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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김남주, 얼른 펼치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 책

『나의 프랑스식 서재』 저자 김남주가 말하는 ‘책’ 독서, 사람을 만나는 가장 질 좋고 구체적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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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김남주에게 책이란, 함께 있기 위해 밥을 거를 수 있는 친구다. 고독과 불면을 견디게 하고, 흥분과 자만을 가라앉히며, 공감과 배려의 지평을 열어 망망한 우주 속에서 생명의 좌표를 알려주는 친구를 두고 ‘책’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콘텐츠 스트레스’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읽을 거리, 읽을 수단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어떤 독서법이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다. <채널예스> 1월 특집, ‘서재를 탐하다’에서 다독가로 소문난 저자들과 독서 밀담을 나눴다. 어떻게 읽어야 일상에서 ‘책 읽기’가 즐거워지는지, 유익해지는지 캐물었다.


사람이 태어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할 때, 까닭 또는 동기, 요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작은 기사, 우연히 알게 된 한 사람, 여행지에서 알게 된 낯선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척 흔하지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인공이 ‘책’이다. 『나의 프랑스식 서재』의 저자이자 1988년부터 프랑스 문학을 번역하고 있는 김남주는 14살이 되던 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밤을 지새웠다. 벅찬 감동으로 친구와 토론을 벌였고, 급기야 별을 보며 밤을 새우겠다는 각오로 마당으로 나갔다가 평상에서 잠이 들어 감기에 걸렸다. 이 ‘헤세 감기’를 함께 앓은 친구를 만나 운명의 힘에 전율하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김남주가 10대 문턱을 넘을 시절, 그에게 헤르만 헤세는 종교와 다름없었다. 그 시기를 지나서는 카뮈를,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면서 작가가 신의 다름일 수 있다는 데 공감했다.


ⓒ이동섭

문장이 아름다운 건축이 될 수 있다

번역가 김남주는 1960년,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을 공부했다. 1988년 장 그르니에의 『몇 사람 작가에 대한 성찰』을 시작으로 주로 프랑스 현대문학을 번역해왔다. 옮긴 책으로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로맹 가리의 『여자의 빛』, 『솔로몬 왕의 고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 『녹턴』, 『나를 보내지마』 등이 있다. 지난해에는 번역 에세이 『나의 프랑스식 서재』를 펴냈다.
“당신이 이 책을 집어 든 이유가 프랑스 현대 소설에, 그것도 베로니크 오발데라는 참신한 이름의 작가에 관심이 끌려서라면, 나아가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이라는 제목에, 그 제목과 더불어 폴 베를렌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면, 무엇을 기대했든 간에 이 책을 다 읽을 즈음에는 기대 이상의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는 거듭된 설명으로 독자를 과잉 배려하는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섬세한 포석과 절제된 묘사가 자리잡고 있어, 성급하게 책장을 넘기는 책읽기로는 음미하기 어려운 미묘한 울림과 독특한 성찰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옮긴이의 말’ 중에서
때때로 독자들은 소설보다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기도 한다. 작품으로 향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독자와 작가, 번역가. 이 셋의 만남이 좋은 화합을 이루면 독자는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흐뭇하다. 그리고 작가를 넘어 번역가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김남주의 ‘옮긴이의 말’처럼, ‘독자가 성급하게 책장을 넘기지 않고 미묘한 울림과 독특한 성찰을 할 수 있는 것’은 비단 작가만이 줄 수 있는 배려가 아니다.

번역을 하다 보면, 질투나리만큼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날 때가 있다. 김남주가 가장 탐닉했던 문장가는 엑토르 비앙시오티.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성년이 되어 유럽으로 돌아와 만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 엑토르 비앙시오티는 자신의 삶을 3권의 자전소설 『밤이 낮에게 하는 이야기』, 『아주 느린 사랑의 발걸음』, 『공중에 새 지나간 자취처럼』 으로 남겼는데, 김남주는 앞의 두 권을 번역했다. 김남주는 엑토르 비앙시오티의 책을 번역하면서 “문장이 아름다운 건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수많은 섬에 이르렀다. 다양한 노래들이 나를 매혹했지만 그 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나의 것인 듯했다. 추억의 음으로 이루어진 듯한, 생각에 잠긴, 거울 같은 쇼팽의 곡이었다. 선배도 후배도 없는 밤의 전령은 온갖 혼란과 불안과 회오 앞에서 당혹해 하는 우리 영혼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곡의 목적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화음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고 있는 과거 속에서, 여리고 섬세하지만 그 위에 능히 우리를 실을 수 있는 그런 멜로디를 일깨워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어둠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게 하려는 데 있다.” - 『밤이 낮에게 하는 이야기』 중에서
재즈처럼 무질서한 질서로 김남주의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책들 속에는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죽이며, 소곤대고 있다. “쪼들리고 아끼면서도 와인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철없는 인물, 말을 하면서 이미 후회에 휩싸이는 그런 느낌에 대한 공감, 고요함을 진정한 사치로 꼽는 지혜, 평범한 말에 진정 어린 감사를 담은 후 곁들이는 웃음기, 기억의 덮개에 빛을 더하기, 내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제3자의 시선, 다정하게 배려하면서도 무뚝뚝한 남자, 문학을 이상한 제도라고 부르는 통찰, 아주 오래 전 황혼녘의 기억을 간간이 꺼내보며 따뜻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것 그 자체보다 그것을 보고 말하는 방식이 ‘지금 보는 것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죠.”


