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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상태로 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범죄학자

안락의자 탐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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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 중에서 ‘안락의자 탐정’물이란 것이 있다. 사건 현장에는 가보지도 않고, 누군가 전해준 정보와 단서들만으로 추리를 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추리소설이다. 바르네스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 시리즈와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추리 소설 중에서 ‘안락의자 탐정’물이란 것이 있다. 사건 현장에는 가보지도 않고, 누군가 전해준 정보와 단서들만으로 추리를 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추리소설이다. 바르네스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 시리즈와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구석의 노인』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늘 카페의 구석에 앉아 노끈으로 매듭을 맺고 풀던 노인이 사건을 해결해 주는 이야기다. ‘네로 울프’ 시리즈의 주인공은 체중이 140Kg에 달하고, 미식을 좋아하며 게으른 탐정 네로 울프다. 그가 현장에 가지 않는 이유는 단지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수인 아치 굿윈을 보내서 얻은 정보만으로도 자신의 추리가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단지 안락의자에 앉아 먹어대기만 해도, 논리적인 추리력이 탁월하기에 네로 울프는 명탐정이다.

하지만 안락의자 탐정은 현대 미스터리의 주인공으로 쓰이기에는 난점이 많다. 일단 현장에 가지 않는다면 액션이 생길 수가 없다. 러브 라인을 그리는 것도 어렵다. 본격 추리라면 안락의자 탐정이 오히려 유용하겠지만,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는 영 심심할 것이다. 그런데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는 안락의자 탐정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하면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스릴러다. 전신마비가 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링컨 라임, 그를 대신하여 현장을 누비는 여자 경관 아멜리아 색스. 1997년 『본 컬렉터』가 나온 후 『코핀 댄서』 『곤충소년』 『돌원숭이』 『사라진 마술사』 『12번째 카드』 『콜드 문』 등 ‘링컨 라임’ 시리즈는 나오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링컨라임시리즈-01 본 컬렉터 

제프리 디버 저/유소영 역 
2009년 08월 21일
랜덤하우스코리아
『본 컬렉터』는 침대 위의 셜록 홈즈 링컨 라임과 뼈를 숭배하는 연쇄살인마 ‘본 컬렉터’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범인이 흘리고 간 먼지 등의 미세한 증거들을 조사하며 단서를 잡아나가는 최첨단 법과학 수사, ‘독자의 허를 찌르는 반전의 명수’라는 평가답게 최후의 최후까지 ‘본 컬렉터’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링컨 라임은 뉴욕시경 과학수사팀의 수장이자 최고의 범죄학자였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 왼손 약지와 목 위 근육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엄청난 고통을 요하는 재활훈련과 수술을 거치고도 그에게 남은 육체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렉스 울프처럼 게을러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도 수사에 참여하는 것이 경탄스럽다. 게다가 링컨 라임은 천재적인 직감과 논리를 지니고 있지만, 철저하게 증거에 기초한 과학수사를 선호한다. 그는 당장이라도 거리에 나가 범죄 현장을 샅샅이 수색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현장의 기운을 느끼면서, 다른 사람이 찾아내지 못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찾아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을 뿐이다. 어느 날, 사건이 생긴다. 택시에 탄 남녀가 납치를 당하고, 다음 날 아침 살점이 모두 발라진 채 뼈만 남은 남자의 손이 발견된다. 여자의 행방은 알 수 없고, 범인이 의도적으로 남긴 증거물들이 있다. 경찰은 과학수사팀을 지휘했던 링컨 라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현장에서 뼈를 발견했던 색스가 보조역으로 차출된다.


생각해보면 ‘링컨 라임’ 시리즈는 무척이나 우울하다. 사건 수사를 지휘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다. 침대에 누워 타인의 시중을 받으면서, 날고 기는 범인을 잡아야 한다니. 하지만 그런 모순, 그 절대적인 열세가 ‘링컨 라임’ 시리즈를 스릴 넘치게 만드는 요소다. 제프리 디버가 전신마비의 주인공을 생각한 이유 하나는 악당의 공격에 전혀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찰의 신분을 유지한다 해도, 흉악범과 지능범들과 대적하다보면 직접 맞닥뜨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겁을 준다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와 능력을 과신하며 과감하게 경찰과 정부조직에 대항하는 범죄자들이다. 『본 컬렉터』에서도 그렇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링컨 라임이, 교활하고 잔인한 악당과 1 대 1로 맞선다. 그 순간 라임은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 그것이 바로 ‘링컨 라임’ 시리즈의 매력 하나다.

