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에 대해 확신한 대륙의 합리론자들
중세의 철학은 신의 섭리를 이성으로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컴 등의 투철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의 섭리는 신의 의지일 뿐, 인간의 이성으로는 범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결국 그들은 신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신학으로부터 철학과 이성을 독립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지나친 신의 의지에 대한 강조는 쉽게 회의론으로 빠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신의 자의성 앞에 인간의 이성과 철학은 무력해져버리고, 그 어떤 성찰과 노력도 의미가 없게 되는 결론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존 철학의 중심이 붕괴되자 많은 회의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끝자락에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있었다.
데카르트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철저히 의심하고 회의했다. 그는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불안정함을 지적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꿈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심지어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수학적 결과나 현실에서의 믿음도 악마가 그렇게 믿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끝없는 의심과 의심의 결과,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시발점이 되어줄 것이라고. 그는 이를 방법적 회의(methodical doubt)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보통 줄여서 ‘코기토’라고 함)”이다. 이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풀어보면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그 자신의 생각을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자신이 지금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결국 의심하고 있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출발점을 찾은 것이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철학의 제1원리로 설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철학을 세우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명확한 사유를 추구하고자 했던 데카르트. 그는 명확한 사유의 전형을 수학에서 찾았다. 그리고 수학을 모범으로 해서 직관(ntuition)과 연역(deduction)이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데카르트는 종종 착각을 일으킬 수 있는 경험적 인식과 반대되는 것이 직관이라고 말하면서, 이 직관이라는 맑은 정신을 통해 명석판명한 지식이 제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명석판명이란 분명하기에 부정할 수 없고, 다른 지식들과도 명확히 구분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직관적 지식이야말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기에 증명이 필요 없는 공리(axiom)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마치 수학에서 삼각형의 변이 세 개라는 것과 같은 공리들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리들을 가지고 연역의 과정을 거쳐 구체적인 지식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공리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명확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연역하여 나온 결론 또한 명확한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직관에서 오는 생각들을 타고난 본유관념이라고 못 박았으며, 공리처럼 명백한 수학을 자연에 대입하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뉴턴이 만유인력을 생각해내고 정립하는 데 공헌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책으로 잘 알려진 『방법서설』은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서문 격으로 원래 함께 출간된 책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방법과 기계적 철학에 근거해서 우주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가 기하학 등을 통해 보여준 과학에 대한 수학적 해석들은 뉴턴 등의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원제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는 것은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심지어 뉴턴 역학의 제1법칙인 ‘관성의 법칙’은 데카르트가 가장 먼저 언급했다.
이후 데카르트의 합리적 전개에 감명을 받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직관적 이성에서 얻은 지식들을 더 철저하고 엄정하게 전개시켜 나갔다. 이는 원제목이 ‘기하학으로 증명된 윤리학’이었던 그의 주저 『윤리학(에티카)』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데, 신에 대한 인식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논하는 윤리학의 문제까지 정의 26, 공리 15, 요청 2, 정리 259 등으로 짜인 기하학같이 엄격한 전개는 합리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신의 실체를 공리들로부터 연역해 정립해 나감으로써, 신의 실체가 자연임을 보여주면서 신으로부터 완전 탈피한 이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철학적 직관을 거부한 영국의 경험론자들합리론이 인간 이성을 중시하며 직관으로부터 연역적 전개를 펼쳐나갔다면, 경험론은 반대로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고 귀납법을 앞세우며 중세 철학의 공허한 논쟁을 타파하려고 했다. 여기서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고 귀납법을 앞세운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 철학들은 이런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모두 불확실한 것, 본질이 아닌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므로 경험론의 첫 번째 숙제는 바로 우리가 보고 경험한 감각의 세계가 어떻게 명확한 지식으로 우리에게 자리 잡을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숙제를 맨 처름 떠안은 사람이 로크( John Locke)다.
