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디자이너 한정현의 작품은 세계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그가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재학 시절에 가구 디자인으로 전공을 결정한 후 선보인 첫 과제물이 영국 잡지 <월페이퍼>에 ‘동양의 약속’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되면서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의 이름은 많은 이에게 각인되었다. 그는 크랜브룩 아카데미에서 3D 디자인 석사를 마치고 2003년 귀국해, 첫 개인전 <더불어 홀로> 전을 여는 동시에, 다수의 국내외 페어에 참여했다. 이어 2009년, 두 번째 개인전인 <모던 아날로그> 전으로 큰 호평을 받으며 디자이너로서 ‘물이 올랐다’라는 찬사를 들었다. 당시 화제를 모은 ‘코르크 앤 코르크cork n cork’ 의자는 디자이너와 사용자가 함께 만드는 가구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다.
‘사람’을 중심에 둔 디자인 철학
한정현 씨의 가구는 창의력과 기능성이 잘 조화되어 있다. 사용하기에 편하지만, 사용하지 않을 때는 하나의 조형물처럼 보이는 것. 가구를 디자인할 때 그 속에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의 가구는 어찌보면 과거의 추억, 현재의 감정, 또 미래에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와인을 좋아하는 그는 코르크 의자를 비롯해 와인과 관련된 작업을 종종 선보인다. 하이글로시 스탠드형 와인 랙 ‘오프-너 1(operner-1)’은 미니 홈 바와 사이드 테이블로도 사용할 수 있는 제품. 또 지나간 시간을 사색하는 것을 즐긴다는 그는 ‘시간’이라는 모티프에도 집중한다. 세로 혹은 가로로 걸 수 있는 기다란 거울 ‘랑데부(rendezvou)’는 양쪽에 2개의 시계가 달려 있어 외국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 때 시차를 계산할 필요가 없다. 또한 그의 디자인에는 언제나 유머 코드가 담겨 있는데 이는 디자인의 중심에 ‘사람’이 있고, 거기에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디자인 철학에 밑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밥 먹는 외로움에서 착안한 ‘텔레사피언스(Tele-Sapiens)’가 대표적인 예다. 이 의자는 등받이에 설치된 LCD 모니터로 친구와 화상 통화를 할 수 있고, 아침 일찍 배달된 메일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밖에도 그의 작품 중에는 유난히 의자가 많다. 2007년 가회동에 오픈한 작업실 겸 쇼룸 ‘체어스 온 더 힐’이라는 이름만 봐도 그가 ‘의자’를 편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자는 사람과 가장 오랜 시간, 가장 많이 닿는 가구인 만큼 다양한 오브제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과 상품 사이, 아트 퍼니처
‘체어스 온 더 월chairs on the wall’은 가구를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의자는 항상 바닥에, 사람이 앉아야만 그 쓰임새가 있다는 개념을 뒤집은 것이다. 그림처럼 걸고 감상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선반(on the floor)’과 공중에 부양한 의자, 두 작품은 콤비를 이룬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렇게 실험적인 작품이 ‘잘 팔리느냐?’라고 묻자 어느 도예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도예가가 거대한 원반 형태의 벽에 거는 오브제를 만들었다. 쓰임새를 주기 위해 가장자리를 살짝 구부렸더니 접시가 되었다. 하지만 접시가 되자 되레 가격이 떨어졌다. ‘쓰임’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아이러니한 것이다. 쓰임이 있으면 더 비싸져야 하는데, 작품이 ‘용품’이 되는 순간 가치가 떨어지니 말이다. 그가 갖고 있는 고민도 같은 맥락이다.
가격을 낮추려면 양산을 선택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디자인에 또 다른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당연히 새로운 작품을 디자인할 의욕이 꺾일 수밖에.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비싼 제품을 많이 사서 작가의 의욕을 고취시켜주세요’가 아니다. 아트퍼니처의 매력은 오트 쿠튀르라는 점이다. 모든 가격의 잣대가 대량 생산되는 제품에 맞춰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작품이냐 상품이냐, 디자이너냐 장사꾼이냐. 이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그 역시 여전히 매 순간 고민한다. 나는 작가일까, 장사꾼일까? 상품을 만드는 것일까, 작품을 만드는 것일까?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 명쾌하다. “저는 그냥 작가 할래요. 만들때는 작가고, 팔 때는 장사꾼!(웃음).”
