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또 이런 일 나올 것, 아동문학 지켜봐 달라”
2000년 출간된
『마당을 나온 암탉』이 올해 100만부를 돌파했다. 아동문학으로는 이례적인 기록이라며 여기저기서 상찬이 쏟아진다. 좋은 콘텐츠를 독자들이 알아봤다는 데에서 분명히 의미 있는 기록이다. 또 연극, 에니메이션 그림책, 올해는 영화까지 만들어져 개봉했다. 모두가
“원작이 좋아서”라고 입을 모은다.
황선미 작가는 이런 반응에 그저 침착하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100만부 됐다는 게 가시화 되고 나서, 거의 모든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예상했냐, 소감이 어떠냐 묻는데 정말 특별한 소감이 없었다. 모르는 분들은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처럼 놀라지만, 10년, 그리고 그 이전부터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내온 나로서는 뜻밖의 일이 아니라는 거다. 그 전과 이후에 달라진 게 있다면, 괜히 바빠진 것 정도겠지.(웃음)”그녀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동 문학 역사로 보자면, 우리는 이제 자리를 잡은 시점이다. 내가 운이 좋아서 선두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곧 이런 기록을 가진 아동문학이 계속 나올 거다. 별로 주목 받지 않았던 장르 속에서 이런 일을 이룬 통쾌함은 있다. 아동문학이라는 변방에서 이룬 조용한 성과라는 게 기분이 좋고, 조만간 또 이런 일이 있을 테니 지켜봐 달라.”출판사에서는 100만부 돌파를 기념해 독자들을 대상으로 독후 대회를 열었다. 단순히 독서 감상문이 아닌, 책을 읽은 후의 감흥을 그림, 영상, 글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서 표현해보라는 것이다. 황선미 작가가 심사를 봤고, 시상식에 참석해 직접 시상도 했다.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 그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는구나 새삼 느꼈다. 새로운 경험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으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 있는 작품들이 나왔다.” 안정망을 버리고 ‘마당을 나온 암탉’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알을 품어 병아리의 탄생을 보고자 하는 암탉 잎싹의 이야기다. 양계장에서 주는 대로 먹고 알이나 쑥쑥 낳고 살면 편했으련만. 잎싹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안전한 마당을 뛰쳐나온다. 목숨을 노리는 족제비와 아름답지만 무방비한 자연 속에서 잎싹은 그토록 원하던 알을 품어내기도 하고, 자신도 몰랐던 바람들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안전망을 벗어나는 잎싹. 그의 달아남은 용기라기보다 간절함으로 다가온다. 알을 품고 싶다는 그 꿈으로 잎싹은 우연히 발견한 오리의 알도 제 알처럼 품어낸다. 위태로운 순간, 불안한 순간, 두려워지는 순간 등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쉽지 않은 감정들을, 황선미 작가는 동물들의 우화를 통해 친숙한 상황으로 전한다. 아름답고 쉬운 이야기만 건네지 않는다. 강자가 약자를 먹어야 살 수 있는 먹이사슬의 문제, 다른 종족끼리 이해하고 감싸는 문제, 만나고 헤어지는 문제 등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보여준다.
이 글을 쓰던 당시를 묻자 그녀는
“힘들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집에 환자가 있을 때여서, 다들 우울하고 정신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죽을 것만 같은데, 글 쓰는 일에 희열이 있어 괴리감이 있었다. 할 줄 아는 게 다른 것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걸 쓸 때에는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이나, 동화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엄밀하게 동화는 서사의 큰 힘 안에서 움직인다고 믿고, 소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라는 창을 빌리는 방법에 따른 것이다. ‘동화’라는 편견을 버리고 봤을 때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야기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어쩌다 서울에 올라오면 사람들이 날더러 ‘지방작가’라고 그랬다. 나중에 책이 나왔을 때, ‘지방작가’가 웬일이야, 하더라.” 『마당을 나온 암탉』의 성공이 작가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
“당시에는 작가들이 책이 나오면 사인해서 서로 나눠봤다. 책을 써서 돈을 벌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책을 내면 다시 찍는 경우가 없었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표』는 매달 재판을 찍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당을 나온 암탉』이 점차 입 소문이 나고 사람들이 토론하고, 『나쁜 어린이표』와 함께 읽으면서 나라는 작가를 보기 시작한 듯 했다. 95년 데뷔했고, 그때가 2000년이었다. 금방 발견된 건 아니지.(웃음)” “독자 마음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싶다”
황선미 작가는 동화라는 형식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라고 표현했다.
