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본편 상영 전에 1928년에 완성된 디즈니의 흑백 셀 애니메이션 <말을 잡아라 Get a horse>가 상영된다. 곧 이 단편은 3D 기술과 뒤섞이며 참으로 영리한 단편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디즈니의 만화가 21세기에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떤 기술로 발전했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90년에 가까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하나의 프레임 속에 녹여낸다. 드림웍스, 블루스카이, 그리고 자회사인 픽사가 3D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각축전을 벌이는 동안 정작
<인어공주>로 극장용 2D 장편 애니메이션의 붐을 일으킨 디즈니는 3D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한동안 침체기였다. 하지만
<라푼젤>은 적극적인 말괄량이 캐릭터를 통해 디즈니의 저력을 확인시켜줬고 픽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디즈니의 독자적 3D 장편이 가능하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어
<겨울왕국>을 통해
<라푼젤>의 성공이 우연이 아닌 더 큰 성장을 위한 전초전이었음을 과시한다.
나의 어린 시절과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엮고, 함께 지켜갈 추억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디즈니의 건재함을 확인하는 것은 마치 오래전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겨울왕국>의 최대 장점은 붐처럼 일어난 ‘복고’의 낭만에 막연하게 기대지 않고, 달라진 21세기를 반명하면서도 여전히 유효한 고전적 이야기의 힘과 그 감수성의 저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내내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복고의 낭만 대신, 이야기의 감수성으로
어릴 때부터 마법으로 세상을 얼려버리는 힘을 지닌 공주 엘사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동생 안나를 다치게 한 후, 겁에 질려 사람들을 피해 스스로 성 안에 갇힌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마저 죽고, 세상에 둘만 남겨진 엘사와 안나, 안나는 언니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엘사는 자신을 가둠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한다. 엘사가 성인이 되는 날 대관식을 치르다, 오랫동안 감추고 있던 마법이 사람들에게 들키고, 그녀는 사람들을 피해 왕국을 떠나 산 속에 얼음 궁전을 만들고 혼자만의 삶을 선택한다. 동생 안나는 언니가 만들어낸 겨울의 저주도 풀고, 언니도 구해내기 위해 엘사를 찾아 나선다. 얼핏 익숙해 보이는 이야기의 틀은 안데르센의 원작
『눈의 여왕』에서 따왔지만, 이야기는 아주 새롭고 신선하다. 동시에 여러 가지 신화와 상징들로 가득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특유의 서사 구조를 과감하게 해체했다. 아이들이 보기 편하게 축약된 이야기는 몇 줄로 요약가능한데, 거기에 상투적이지 않은 교훈까지 담아낸다.
<아바타>가 3D 영화의 혁명을 이끌었다면,
<겨울왕국>은 3D 애니메이션의 혁명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시각적 황홀함을 선보인다. 엘사가 얼음궁전을 만드는 압도적인 장면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장면은 그 어떤 실사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을 정도로 압도당한다. 3D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과도한 입체효과를 내는 대신, 보는 내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잘 계산된 화면의 구도와 블록버스터에 버금가게 박진감 넘치는 화면과 과감하게 이야기의 곁가지를 생략하는 전략도 성공적이다. 여기에 공주와 왕자의 로맨스를 벗어나 가족, 그리고 그 포용과 이해, 희생의 순간을 알맞게 버무린 서사구조에서 진한 감동을 받아 울컥 울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캐릭터에 동화시키는 힘도 있다. 특히 상대가 아무리 모자라더라도 진실한 사랑으로 고칠 수 있다는 ‘사랑 전문가’ 트롤의 합창은
<겨울왕국>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낸다. 자신보다 남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상대방의 진심을 확인하는 순간, 동생을 지키기 위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언니의 마법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된다.
뮤지컬 넘버의 매력도 넘친다.
<겨울왕국>의 뮤지컬 신은 마치 브로드웨이 신작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압도적이다. <위키드> 초연의 주연 이디나 멘젤이 불러 골든 글로브 최우수 주제가상 후보에도 올랐던 ‘Let it go’와 두 자매의 엇갈린 심정을 고조시키는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는 물론 발랄하고 상쾌한 사랑을 표현하는 ‘Love is an open door’, 앞서 트롤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Fixer upper’ 등 당장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가도 될 만한 음악은
<겨울왕국>을 보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왕자와 공주의 키스로 끝나는 클래식한 결말 대신,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기쁨과 가족애의 회복, 저주 같았던 마법이 축복으로 변화하면서 눈사람도 함께 살 수 있는 발랄한 결말은 흐뭇한 감동으로 남는다. 귀여운 트롤 군단과 함께 순록 스벤 등 조연도 귀엽고, 특히 초긍정의 힘을 보여주는 눈사람 올라프는 근래 본 캐릭터 중 가장 매력적인 개그를 보여준다. 21세기 디즈니의 대표 인기 캐릭터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엔딩 크레디트를 장식하는 ‘Let it go’는 가창돌이라 불리는 효린이 부르는데, 이디나 멘젤 못지않다. 디즈니의 현지화 전략에 따라 자막판 영화에서도 엔딩에서는 이디나 멘젤이 아닌 효린의 ‘Let it go’를 들을 수 있다.
함께 읽어도 좋을 원작, 『눈의 여왕』
<겨울왕국>의 공동연출자인 제니퍼 리는 엘사를 제외한 나머지 주연의 이름을 원작자인 ‘한스 크리스티앙 안데르센’에서 인용하여 각각 한스, 크리스토프, 안나라고 지었다고 밝혔다. 원작자에 대한 오마주가 빛나는 대목이긴 하지만,
<겨울왕국>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에서 몇 가지 모티브와 그 주제만 빌려왔을 뿐, 아주 새로운 이야기로 변신했다. 무엇이든 실제보다 더욱 흉측하게 비추는 거울을 가진 악마 트롤의 거울이 수억 개의 조각들로 부서져 세상 사람들의 심장과 눈에 박혀버린다. 소년 카이의 심장과 눈에도 이 거울 조각이 박혀버리고, 단짝 친구였던 소녀 게르다와 멀어지게 된다. 그러던 카이는 눈의 여왕의 궁전으로 사라진다. 사라져버린 카이를 찾아 길을 떠나는 게르다는 갖가지 고난과 역경을 만나지만, 친구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이겨내며 마침내 눈의 여왕의 궁전에 도착한다. 게르다의 뜨거운 눈물은 카이의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녹인다. 카이도 함께 눈물을 흘리자 그의 눈에 있던 거울 조각도 빠져 나오게 된다.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기보다는 진실한 사랑으로 감싸주었을 때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원작
『눈의 여왕』의 메시지는
<겨울왕국>에도 고스란히 감동적으로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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