서른다섯, 하프타임
한정현 씨는 결혼 후, 자신을 위한 가구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는데, 우븐 소파와 트위스트 TV 장, 패치 시리즈가 그것이다. 기존의 작품이 혼자 혹은 둘을 강조한 작품이었다면 최근작은 소재뿐 아니라 부드러운 선의 미학이 느껴지는, 마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느낌. 아마도 결혼과 출산이라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작용한 듯하다. 부부와 갓 태어난 아기가 살기에 적당한 크기의 집은 마감재나 구조 변경 없이 자신을 위해 디자인한 가구와 컬렉션 작품들로 모던하고 심플하게 꾸몄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아트 퍼니처의 매력을 한정판에서 찾곤 해요. 획일적인 아파트 문화에서는 더더욱 이러한 독창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지요.”
사실 결혼 직후 연 두 번째 개인전이 가구 디자이너로서는 가장 의미있는 작업을 선보인 자리였다. 코르크 의자, 타임플라이즈 시계, 스윙&행 옷걸이, 에지 스툴, 트위스트 책장, 루이스 테이블, 스트라이프 체어…. 좀 더 유머러스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그는 요즘 지난 작업을 돌아보며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다. 앞으로는 자신이 디자인한 가구를 직접 사용해보며 문제점을 보완할 계획이라고. 우븐 소파, 트위스트 책장은 작품의 규모도 크고 원숙한 조형미를 추구한 작업이다. 초반의 작품이 너무 컨셉추얼했다면 최신작은 실용성이 가미됐다. 실험과 실용이 적절히 타협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선보일 한정현식 가구의 큰 틀이다.
디자인과 사람이 소통하는 공간
“앞으로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바뀌지 않을까요? 한국의 디자인 교육은 너무 기술에 집중돼 있어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화에 대한 상상력인데 말이죠.” 그는 가구를 ‘디자인’하지 ‘제작’하지는 않는다. 제작은 공방 장인에게 맡긴다. 가구를 직접 만들다 보면 제작이 어려운 디자인은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디자인을 양산 가능한 상품으로 컬래버레이션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염두에 둔 작품은 옷걸이 ‘스윙&행swing & hang’. 나무 기둥에 가지 형태의 걸이가 숨어 있는 옷걸이는 쓰임과 오브제 기능 모두 갖춘 충실한 아이템이다.
“보통 인터뷰를 하면 어디서 영감을 받는지 자주 질문을 받는데, 사실 작품이 영감만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는 동시에 공부도 해야 해요. 학생 때 기발한 작품이 많이 나오는 게 바로 그 때문이죠. 항상 탐구하고 책을 많이 읽으니까요.”
그의 지론처럼 ‘액션’이 있어야 ‘리액션’이 있는 법. 지난 15년이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전반전이었다면 이제는 중견 작가로서 후반전을 준비하는 하프타임이다. 하프타임도 역시 그간 선보여온 작품을 되돌아보고 직접 사용해봄으로써 그 쓰임을 검토하는 ‘액션’ 중. 이제 곧 맞이할 후반전에서는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지키면서 한층 성숙해진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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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글은 <행복이가득한집>에 연재되었던 기사를 단행본으로 묶은 것으로, 현재 작업실 모습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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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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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방’이나 ‘작업실’ 은 그 단어만으로도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공간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예술가의 공간은 그 어떤 곳보다 동경과 기대의 대상이 된다. 《작업실, 구경》에는 이처럼 엿보고 싶고 따라하고 싶은 작가들의 공간이 소개돼 있다. 그곳에는 그들 각자의 개성과 취향을 잘 반영한 소품과 도구들로 가득 차 있고, 때로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상충하며 만들어낸 독특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 책을 통해 화가, 사진가,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패션 디자이너, 미디어 아티스트, 가구 디자이너, 조각가 등 스물다섯 명의 공간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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