‘링컨 라임’ 시리즈의 또 다른 매력은 라임과 색스의 전도된 관계다. 남자는 오로지 머리로만 사고하고 명령을 내린다. 여자는 발로 뛰면서 범죄자와 대면한다. 상사와 부하의 관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라임과 색스의 관계는 명실상부한 파트너다. 어느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함께 있을 때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온다. 라임에게는 어떤 선입견과 편견 없이 현장을 볼 사람이 필요하다. 라임의 말을 듣고, 그의 판단을 투명하게 반영하여 움직일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색스는 단지 라임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다. 라임은 이성적인 인물이고, 동시에 움직일 수 없는 존재다.

영화 <본 컬렉터>포스터
2000 .01 .01
색스는 라임의 이성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움직일 뿐 아니라 재해석하여 스스로 행동한다. 라임의 이성은, 색스의 직관적인 행동을 통해서 구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이름을 하필 ‘색스’로 지은 것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미묘하게 러브 라인도 펼쳐진다. 그들의 파트너쉽은 단지 라임의 이성과 색스의 행동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화학적 혹은 연금술적 결혼인 것이다. 게다가 『본 컬렉터』가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라임 역은 덴젤 워싱턴, 색스 역은 안젤리나 졸리가 맡았다. 단지 한 편뿐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링컨 라임’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잡지 기자로 일했고, 다시 법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일하다가 마흔 살이 넘어 작가로 데뷔한 제프리 디버는 독자와의 싸움에 대단히 능한 작가다. 특히 반전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써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보니 지나치게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런 전략은 주효해서, 제프리 디버는 지금 가장 잘 팔리는 스릴러 작가의 하나다. 또한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첨단 법의학은 물론 과학 수사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을 풍부하고 자세하게 그리는 제프리 디버는 단독작품인 『블루 노웨어』 『소녀의 무덤』 『엣지』 등에서도 매 작품마다 새롭고 다양한 정보를 세련되게 전개한다. 기자의 폭넓은 정보력과 변호사의 집요한 논리로 무장된 디버의 이력이 돋보이는 구석이다.


매력적인 인물의 창조라는 점에서도 디버의 실력은 출중하다. 셜록 홈즈를 연상하며 만들어낸 링컨 라임은 사건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논리적인 추리나 집요함 그리고 괴팍한 성격이 꽤 유사하다. 비슷한 점 또 하나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하지만 이유는 다르다. 셜록 홈즈의 허무주의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갈증과 회의 때문이었다. 모든 사건들을 해결할 수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범죄와 악. 그리고 세상의 불가해성. 모리아티라는 호적수가 없어도, 세상은 이미 충분히 악하다. 그런데 왜 세상은 그것을 내버려두는 것일까. 이렇게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홈즈는 천재적이고 오만하다. 라임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후천적으로 엄청난 재난이 닥친다. 그가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과 절망이.

링컨 라임은 지금까지 네 명의 의사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라임은 ‘좋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하겠다’고 마음먹고 먹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도록 몸을 쇠약하게 하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극심한 위경련이 찾아왔고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라임을 괴롭혔다.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방법을 포기하고 몸 둘 곳이 없을 만큼 어색한 대화 도중에 톰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젊은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그가 그만한 감정을 내보인 일은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곁에서 라임이 죽는 것을 볼 수는 있다, 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자기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고 했다.



『본 컬렉터』에서 사건을 맡았을 때에도, 라임은 자신의 안락사를 도와줄 의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사건이 거듭되면서 차츰 그런 갈망에서 벗어난다. 그 고통을 모두 이겨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받아들일 수는 있게 되었으니까. 자신이 이런 핸디캡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범죄자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살아간다는 게 그렇다. 고통과 절망이 닥친다 해도, 갈 수밖에 없다. 라임이 한탄한다면 누구나 들을 것이다. 누구나 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를 동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누구도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없고, 삶의 당위성을 일깨울 수 없다. 그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자신의 핸디캡이 무엇인지,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나서, 그것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겨내거나 떨쳐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결국은 세상을 살아가는 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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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 소녀의 무덤 <제프리 디버> 저/<최필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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