로크는 먼저 기존의 철학자들이 너무나 당연시 받아들이면서 본유관념의 대표적 근거가 됐던 ‘A는 A이다’ 같은 논리적 원리들에 대해, 어린아이나 백치가 안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또한 그는 문명사회에서 이상한 것이 야만사회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경우도 많으며, 우리가 그토록 당연시하는 신을 섬기지 않는 사회도 얼마든지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이유들을 들어, 원래부터 타고났다는 본유관념이란 건 없다고 못 박았다. 결국 태어날 때 아무 관념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본래 백지와 같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렇다면 백지였던 인간의 마음속에 어떻게 관념이 생겨나는 것일까?
로크는 이런 경험들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이 먼저 감각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말한다. 인간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이 감각기관과 작용하면서 마음속에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때 대상에서 직접 나오는 자극이 단순 관념을 일으키며, 이러한 단순 관념들이 모이고 비교 종합됨으로써 복합적 관념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복합적 관념을 통해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며 통합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물의 수나 다양한 상태 등을 나타내는 ‘양태’와 신과 정신과 같은 ‘실체’ 문제, 사물을 비교하고 원인, 결과 등을 찾는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많은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그가 본유관념을 부정하며 멋지게 출발했지만, 그의 논거들 속에는 여전히 본유관념의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가 말한 관념들의 비교 종합 능력은 아무래도 본유관념적인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부 사물이 외부로부터 들어왔을 때, 결국 외부사물로부터 기인한 관념들의 조합이 어떤 근거로 정확한 사실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들이 부족했다. 결국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지식의 근거인 감각은 개연성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의 난제들은 이제 흄(David Hume)에게 넘겨지게 된다.
흄도 로크처럼 지각되는 것을 둘로 나누면서 시작했다. 그래서 감각처럼 생생한 것을 ‘인상’이라 했고, 이 인상이 재생되면서 희미해진 것을 ‘관념’이라고 했다. 그러나 로크와는 다르게 사랑, 미움, 갈망 등도 생생한 것으로 인상에 포함시켰다. 어쨌든 관념의 모든 원재료는 인상이 된다. 이에 흄은 어떤 관념이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인상이 반드시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합리론자들이 본유관념으로 생각하는 신조차 인상에서 나온 관념으로 취급했다. 신이란 우리 자신의 정신적 속성을 생각해보고, 그 속성의 선하고 현명한 면을 무제한 확장시켜 획득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관념들을 경험에 의해 제공되는 것들을 섞고, 그들의 위치를 바꾸는 인간의 정신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인상을 토대로 한 이 관념들은 흐릿한 것이지만, 상호간에 연합작용을 함으로써 다양한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합작용은 유사성, 시간과 공간의 인접성, 인과관계 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흄은 이것을 로크처럼 어떤 이성의 법칙으로 본 게 아니라, 오히려 오랜 습관에 의해 형성된 사고방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관념의 작용을 이처럼 습관, 즉 반복되는 경험으로 설명해냄으로써 최대한 본유관념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는 또한 지식을 ‘관념 상호 간의 관계’와 ‘사실’로 나누었다. 관념 상호 간의 관계는 관념과 관념의 관계가 내적 성찰 또는 반성을 통해 비교됨으로써 진의를 파악한다. 수학의 명제 등이 이에 속하는 것으로 논증적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험 세계에서의 ‘사실’에 대한 지식은 전혀 다른 것이다.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난다’는 명제는 보통은 맞는 것이지만,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 역시 꼭 틀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경험을 통해 불을 피울 때 연기가 나는 현상을 보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뿐이지, 연기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경험에 의한 사실의 세계는 필연성이 아니라 개연성(그러할 가능성이 많음)만을 갖게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특히 인과관계가 이러한 개연성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보기에 인과관계는 원인과 결과일 것만 같은 두 대상의 인상이 습관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마치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주관적 신념을 갖게 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스콜라 철학자들이나 합리론자들이 본유관념만큼이나 절대적으로 여겼던 인과관계 관념의 지위를 뒤흔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반복과 습관의 논리를 계속 밀고 나가 객관적 외부 세계와 자아까지도 부정확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고 해서, 우리가 없는 동안에도 그 물건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보증은 없다고 말했다. 단지 우리가 습관처럼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믿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아 또한 늘 우리 스스로의 여러 측면을 보며 자아가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상상의 다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명백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끝까지 의심하면서, 경험론 자체를 회의주의로 몰고 갔다.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인식이 시작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칸트,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하다인간은 경험에 의하지 않고도 이성의 힘으로 보편타당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합리론, 이를 충실히 따라가던 칸트에게 경험론 철학은 충격이었다. 특히 경험만이 인간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주장을 넘어 ‘인과관계’마저 부정해버린 흄을 만났을 때, 그의 철학 세계는 요동쳤다. 그래서 그는
“흄이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경험론자들을 완전히 동조한 것은 아니다. 경험론은 여전히 반드시 옳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해 회의적인 것이었고, 합리론이 주장한 이성의 명료함이나 본유관념 또한 그 가능성이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통해 이 두 철학의 통합을 시도한다.
