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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뮤즈, 쉬광핑의 삶이 여자들에게 주는 교훈

루쉰의 아내, 루쉰의 뮤즈, 쉬광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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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광핑은 그녀 자신의 이름보다 루쉰의 아내로서 세상에 알려져 있다. 루쉰은 사망한 지 오래 되었지만 1999년 새천년맞이 특집으로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아 위클리(亞洲週刊)>사에서 20세기 중국문학 걸작 순위를 매겼을 때 1위로 평가받을 정도로 대접받는 대작가이다. 한때 중국 본토 공산당에서 우상시되어 과대평가를 받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루쉰은 현재까지 중국은 물론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가이자 사상가, 혁명가이다.

왜 셀린느는 저렇게 변했을까?

영화 <비포 미드나잇>을 보았다. 난 이 시리즈 영화를 개봉 당시의 내 나이와 상황에 따르는 여러 가지 잡생각을 하며 본다. 남자 주인공의 얼굴만 보는 것은 아니다. 진짜다. 우연이지만, 난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비슷한 나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남녀가 사랑하고 싸우며 현실의 삶 속에서 변해가는 모습을 9년마다 보면서, 어찌 내가 그들보다 열 배는 비루해서 더욱 현실적인 나의 삶을 꺼내 보지 않을 수 있으리.

비포 시리즈 1편의 싱그럽던 그들을 보고, 나는 비엔나 갈 일도 없었건만 끈 달린 원피스를 미리 사 두었다. 그리고 9년, 또 9년이 흘렀다. 내 원피스는 옷장 안에서 곱게 삭아가고 있었고… 맙소사, 이번 3편인 <비포 미드나잇>으로 만난 셀린느는 내 원피스보다 더 삭은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화면 속에는 18년 전 비엔나의 천사는 간 곳 없고 신경질적으로 남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정신 사나운 아줌마만 있었다. 왜 셀린느는 저렇게 변했을까? 아니, 왜 저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토록 사랑해서, 제시의 이혼을 기다려 결혼한 그들인데 왜 완벽히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

답은 영화 속 둘의 말싸움에 있었다. 제시가 책을 쓰고 출간 행사를 다니며 성공적인 작가의 길로 나아갈 때, 셀린느는 가사와 육아, 비전 없는 직장 생활에 치여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절실한 마음,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남편인 제시는 너무도 모른다. 아, 그런데 나는 막 알 것 같았다. 셀린느같은 친구들, 언니들, 주위에 역사책에 너무도 많이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눈앞에 한 이름이 영화 속 자막처럼 떠올랐다. 바로 쉬광핑(허광평, 許廣平)!



어린 시절의 쉬광핑 사진


루쉰의 아내, 루쉰의 뮤즈, 쉬광핑

쉬광핑은 그녀 자신의 이름보다 루쉰의 아내로서 세상에 알려져 있다. 루쉰은 사망한 지 오래 되었지만 1999년 새천년맞이 특집으로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아 위클리(亞洲週刊)>사에서 20세기 중국문학 걸작 순위를 매겼을 때 1위로 평가받을 정도로 대접받는 대작가이다. 한때 중국 본토 공산당에서 우상시되어 과대평가를 받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루쉰은 현재까지 중국은 물론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가이자 사상가, 혁명가이다. 1881년 중국 저장성 사오싱에서 태어난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주수인, 周樹人)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26세 때 어머니가 정한 여성인 주안과 혼례를 치룬 루신은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지만 어머니를 봉양하는 며느리로서 주안을 존중하며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했다. <광인일기>를 잡지 <신청년>에 발표한 이후부터 루쉰이란 필명을 사용하여 그는 문학 창작과 시사평론 집필, 번역 작업에 힘써 많은 글을 발표했다. 베이징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지원하던 중, 루쉰은 여대생인 쉬광핑을 만난다. 쉬광핑 졸업 후 상하이로 이주하여 동거를 시작한 둘 사이에 아들 저우하이잉이 태어난다. 이후 사망까지 10년간 루쉰은 쉬광핑의 안정적 내조를 받으며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루게 된다. 루쉰 사후 쉬광핑은 루쉰 전집을 출간하고 그의 유품을 보존하여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여생을 루쉰 사업에 힘쓴다. 이 정도가 쉬광핑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정도이다. 즉, 쉬광핑은 루쉰의 두 번째 부인으로 루쉰과 관련해서만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루쉰이 그 빛나는 성취를 이루던 10년간, 그 똑똑했던 신여성 쉬광핑은 루쉰을 내조하며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구 베이징대학(일명 홍루)에서 루쉰이 중국문학사를 강의하던 강의실 모습.

