간이다. 『100만 번 산 고양이』 는 이렇게 끝난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는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어느 날 낮에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울지 않았던 얼룩무늬 고양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백만 번이나 울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고요하고 그리운 그곳으로 갔다. 고요한 평화의 나라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백만 번이나 울고 나서 얼룩무늬 고양이는 드디어 윤회의 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래 사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여러 번 살았는지도 상관없다. 백만 번이나 살았어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을 만나 태어나고 죽는 이유를 알게 되었노라 고백하는데 이만한 책이 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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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미화

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현재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출판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에 어린이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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