칸트와 칸트 묘비.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해낸 칸트는
다음 책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윤리적 도덕 법칙을 구축해낸다. 묘비에 쓰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경탄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의 도덕률이다”라는 말은
그의 도덕 법칙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는 이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분석판단(分析判斷)과 종합판단(綜合判斷)이라는 두 가지 판단을 제시한다. 우선 분석판단은 주어가 이미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공은 둥글다’ 같은 명제로, 공이란 이미 ‘둥글다’라는 술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 주어의 속성을 분석하여 판단할 때 바로 답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분석판단은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기 위해 여러 공을 조사하러 다닐 필요가 없이, 논리적 관계만을 비교 판단하면 된다. 이는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선험적 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새로운 사실이나 새로운 지식을 추가할 수가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종합판단은 ‘공이 노랗다’와 같은 명제로, 문장의 주어와 술어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그 진위를 알 수 없고, 그 사실 여부를 경험 세계에서 확인해야만 하는 판단을 말한다. 이는 경험을 통해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경험론자들에게 부합되는 원리로 많은 사실들을 다룰 수가 있다. 하지만 보편타당한 지식을 획득할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보편타당한 지식을 경험을 통해 얻으려면 모든 경험을 빠뜨리지 않고 수집해서 일반화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칸트는 합리론처럼 선험적이면서도, 경험론처럼 종합판단적인 지식을 찾아 나섰다. 선험적 종합판단이 성립한다면, 선험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일 것이며, 종합판단이기 때문에 지식을 계속적으로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확실한 지식의 예로 ‘7 5=12’라는 수학적 명제를 들고, 이를 선험적 종합적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주어인 ‘7 5’는 술어인 ‘=12’를 개념적으로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종합판단적이며, 주부와 술부의 결합이 경험에 의존하여 파악되기보다 순수한 직관에 의해서 인식되기 때문에 선험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이제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에도 그것이 가능한지를 추적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이 추적 작업을 시작하면서 과거 인식에 대한 탐구들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보게 된다. 그동안 합리론자와 경험론자 모두, 외부 사물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듯 그 사물을 본뜬 모습을 마음속에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과거 모든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모든 철학자들이 외부 사물에 대해 정신은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 마음이 단순히 외부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활동에 의해 외부 세계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음에 어떤 모양의 그릇이 있어 외부 사물과 경험들이 그 그릇에 담기며 그릇의 모양에 따라 형체가 정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인식 형식이 있고, 인식의 재료가 되는 경험들은 이 주관적인 인식 형식과 결합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식과 경험은 일치를 이루고, 그만큼 명료하고 객관적인 지식이 보장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전혀 새로운 관점은 결국 고대로부터 시작된 철학의 전형적 인식을 뒤집고 새로운 인식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훨씬 견고하고 정밀한 발판이었으며, 철학사적으로 가장 큰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었다. 그의 명성은 바로 이런 거대한 전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본래부터 있는 인식의 형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는 우선 외부 사물을 감각이 받아들일 때, 단순히 그 감각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으로 그 내용을 정리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든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주관이 작동함으로써 사물의 경험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렇게 얻어진 개념은 우리가 사고할 때, 다음과 같이 미리 짜여 있는 사고의 틀에 의해 적용되고 사유된다고 한다. 그 사고의 틀은 양에 관하여서는 단일성ㆍ다수성ㆍ전체성으로, 성질에 관하여서는 실재성ㆍ부정성ㆍ제한성으로, 관계에 관하여서는 실체성ㆍ인과성ㆍ상호성으로, 양상에 관하여서는 가능성ㆍ현실성ㆍ필연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칸트는 이를 ‘범주’라고 이름 지었다.