당신의 상상력에 말을 걸어오는 책

어떤 책 읽기가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할 수 있을까. 김남주의 대답은 10년 전에도 현재도 한결같다. 일단 지금, 자신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책을 꺼내 드는 것. 의무감이 아니라, 얼른 펼치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 책을 집어 드는 게 좋다. 객관적인 평가나 수준, 필독서나 권장서 같은 건 잊어도 좋다.

“이 우주에서 나의 기준은 낮은들 높은들, 오직 나 아닌가요? 온라인으로든 오프라인으로든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현재의 자신을 뛰놀게 하는 책, 바로 당신의 상상력에 말을 걸어오는 책, 당신의 지금과 찰칵 하고 맞물리는 책을 고르는 게 좋아요. 그리고 그 힘으로 찬찬히 끝까지 읽는 것. 건강한 몸이 필요한 맛을 찾아내듯, 상상력은 어떤 조각으로 빈자리를 채워야 할지 알고 있어요. 혹시 그 감이 이미 왜곡되었다면? 어떤 책을 고를까? 라는 질문을 품고 있는 한, 영 틀리지는 않아요. 제대로 골랐다면 그 책 속에서 다른 책들을 만날 것이고, 이제 이 상상력의 우주에서 중독성 강한 당신만의 비행을 시작하게 될 거예요.”

독서는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일까? 김남주의 생각은 간결하다. “시공을 넘어 사람을 만나는 가장 질 좋고 구체적인 방법”이기 때문. 언어를 통한 상상력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벌이는지, 루터의 다락방, 카뮈의 해변, 톨스토이의 철도역이 어느새 당신 책상으로 온다. 김우창, 도정일, 최장집, 장회익 선생들과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한다(『전환의 모색』, 2008). 김남주는 “이 조용한 능동적 경험은 결국 삶을 바꾼다”고 말한다.

당나라의 어떤 이는 글씨를 쓰기에 가장 좋은 환경 다섯 가지와 좋지 않은 환경 다섯 가지를 나누고, 좋은 환경 중 제일을 ‘기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힘쓰는 것’으로 보았다. 김남주가 생각하기에 책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다.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다. 서점 귀퉁이든, 지하철 안이든, 바람 부는 언덕이든. 김남주의 조언은 ‘자세의 중요성’에 있다. “편하되 바르게 앉아 읽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야 당신으로 하여금, 책장을 열게 한 그 힘으로 하여금 임계점을 넘게 할 수 있어요.”

올 겨울, 홀로 떠나는 여행에서 단 한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김남주는 이블린 폭스 켈러가 쓴 유전학자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 『생명의 느낌』 을 배낭에 넣을 것이다. “문학적 통찰과 과학적 발견의 특성이 만나는 지점을 새롭고 맑은 눈이 보고 있어요. 옥수수를 이해하기 위해 기꺼이 옥수수가 되려 했던 이 여자, 평소 입던 푸른 작업복과 낡은 구두 차림으로 81세에 노벨상 수상대에 오른 이 여자의 전기를 배낭 안쪽에 넣을 거예요.”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행이라면, 김남주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조세핀 테이를 한 권씩 넣을 것이다. 크리스티는 구성이 참 좋고, 테이의 인물들은 매혹적이다.

긴 글을 읽지 않는 시대다. 서둘러 읽고, ‘좋아요’ 버튼을 하나 누르는 것이 요즘 세대다. 짧은 글, 가벼운 글도 물론 삶을 품는다. 김남주는 생각한다. “말초적인 게 극단까지 가면 다시 돌아오는 흐름이 생기지 않을까.” 김남주는 소비만을 위해 씌어진 소설 한 권을 번역한 적이 있다. 스토리는 흥미진진했고, 번역은 상대적으로 편했고, 번역료는 다른 것들에 비해 많았다. 하지만 그 클리셰에 짓눌려서, 두 번째 의뢰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추위, 맑음, 충만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쓰면서.

김남주는 지금 제임스 설터의 소설을 번역하고 있다.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함께 거론되는 이른바 에로틱한 문학 『스포츠와 여가(A Sports and a Pastime』 를 잘 끝내면, 묘사의 번역, 문장 속도의 번역, 단어간 리듬의 번역, 행간 무게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큰 산을 넘은 느낌이 들 것 같다.

“주위가 소란하고 요란하면 홀로 반듯이 고요하게 머물 수 있는 마음속의 방 한 칸이 필요해요. 언제 어디서든 눈을 감는 것만으로 떠올릴 수 있어요. 연푸른 벽면, 작은 창, 다사로운 햇빛, 부드러운 바람, 정갈한 방석 하나. 지금 중요하다고 여기는 생각과 함께, 혹은 생각 없이 이따금 그 방 안에서 지내요. 저 딜런 토마스가 말하는 ‘줄기 속을 달리는 푸른 도관의 힘’이 다하기 전에.”

번역가 김남주에게 책이란, 함께 있기 위해 밥을 거를 수 있는 친구다. 고독과 불면을 견디게 하고, 흥분과 자만을 가라앉히며, 공감과 배려의 지평을 열어 망망한 우주 속에서 생명의 좌표를 알려주는 친구를 두고 ‘책’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번역가 김남주의 서재를 탐하다


책들.jpg


* 김남주 번역가의 서면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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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엄지혜


eumji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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