<루쉰 평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허광평은 원래 친구가 운영하는 부녀 잡지사에서 일할 생각이었으나 노신은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이 또다시 이전처럼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을 걱정했다. 그는 허광평이 집안에 남아 가사를 돌보고 일어를 배우면서 혼자서 중요한 일련의 번역 작업에 몰두하기를 원했고, 허광평은 노신의 이런 생각에 순순히 따랐다. 그녀는 번역 작업의 의미를 깊이 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심전력으로 이런 일에 몰두하게 된 것에 대해 다소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그녀가 원한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선택의 권리를 포기했다. 십수 년이 지난 후에 그녀는 고백적인 글에서 노신의 호의에 의해 일본어를 공부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지만, 동시에 이미 오래전 일로 묻혀버린 노신에 대한 불만과 반항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노신 평전(p229), 임현치 지음 / 실천문학사」

아, 무언가 아쉽다. 루쉰의 삶에서 쉬광핑을 볼 것이 아니라 쉬광핑의 입장에서 그녀의 삶을 봐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쉬광핑에겐 잃어버린 10년

쉬광핑은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운동, 이른바 무술변법이 실패로 돌아간 1898년에 광둥성의 중심인 광저우 근처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봉건적인 사회에서 반쯤 개화된 가정’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쉬광핑은 어머니가 묶어준 전족을 하루만에 풀어 버릴 수도, 아기일 때 아버지가 술김에 정한 약혼자와 파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로 그녀는 고향에서의 혼삿길이 막혔다. 전화위복! 덕분에 쉬광핑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학 가서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텐진의 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한 쉬광핑은 1919년의 5.4 운동을 목격하고 여성운동과 애국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졸업한 후 교사로 취직하지 않고 상급 학교인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한다. 구식 교육을 강조하며 반민주적 학사운영을 한 교장을 배척하는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쉬광핑은 강사 루쉰의 조언을 구하면서 가까워져 그의 연인이 된다.


루쉰, 아들 저우하이잉과 함께한 쉬광핑

졸업 후 쉬광핑은 고향 광저우로 내려가 교직 생활을 시작하나 학내의 정치적 소요에 휘말려 그만두고 광저우로 따라 내려와 대학 교수가 된 루쉰의 조교로 일한다. 둘은 광저우를 거쳐 상하이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허광평은 루쉰을 내조하며 10년간 전업주부로 산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본처가 살아있는 17세 연상 유부남 스승과의 결혼 결심은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쉬광핑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 루쉰은 쉬광핑을 위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거나 서류 정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쉬광핑은 거리낌이 없었다. 루쉰 역시 봉건예교의 한 희생자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합법이라고 해도 좋고 불법이라고 해도 좋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겐 상관없는 일이고 당신네들에게도 관계없는 일이다. 요천대 펑쯔(風子, 루쉰을 상징함)는 나의 사랑이다.
-「펑쯔는 나의 사랑 / 쉬광핑 지음, 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쉬광핑(p.85)」
남들에게 첩이라는 도덕적 비난을 받는 것 외에도 쉬광핑에게 현실적 어려움은 많았다. 평생 타협하지 않은 혁명가의 자세를 유지한 루쉰에겐 논적(論敵)이 많았다. 루쉰은 국민당 정부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고 있었으며 백색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국민당이 고용한 저격수가 반대편 집에서 루쉰을 노리고 있기도 했다. 일상이 살얼음판이었다. 쉬광핑은 노쇠한 루쉰과 병약한 아들을 돌보고 새벽까지 글을 쓰는 루쉰의 뒷바라지를 하며 아내이자 비서이자 주부로 살았다. 루쉰이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많은 작업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시절 날카로운 시사평론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서던 그녀, 쉬광핑이 자신을 희생하고 루쉰을 묵묵히 뒷바라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비서 역할을 한 그녀의 재능 덕분에 루쉰은 그렇게 많은 양의 작업을 빨리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허광평에게 “10년 동안 손잡고 어려움을 함께 한 사이”라며 고마워했다.


