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소설이 거짓말의 대명사가 되었나” - 황석영
『여울물 소리』를 통해서 여향의 미학을 펼치고 싶다 글 쓰는 재간에 대해 신비화 하지 말라 고전, 본격 문학을 읽으면서 자기를 되돌아 보아라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 모른다. 황석영이 ‘이야기꾼’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된 것은. 등단 50주년을 맞아 황석영이 꺼내든 소재는 이야기꾼, 바로 자신과 닮아 있는 주인공 ‘이신통’에 대한 이야기다. 황석영은 『여울물 소리』를 두고 “내 후기문학 중 가장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라며 “이 소설을 통해 여향(餘香)의 미학을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삶이 투영된다. 자신의 경험을 녹이고 색깔을 입혀 주인공을 만들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시대가 다르고 표현이 달라도 작가가 창조한 인물은 어떤 면에서 ‘작가의 아바타’가 된다. 독자들은 작가에게 늘 궁금하다.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 속에 작가가 얼만큼 닿아 있는지. 황석영은 말한다. “작품은 작가에게 분신과 같다”고. 많은 이들이 『여울물 소리』를 두고 황석영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황석영에겐 그 어떤 소설도 ‘자전적 작품’이 아닌 적이 없었다.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문학을 만드는 사람의 인생은 어떠하랴. 대한민국 문단을 이야기할 때, 황석영을 논하지 않으면 매우 지루할 것이다. 한국 근대사를 온 몸으로 경험한 이야기꾼 황석영은 어린 시절부터 작가를 꿈 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피난 갔던 이야기를 쓴 작문이 전국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고, 고등학생 재학 당시,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월남, 한국전쟁, 베트남전, 방북, 투옥을 겪으며 현실주의 중단편 『객지』, 『삼포 가는 길』 등을 발표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등 장편소설을 주로 집필했다. 그리고 등단 50주년을 맞은 지금, 그의 신작이 나오면 독자들은 무의식적으로 황석영의 작품을 손에 든다. 1974년 『장길산』을 무려 10년간 신문 연재한 그의 근성은 최근 『여울물 소리』를 비롯해, 『강남몽』, 『개밥바라기별』, 『바리데기』 등을 꾸준히 집필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남다른 인생을 살았기에 작가 황석영은 풀어놓을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아직도 품에서 꺼내 놓지 못한 소재들이 서로 먼저 나오겠다고 아우성이다. 문학을 좋아해서 인생이 꼬일 대로 꼬였지만(?), 황석영은 쓸 거리가 많은 부자 작가가 됐다. 등단 50주년이면 자서전을 써도 민망하지 않을 때지만, 황석영은 자전적 소설을 들고 독자들을 찾았다. 그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위로하는 소설, 사람을 위로하는 여울물 소리
등단 50주년을 기념하여 낸 작품이 『여울물 소리』다. 평론가들이 황석영 문학을 볼 때, 보통 방북 전과 이후를 두고 평가하는데, 『여울물 소리』는 어떤 흐름 속에 집필한 소설인가.
내 작품을 전기문학과 후기문학으로 나눈다면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장길산』, 『무기의 그늘』이 전기라고 볼 수 있는데, 리얼리즘의 원칙들을 지켜나가면서 현실과 치열하게 맞섰다. 망명 후 투옥 이후의 후기 소설은 과거의 한정된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자기확장을 통해 세계 보편적 현실을 담아 새로운 산문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오래된 정원』이 산문을 해체하고 고백체, 내지 내면소설로 인칭과 인칭을 넘나든 소설인데, 이것이 시작이었다. 연이어서 『심청』, 『손님』, 『바리데기』 등이 그 궤를 같이 하고, 『여울물 소리』는 후기 작품 중 가장 정점을 이루는 소설이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이제부터는 만년문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울물 소리』는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기 전, 방점을 찍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여향의 미학을 펼치고 싶다.
이야기꾼을 소재로 사용한 것은 황석영을 투영한 것인가.