그에 따르면 이렇듯 인식이란 감각의 시간적ㆍ공간적 종합을 다시 12범주에 의하여 통일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렇게 다양한 경험이 우리의 선험적인 형식들과 결합됨으로써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자연과학이 성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연과학에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선험적 종합판단은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해낼 수 있는 것인가?
칸트의 냉정한 이성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대상과 세계는 인식의 형식에 맞추어 감각 내용을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실재 대상이나 세계와는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즉 우리는 우리 인식 형식에 걸러지는 것만을 보고 인식할 수 있으며, 그 거름망 바깥에 실재 대상과 세계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물자체(物自體)라고 불렀으며, 모든 감각과 현상의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근대를 완성한 헤겔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칸트에게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칸트가 인식 형식과 경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세계 이외에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즉 실제 사물 자체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물자체의 세계는 파악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물자체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들과 물자체가 분리되어버린 이 인식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헤겔도 그중 하나였으며, 그는 인간의 정신이 실체에 도달할 수 없다고 결코 믿고 싶지 않았다.
특히 칸트의 후배 세대는 칸트가 주장한 의식의 형식이 고정되어 있다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의식 형식이 칸트가 말한 대로 12개 범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심지어 자신의 윤리적 영역으로도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헤겔 역시 세계를 보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의식의 형식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헤겔은 우리가 그 의식 형식을 택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더 역동적인 철학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의식 형식이 우리가 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우리의 의식 형식이 진화하며, 그 발전선상에서 주어진 의식 형식만큼 우리가 세계를 보고 해석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런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정ㆍ반ㆍ합으로 알려진, 그의 유명한 변증법을 의식의 발전단계에 접목시켜나갔다.
즉 어떤 이론이 정립되면, 그것은 다시 부정되는 부분들이나 이론이 생겨나 대립된다. 하지만 이것들은 서로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의 장점들이 살아나고 더욱 드러나면서 이후에 새로운 종합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종합은 새로운 차원의 발전된 정립이 되는 것이고, 이 정립은 다시 변증법을 시작함으로써 계속하여 발전해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 변증법을 세계와 인간의 의식에 적용했다. 이제 ‘감각적 확신’에서 시작된 인간의 인식이 세계를 인식하면서, 세계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드러난 세계가 인식을 더욱 키우고, 더 커진 인간의 인식은 과학적 인식으로까지 발전한다. 과학적 인식으로 바라본 세계는 더 많은 지식을 우리에게 던져줌으로써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의 인식을 갖게 된다. 이 높아진 인식은 노동을 통해 사회까지 변화시켜 나가며 최후에는 절대정신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변화된 사회를 헤겔은 당시의 국가, 즉 프로이센으로 보았으며, 절대정신이 구가되었을 때 세계는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걸어다니는 세계정신, 나폴레옹.
헤겔은 멀리서 나폴레옹을 보고 “나는 걸어다니는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말했다.
역사를 정신의 구현으로 보는 그에게 나폴레옹 또한
세계정신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인물로 여겨진 것이다.이렇게 해서 그는 의식이 어떻게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는지를 펼쳐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역사와 당시 일어나고 있던 사회 변화까지 설명해냈다. 여기에 그는 법과 논리학까지 많은 것들을 아울러 설명해냄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이루면서 독일관념론을 완성시켰다는 영예를 안게 된다. 이것이 그를 근대 철학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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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주현성 저 | 더좋은책
인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초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한데, 그동안의 많은 교양 입문서는 대부분 한 분야의 지식에만 치우치거나, 단순한 용어 설명과 흥밋거리만을 나열하기에 바빴다. 이런 고충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에는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 이슈 등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인문 교양의 핵심 주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인문 지식들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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