아들 저우하이잉과 함께한 쉬광핑

쉬광핑은 사실은 직장 생활을 원했다. 그러나 루쉰은 글을 쓰는 자신을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반대했기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아마도 남편이지만 17세 연상이나 되는 존경하는 스승이기에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점도 있었고, 당시의 여성들이 받던 낮은 임금 탓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루쉰이 숱한 역경 속에서 때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 가면서 병약한 몸으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저술 작업에 몰두할 때 쉬광핑이 옆에서 그를 보필한 것이다. 쉬광핑은 원래 상하이에 처음 갔을 때 친구가 운영하는 부녀 잡지사에서 일할 생각이었지만, 루쉰이 자신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가내 모든 일을 전담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중략) 게다가 그는 글을 쓴 뒤 아내에게 읽혀 의견을 구한 뒤 수정 작업을 했으므로, 쉬광핑은 그의 글을 베껴 쓰고 교정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논평 작업까지 하는 조교 일을 병행해야 했다. 그러므로 쉬광핑이 몇 번 직업을 가질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루쉰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루쉰은 심지어 한 달 내내 나가서 고생스럽게 일하고 월급을 받아와 봐야 자기가 글 두 편 쓰면 벌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니 집에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까지 했다.-「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쉬광핑(p.136), 윤혜영 지음 / 서해문집」

십년간, 쉬광핑은 마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루쉰의 초고를 정서하면서, 루쉰 앞으로 배달된 비에 젖은 우편물을 다려서 갖다 주면서, 루쉰을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면서,,, 결혼 전에는 베이징의 대학에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노라를 예로 들어 여성의 자립과 사회생활을 강조하는 강연을 하던 루쉰이었다. 아무리 존경하는 스승이고 사랑하는 남편이라지만 강단에서와 집안에서의 말이 다른 남자와 살면서 쉬광핑은 과연 행복했을까? 이런 생활을 하려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유부남과 세상의 지탄을 받아가며 결혼했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
어머니께서 학생 시절에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된 다음부터, 어머니는 일체의 사회활동을 접고 원고 청탁도 거절하면서 친구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현모양처이자 가정주부로 지냈다.
-「나의 아버지 루쉰(p.308), 저우하이잉 지음 / 강」

루쉰 사후 중국 최고위급 인사가 된 쉬광핑

이 시절, 쉬광핑은 베이징에 간 루쉰에게 보내는 편지 외에 다른 글은 전혀 쓰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쉬광핑은 그저 루쉰의 아내, 평범한 현모양처 가정주부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1936년, 루쉰 사후 그녀는 더 이상 가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루쉰 생전의 작품들을 모아 전집을 출간하는 작업을 총지휘하는 한편, 집필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시사평론이 말 그대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쉬광핑은 공산당이 상하이에서 국민당 정부 몰래 펴내던 여성 잡지 <상해부녀>를 편집하고 각종 여성 단체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여성해방과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대부분의 글은 주부의 직장 생활과 사회 참여가 주제였다. 쉬광핑은 ‘여성이 가정에서 일하는 것은 남편의 죄수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그녀는 10년간의 내조와 희생의 삶에서 속으로 조용히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한편, 10년간이나 절필했는데도 아무 거리낌없이 시사평론을 발표하며 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낸다는 점에서 그녀의 지적 능력과 필력을 엿볼 수 있다. 아마 그녀는 루쉰의 초고를 읽으며 혼자 수없이 자신의 재능이 녹슬지 않도록 단련하지 않았을까?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아가며 말이다.

이후 쉬광핑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들어오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벌어진 격동의 시대를 살게 된다. 국민당의 현모양처 운운하는 여성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상하이 여성계에서 활동하던 쉬광핑은 1941년, 반일 문인들을 색출해내려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76일간의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후, 쉬광핑의 글은 공산 혁명에 동참함으로써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의 논조가 확연히 바뀌게 되었다. 여성해방보다 항일과 구국이 먼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쉬광핑은 국공 내전에 져서 패주하며 정치보복을 일삼는 국민당을 피해 아들 저우하이잉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 홍콩을 거쳐 탈출한다. 베이징으로 간 그는 중앙 정부와 여성계에서 최고위급 인사로 활동한다. 1950년대의 쉬광핑은 신중국 건설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며 당과 마오쩌둥을 예찬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루쉰 기념 사업을 벌이는 등 사회에서 맹활약을 한다. 1967년, 문화혁명 때 루쉰의 원고를 압수해간 홍위병에 항의하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70세였다.