올해로 칠순을 맞았다. 자서전이나 자전적 작품을 쓰는 것 보다는 작가 일생을 19세기라는 배경에 갖다 놓고 이야기해본다면, 나에게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초창기에는 남성적인 작품을 주로 쓰다가 후기로 가면서 화자가 여성인 작품을 집필했다. 『여울물 소리』도 여성 연옥이 화자로 등장하는데, 어떤 연유인가.
과거 20세기 전에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고 억압을 주는 세계였다면, 이제 여성들의 역할이 바뀌어가고 있다. 여성이 화자로 등장하는 것은 남성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서다. 우리 시대가 포스트모던 시대로 들어온 것 같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아직 근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신통은 장길산처럼 영웅도 아니고 특출한 권력이나 힘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연옥의 해설을 통해 신통의 삶을 추적하는 것은 이신통의 여러 편모를 보기 위해서다. 『여울물 소리』는 과거 『장길산』과 다르게 역사가 전면으로 등장하지 않고 배경으로 등장한다. 동학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다루지만 작은 에피소드로 처리하고, 전면에는 주인공의 자잘한 일상들을 그렸다. 시대를 배경으로 입히면 주인공의 삶이 이해될 수 있다.
이야기꾼의 일생을 담은 소설의 제목을 『여울물 소리』로 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소설에서 연옥이 잠결에 여울물 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산사에서 여울물 소리를 종종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물소리라는 것이 보통 때는 잘 안 들린다. 하지만 정적이 흐를 때, 멀리서 들리는 소리인데도 갑자기 생생하게 들릴 때가 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재깔재깔 웃는 것 같고, 또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독자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렵고 고단한 세월 속에서 흐르는 물처럼 무심하게 살더라.” 물소리가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했다.
『개밥바라기별』과 같이 『여울물 소리』도 인터넷으로 연재한 작품이다. 연재를 하면서 쓰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의 차이가 있나.
거의 다르지 않다. 연재에 맞게 소설을 바꾼 적이 없다. 『손님』이나 『바리데기』는 앞뒤로 들락날락하고 판타지가 나왔다가 현실이 나왔다 하니까 어떤 면에서 어려운 소설이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데, 독자들이 제법 잘 따라와 몰아서 읽기도 하고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연재하는 것과 그냥 전작으로 쓰는 거랑 차이를 두지 않는다.
『여울물 소리』를 읽어보면 대하소설로 써도 될 법한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리즈로 집필한 생각은 없었나.
대하소설은 19세기 매체다. 다른 매체나 미디어가 없고 생활의 오락이 많지 않았을 때의 양식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1970년대 경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신문이나 잡지에 대하소설을 연재하는 것이 추세였다.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썼고 그 다음에 내가 『장길산』, 그 다음에 김주영의 『객주』, 최명희의 『혼불』,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이어졌다. 대하소설은 서구에서는 이미 없어진 양식이다. 점점 소설이 짧아진다. 이제 경단편이라고 해서 1천 매 이내의 소설이 나오고, 심지어 중편이라고 했던 400,500매도 장편으로 치는 추세다. 지금은 일상이 복잡하고 할 일도 많고 다른 매체도 많기 때문에 굳이 책만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미디어가 전자화가 되면서 소설의 양식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묘사적 양식보다는 장면에서 장면으로 전환되는 마치 영상적인 흐름이 주가 될 것이다. 시나리오를 보면 문장 한 줄, 대사 한 줄에 장면이 훅 가버린다. 그런 식의 압축된 소설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생겨나나,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사라지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만든 이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들이 당대를 어떻게 살아냈으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들이 남긴 수백 종의 언패 소설과 판소리 대본과 민담, 민요 등등은 눈보라 속을 걷는 나에게 먼저 간 이가 남긴 발자취와도 같았다. 이들과 단절되어 제국주의의 침입과 함께 이식문화로 시작된 한국 근현대문학의 원류를 더듬어 이제 울창한 우리네 서사의 숲에 들어선 느낌이다.”
