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이헌정은 그릇뿐만 아니라 과감한 설치미술 작품부터 추상적인 도예 조각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활동을 보여주는 미술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도예를 전공한 후 미국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돌아와 도예, 조각, 설치미술을 경계 없이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때때로 건축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우리 눈에 익은 것으로는 청계천의 명물이 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도자 벽화를 꼽을 수 있겠다.
울창한 숲 사이에 비밀 아지트
이헌정 씨의 거처는 경기도 양평의 시골에 있다. 휴대전화 수신이 되다 말다 하는 꼬불꼬불한 흙 길을 따라 들어가면, 울창한 숲 사이로 마치 태권브이의 비밀기지 같은 그의 아지트가 나타난다. 맑은 가을 하늘과 빼곡한 나무를 배경으로 노출 콘크리트로 지은 사각 박스 건물 세 개가 그 미니멀한 위용을 드러낸다. 그는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이곳에 왔고 나무만 무성했던 자리에 두 채의 건물을 지었다. 하나는 작업실과 갤러리를 겸한 건물, 또 하나는 가족과 기거할 집. 그리고 작업 스케일이 커지고 작업량이 많아지면서 세 번째 건물까지 완공했다. 세 채의 건물은 각각 집과 작업실과 갤러리로 재편성되었다. 하지만 새 건물을 완성하기가 무섭게 벌써 포화상태에 이르러 또 작업 공간이 부족하단다. 참으로 왕성한 생산력이다.
자연이라는 창조자에게 나는 노동을 빌려준다
예민하다기보다는 우직해 보이는 첫인상의 그는 스스로 노동을 많이 하는 작가라 말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 12년 동안 19번의 개인전을 치렀을 정도로 부지런한 성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몸으로 체화하고 깨우치는 감각을 믿기에 더욱 그렇다. 도예 작품을 만들기 위해 흙을 주무르고 물레를 돌리고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는 순간을 그는 경건하게 생각한다. 이는 그의 작품관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내재된 것이 드러나도록 노동을 제공하는 수동적인 존재일 뿐, 정작 창작자는 따로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 자연이 이미 흙을 창조했고, 그는 흙이 가진 본질이 드러날 수 있게 노동하는 것뿐. 부드러운 흙 반죽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둥글둥글한 그릇, 휘어진 타원을 그리는 사발, 손가락이 눌린 자국 그대로 완성된 접시 등 그의 도예 작품을 찬찬히 보면 그가 전하려는 흙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직관은 그가 신성시하는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발달하는 것이리라.
예술은 자신을 객관화하는 여행
“도예가 자연 앞에 나를 겸손하게 낮추는 작업이라면, 설치미술은 물질과 내가 소통하는 과정입니다. 도예 작업과 달리 우연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과 연출에 의해 이루어지죠.” 지난 전시에서 선보인 콘크리트 가구들도 정확한 계산에 따라 틀을 짜고 맞추어 완성한 것이고, 그 외 다른 여러 설치 작품들도 철저한 의도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 이 같은 설치미술은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드러내는 작업.
수동적인 도예와 적극적인 설치미술, 그렇게 상반되는 작업을 함께 하면서 그는 예술가적인 감성과 태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시소처럼 수평의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한다.
“저는 움직이는 습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도예, 조각, 설치미술, 최근에는 가구까지 다양한 분야를 시도해왔어요. 이렇게 분야를 옮기면서 시도하는 게 저는 좋아요. 한 우물을 못 파는 제 성격을 장점화시키는 것이기도 하고요. 부담도 있지요. 노하우가 전혀 없는 새로운 것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내 이름에 기대하는 퀄리티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초조함이 듭니다. 그것에 초연해지는 데에도 많은 수련이 필요하더군요.”
그는 자신의 작업을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전시에 항상 ‘몇 번째 여행’이라는 제목이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처럼 여행을 많이 떠날수록 예술가는 스스로에 갇히지 않고 객관화 된다고 생각한다.
시골집에서 계절을 따라 사는 행복
그는 건축에 막 관심이 생길 무렵 이 집과 작업실을 지었다. 얼마나 호기심이 충만했겠는가. 각 공간의 내부와 외부를 세세하게 구상하고 모형까지 정교하게 만든 후에 건축사무실에 의뢰를 했다. 건축사무실을 통해 완공하기는 했지만 그가 디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건물은 나무, 콘크리트, 쇠를 이용해 최대한 단순하게, 그리고 철골 기둥 같은 건물의 골조가 드러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건물 안의 가구들, 책장, 주방 가구는 대부분 그가 만든 것들. 디자인만 해서 인부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땀 흘려 손으로 만들었단 소리다. 필요한 기계가 작업실에 다 있고 날마다 온갖 재료로 별의별 희한한 작품을 만드는 게 일상인데, 가구쯤이 뭐 그리 대수였겠는가.
구석구석 자신의 손길이 닿아 있는 이곳에서 그는 현재 두 사람의 스태프와 함께 지내고 있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이면 아침 8시부터 잠자기 전까지 작업을 한다. 그때 그때 전시 준비나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따라 그릇도 만들고 타일이나 조각도 만들고, 때론 거대한 오브제도 만든다. 작업하고 점심 먹고 작업하고 저녁 먹고 작업하고 잠 잔다. 시골이라 달리 한눈팔 일도 없다. 그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골이 좋다.
“도시에 수직 수평의 질서가 존재한다면, 시골에는 유기적으로 얽히는 자연의 질서가 있어요. 이곳의 좋은 점 중에 하나는 계절마다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일들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에게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트렌드가 아니라 진정한 웰빙을 위해서는 오히려 이런 생활의 절차들이 필요한지도 몰라요.”
도예가 이헌정은 머나먼 항해를 꿈꾸고 있다. 노동의 반복을 통해 몸으로 깨우치게 된 감각, 그 감각에 의지하여 망망대해 같은 인식의 바다에서 방향을 찾아가는 항해. 그 항해를 위해 그는 오늘도 양평에서 흙을 주무르고 가마를 손보고 불을 지핀다. 긴 여행의 끝이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그가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한 항해를 계속하여, 그의 직관이 인도하는 최종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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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글은 <행복이가득한집>에 연재되었던 기사를 단행본으로 묶은 것으로, 현재 작업실 모습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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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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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 구경 : 엿보고 싶은 작가들의 25개 공간 행복이가득한집 편 | 디자인하우스
예술가의 ‘방’이나 ‘작업실’ 은 그 단어만으로도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공간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예술가의 공간은 그 어떤 곳보다 동경과 기대의 대상이 된다. 《작업실, 구경》에는 이처럼 엿보고 싶고 따라하고 싶은 작가들의 공간이 소개돼 있다. 그곳에는 그들 각자의 개성과 취향을 잘 반영한 소품과 도구들로 가득 차 있고, 때로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상충하며 만들어낸 독특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 책을 통해 화가, 사진가,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패션 디자이너, 미디어 아티스트, 가구 디자이너, 조각가 등 스물다섯 명의 공간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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