1956년 루쉰 이장 당시의 쉬광핑(왼쪽)과 쑹칭링(오른쪽, 쑨원의 부인 송경령)

돌이켜보면 쉬광핑은 청 왕조에 반대하는 반봉건 혁명과 공화국을 세우기위한 공화혁명, 반일 투쟁과 공산혁명, 여성해방운동을 골고루 다 겪으면서 새로운 역사를 목격하고 써 나간 행동하는 지식인 여성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과 업적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1998년에 <허광핑 문집>이 출간된 다음부터야 그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쉬광핑은 사후에도 루쉰의 후광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쉬광핑이 루쉰의 명성 덕분에 상하이 여성계와 중국 중앙 정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활약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루쉰 사후, 루쉰 추모 사업만을 해 나간 ‘미망인’이 아니었다. 쉬광핑은 루쉰 사후 30여년간 루쉰과 상관없는 자신의 독자적 정견을 보이고 여성해방론을 주장했다. 어떻게 보면 루쉰 사업을 위해 루쉰의 후광으로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루쉰의 명성을 이용했다는 생각도 든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거리를 두면서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중국의 현실만을 비판한 루쉰과 달리 쉬광핑은 ‘루쉰이라면 당연히 이랬을 것’이라는 자의적 해석을 하며 자신의 정치 발언에 스스로 루쉰의 권위를 실었기 때문이다.


루쉰기념관 : 상하이 루쉰공원의 루쉰기념관 입구 모습.

쉬광핑은 공산당 지도하에 여성계를 종속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난 이 글에서 그녀의 공과를 논할 생각은 없다. 쉬광핑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이니 곧 좋은 논문들이 많이 나오리라 생각한다. 평범한 여성인 내가 궁금한 것은 상하이 시기, 루쉰의 만년 10년간을 내조하던 쉬광핑의 마음이다. ‘무능한 남자는 9주(九州, 중국 지역 전체를 가리킴)를 돌아다닐 수 있지만 유능한 여자는 부뚜막 근처에 머물 뿐이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과연 루쉰을 내조하며 부뚜막에 있던 유능한 여자 쉬광핑은 이 속담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는 마음과 마음이 통해 인류를 위해 일하기 위해 손 잡고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부끄러울 데가 없고 사람들에게 미안할 일 없이 당당하다.
-「루쉰 사후 다음 해 발표한 시 <사랑을 위하여> 쉬광핑 지음, <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쉬광핑> (p.130)」
쉬광핑은 혁명에도 사랑에도 열정적이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루쉰 사후 재혼하지 않고 금욕적으로 당을 위해 헌신하며 루쉰 사업에만 힘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회고록을 통해 루쉰과 자신의 정신적 연대와 사랑을 강조했다. 단순한 남녀 관계가 아니라 인류에 공헌하는 전사 동지로 루쉰과 자신을 정의내렸다. 이는 단순히 루쉰에 대한 쉬광핑의 변함없는 애정과 존경 표현일까? 아마 쉬광핑에게 그만큼 ‘잃어버린 10년’의 상처가 컸다는 반증이 아닐까? 지난 10년간의 자신의 희생이 그만큼 가치있는 것이었노라고, 그만큼 위대한 남자를 내가 사랑했노라고 세상보다 자기 스스로에게 먼저 이해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서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똑똑한 여자들이 대개 그러듯이 말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스스로 선택해서 봉건적 예교에 맞서 어려운 결혼을 했건만, 그녀를 묶어 놓은 것은 전족도 봉건적 남성도 아닌 바로 사랑하는 자신의 남자였다. 나는 궁금하다. ‘밖에 나가 일해 봐야 얼마 못 버니 집에서 나를 도와라’라고 존경하는 스승님이 ‘노라’를 이야기하던 그 입으로 말하는 그 순간의 그 환멸감을 쉬광핑은 어떻게 견뎠을까? 루쉰의 초고를 정서하면서, 남의 글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올라서 과연 쉬광핑은 어떻게 참았을까?


광저우 도서관 앞의 루쉰과 쉬광핑 동상.

그러므로 내 친구 셀린느에게, 세상의 모든 셀린느에게, 나를 포함한 셀린느에게 나는 말한다. 쉬광핑, 이 언니를 보라.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이 다른 이 아닌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임을 느낄 때 절망하지 말고, 쉬광핑, 이 언니를 보라.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자신을 정당히 이해받지 못해 지쳐 갈 때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쉬광핑, 이 언니를 보라. 여러 겹의 혁명을 겪어내고 끝내 자신의 목소리를 낸 쉬광핑, 이 언니의 삶을 보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지 않을 때, 십 년 후든 백 년 후든, 언제든 우리는 세상에 자신을 내 보일 수 있다.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으며 언젠가는 현실에 대해 내 목소리로 발언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현실 속 셀린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혁명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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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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