요즘 청년들을 위로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베스트셀러도 에세이가 주를 이루는 추세인데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사람들이 몇 줄의 이야기에서 위안을 받고, 자기가 혼자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책에 나오는 문장에 의미를 부여해 용기를 얻는 것 같다. 대한민국이 한 때 세계 7위의 출판대국이었는데 지금은 부진해서 몇 위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대형서점에 가면 인문서적의 반이 자기계발서이고, 학습서만 잔뜩 쌓여 있다. 사람들이 지쳐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걸로 풀 게 아니라 본격적인 고전이나 문학을 통해 자기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눈 앞에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좋고 위안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근시안적인 독서만 한다면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된다. 결국에는 동상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작가로서 걱정스러운 마음과 함께 서운한 감정도 들겠다.
에세이 같은 책을 즐겨 읽다가 본격적인 문학으로 오면 좋은데, 다만 섭섭한 것은 언제부턴가 소설이 거짓말의 대명사가 됐다는 거다. 요즘 툭 하면 하는 이야기가 “소설 쓰지마”, 거짓말 하지 말라는 소리다. 그것도 정치인들이 제일 많이 한다. 어느 나라도 문학을 사회 교양의 주축으로 보고 굉장히 존중하는데, 우리나라는 소설을 거짓말의 대명사라며, 그것도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폭언을 한다. 답답하다.
지금 이 시대의 독서 문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가장 안타까운 건 가벼운 책, 쉬운 책만 읽으려 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이면 플라톤, 공맹자면 공맹자, 어려워도 오리지널 즉 원본을 읽어서 스스로 양식화해야 자기 사고가 발전하는데, 지루하고 어렵다고 곁다리로 해설서나 축약판만 읽고 있다. 요새 경향이 가볍다고 무조건 따라가면 발전이 없다. 힘들어도 오리지널, 고전을 읽는 습관을 가져야 발전할 수 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작품을 쓰는 것에 대해 신비화를 경계해야 한다. 영감은 하늘에서 벼락처럼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일상적으로 책을 열심히 읽으며 차분차분 구축해 가는 것이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근육을 키우려면 가벼운 운동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근육이 붙는다는 이야기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다. 글 쓰는 재간에 대한 신비화는 좋지 않다. 심지어 문학을 잊고 열심히 살다 보면, 성숙화된 문학이 어느 순간 네 등을 두드릴 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나 아직 어디 가지 않았다’고 문학이 네게 말을 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작가가 되면 좋을까.
신춘문예 심사를 해보면, 이런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대개 보면 10여 년 동안 보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무난한 작품이 올라온다. 구성의 방법, 인물의 설정 이런 것들이 대개 비슷비슷하다. 정말 흠 잡을 수없이 무난하다. 아쉬운 건 조금 서투르다 해도 기발한, 눈에 번쩍 뜨는, ‘어떻게 이런 시각으로 다뤘지?’ 하는 것들이 드물다는 거다. 작가는 작법, 문장력 보다 중요한 것이 창의적으로 이야깃거리를 잡아채는 관점을 갖는 게 중요하다. 누구나 동시대 속에 섞여 살면서 많은 상황이나 조건을 겪는데, 작가는 그 속에서 이야깃거리를 잡아채는 사람이다. ‘어떤 것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냐’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작가다.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
작가가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 같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 인간을 보는 눈이 생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관이다. 세계관을 자기 안에서 세워야 하는데, 연령이나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당대에 한 작가가 어떤 세계관 갖느냐에 따라 관점이 다양해질 수 있다. 문장 수련, 구성의 방법, 문체 이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작가적 관점이다. 이건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다. 직접 체험을 많이 하면서 그것이 자산이 될 수도 있고, 굳이 모험을 안 한다고 해도 취재를 통해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 작가라면 다양한 체험, 노력을 통해 자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뚜렷한 관점이 생길 수 있다.
90세까지 작품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작품세계는 어떻게 달라지나.
중단편을 쓰면서, 당대의 이 현실과 밀착해 작품을 다룰 것이다. 대한민국의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지금도 선거 때가 되면 이데올로기 문제가 나오고 근대의 상처가 드러난다. 앞으로도 현실의 모순을 더 파고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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