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가 나왔다 치자. 마이클 베이의 <아마겟돈> 같은 영화라면 가볍게 젖히고,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 같은 영화라면 즐겨보는 편이다.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2006년 알폰소 쿠아론이 감독한 <칠드런 오브 맨> 같은 SF라면 추천하면서 본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실 다른 영화 장르도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기계의 힘을 많이 빌어야 하는 SF에서 핵심적인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그 테크닉을 적극 활용해 그려내는 이야기 자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당연히 사람과 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미지의 공간, 시간을 배경으로 수많은 은유를 통해 현재를 반영하는 철학이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알폰소 쿠아론의 SF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니 망설임 없이 개봉 첫 날 <그래비티>를 만나러 갔다.
여성 우주인 한명이 생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역경을 이기고 지구로 귀환한다는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 깊이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또한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우주 그 자체로 영화를 가득 채우지만, 알폰소 쿠아론의 시선은 우주가 아니라 인간과 그 존재를 향한다. 초반 20분 오프닝 시퀀스의 숨 막히는 롱 테이크와 극한의 우주 조난 상황을 그려내는 연출력은 마치 관객들마저도 무중력 상태에 둥둥 떠다니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데, 지구로부터 600km, 소리도 산소도 없는 곳에서 생존해야 하는 한 여인의 처절한 사투는 외계인과 천재지변 없이도 진짜 재난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외부의 적이 아니라,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그 자신의 내면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래비티>의 갈등은 우주와 지구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당위와 죽음에의 매혹 사이에 있다. 그렇게 영화는 내내 우주라는 공간이 가지는 경이로운 풍경과 그 무한함에 경외감을 가지지만, 생존을 갈망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하는 한 여인의 내면으로 더욱 깊이 파고든다.
카메라의 숏이 무한한 우주에서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을 바라보는 다큐멘터리 같은 시점에서, 다시 라이언의 시선을 통해 막막한 우주를 먹먹하게 바라보는 숏으로 전환될 때, 관객들은 광대한 우주에 고립된 상황이 아주 좁은 곳에 갇혀버린 폐쇄공포와 다르지 않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동감하게 된다. 그리고 영생에 가까운 우주 공간에서 인간이 벌이는 사투는 자신의 유한한 삶 그 자체에 보내는 악착같은 ‘의지’ 그 자체이다. 우주를 향한 경이와 공포, 좌절과 도전, 삶에 대한 애착과 동시에 삶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절망의 순간까지……. 알폰소 쿠아론은 광활한 공간에 홀로 남겨진 한 여인을 통해 이 모든 삶의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가감 없이 풀어낸다. 툭 던져 사라지고자 하지만, 늘 단단한 구심점이 되어 되돌아 올 수밖에 없게 ‘중력 gravity’이 끌어당기는 힘은 단단한 삶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또한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의지와 죽고 싶다는 충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라이언의 갈등을 품어내는 감독의 시선은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까지 이르게 한다. 그래서 살아난 라이언의 귀환이 온전한 삶의 의지로 복귀하는 행복한 결말인지, 죽음에 대한 충동에 사로잡혀 우주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욕망의 실현이 오히려 행복하진 않았을지 다시 한 번 반추하게 만든다.
성장영화에서 생존의 철학까지
<러브 앤 히스테리>
<위대한 유산>
1991년 멕시코에서의 데뷔작 <러브 앤 히스테리>는 여러 여자들을 농락하는 바람둥이가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줄 알고 벌어지는 헛소동을 그린 코미디였다. 모차르트의 감미로운 선율에 ‘돈 주앙’과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인용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이 영화는 멕시코 특유의 끈적이는 열대 기후마저 도시적 감수성으로 풀어내는 산뜻한 영화였다. 이어 1995년 미국으로 건너가 연출한
<소공녀>는 흔히 진부하다 생각하는 동화를 색다른 판타지의 깊이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1998년 찰스 디킨스의 동명소설
<위대한 유산>을 연출하며 고전적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연출력을 보였다.
<이 투 마마>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은 2001년 10년 만에 고국인 멕시코로 다시 돌아가 만들어낸
<이 투 마마>였다. 섹스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한 10대의 이야기라면 바로 미국식 청춘 섹스 코미디의 아이콘인
<아메리칸 파이>를 떠올리겠지만, 알폰소 쿠아론이 만든 성장 이야기인
<이 투 마마>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소년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었지만 확실히 그 층위를 달리 한다. 젊은 육체를 쫓는 카메라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기에 국내 개봉 당시에는 모자이크가 둥둥 떠다녔다. 무삭제 오리지널 판을 보았다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투 마마>는 가리지 않고 다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더 솔직하고 건전하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섹스를 매개로 두 친구는 교감하고 배신하고 그리고 혼란에 빠지면서, 삶의 기복과 그 후유증을 체감하면서 훌쩍 자라난다. 두 소년의 성장담 속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멕시코의 자연과 사람을 담아내고 근엄한 체 하지 않으며 풍요와 빈곤, 계층 간의 차이가 공존하는 멕시코에 대한 정치적 함의까지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다음 영화는 2004년 해리 포터 시리즈
<아즈카반의 죄수>였다. 해리 포터는 읽어본 적도, 관심도 없다는 그가 이 시리즈를 수락한 이유는 원작에서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사춘기 소년의 성장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쿠아론 감독은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통해 13살은 괴물을 두려워하는 나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움트는 ‘무언가’를 더욱 두려워하는 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원작의 광팬들이 원작을 충실히 살리지 않았다고 맹비난을 했을 정도로 그는 자를 건 확실히 자르고, 이후 시리즈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유롭게 ‘해리 포터’를 입고 분노와 불안으로 가득한 사춘기 소년의 성장담을 풀어낸다. 이 영화를 통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장르의 특성이 분명한 상업영화 속에 자신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철학을 담아내는 방법을 분명히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칠드런 오브 맨>
앞서도 언급했지만, P.D. 제임스의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침울하고 어두운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27년은 인류가 아이를 낳지 못한지 18년이 되는 해이다. 인간은 절망 속에서 종말을 준비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가장 섬뜩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개봉 당시인 2007년과 2027년의 미래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문명사회를 자랑하는 지금 현재 혹시 우리는 암흑의 시대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봐야 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끈은 놓치지 않는다. 그 사유의 힘은 천문학자들까지 감탄하게 만들었다는, 테크놀로지가 영화에 어떻게 기여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그래비티>까지 이어진다. 띄엄띄엄 작품 활동을 하는 성향으로 봐서 한참 걸리겠지만, 다음 작품이 극장에서 개봉한다면 지체 없이 바로 극장으로 달려갈 것이다. 물론 나는 장르에 무척 까다로운 편이지만, 알폰소 쿠아론이라면 절대 장르를 따지지 않겠다.
<그래비티>는 그런 확신을 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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