“동화는 제약이 많다. 자기가 하려는 이야기의 캐릭터에 맞는 단어를 쓰고, 문장길이도 생각하고 제약도 많다. 그렇지만 내 작품에 그런 뻔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어른 이야기다. 숨는 거다. 장난치고 익살부리듯 이런 것들이 동화니까 가능하다. 이런 능청을 가졌다는 것이 동화의 매력이다.”그녀가 글쓰기를 통해, 동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황선미 작가는 글쓰기를 항해로 비유했다.
“작품을 시작해서 나아간다는 것은 배를 타고 가는 것과 비슷하다. 가다 보면 고기를 잡는 곳이 있다. 거기서 닿을 내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깊은 데까지 내려가야 할지 모른다. 닻이 내려지는 지점이 사람의 깊은 곳을 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에 대해 탐구하는 표현이 없으면 이야기가 그런 지점에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껏 경험을 많이 들여다본다. 황선미 작가는 메모를 많이 한다. 이날에도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와 펜부터 꺼내놓았다.
“가만히 앉아있기엔 어색해서”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항상 메모할 준비를 해두는 것은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다.
“안 해본 건 생생하게 쓸 수 없다. 평소에 그날의 포인트를 적어둔다. 식구들과 싸운 걸 적기도 하고, 그날 생각한 여러 가지가 메모에 담긴다. 제목을 붙여서 오래 자료를 모은다. 관심 있는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최근에 관심사를 물으니 예상 외의 답변이 돌아온다.
“미국에서 우주 발사하는 일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인물은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녀야 한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동화를 썼다는 황선미 작가. 이제는 한국의 대표 동화작가로 꼽힐 만큼 인정 받고 있고, 서울예술대학에서 문예창작학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려령, 오채령 작가 등 주목 받는 젊은 작가들이 모두 그녀의 제자다. 각자의 삶이 한편의 이야기라지만, 그녀의 삶은 좀더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데뷔를 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그냥 엄마로 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로서는 인생의 다행스러운 기회였다. 살림이나 가사부담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뻔하게 살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이 시작된 거니까.” 엄마나 작가가 아닌, 황선미 교수로서의 모습은 어떤지 물었다.
“날더러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하더라. 내가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친절한 편인데. 나는 학생들의 결점만 가지고 얘기하지 않는다. 이걸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다 말해준다. 타고난 사람들은 그런 걸 알아듣는 귀가 빠르다. 태생적으로 듣고 보는 것을 자기화 하는 속도가 빠른 거지. 가능성 있는 친구들을 끌어주고 싶고, 싹이 있는데 어찌할 줄 모르는 친구들 보면 도와주고 싶다. 다만 작품에 있어서 만큼은 엄격한가 보다.”최근
『사라진 조각』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가족의 상처, 청소년 성폭행 등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이런 소재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 고민이 많지 않았을까? 황선미 작가는 되려 묻는다.
“이게 난감한 소재인가? 선정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화해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다.”
“글을 쓸 때 항상 품위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 인물답기를 바라는 거다. 캐릭터 마다 가져야 할 성품이 있다. 시정잡배 3류 인생은 그만한 품위가 있다. 사람마다 그릇, 성향이 있잖나. 이번 작품에서도 그 점에 주력을 했다. 더불어 내가 미스터리 구성을 좋아해서, 하나하나 조각 맞추기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상처라는 건 덮었을 때가 아니라 드러내서 화해했을 때 치유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없다. 다만 어떻게 치유해나가느냐가 중요하다. 그 부분에서 닻을 내리려고 했다. 결국 휴머니즘이다. 그 속에서 따뜻한 무엇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국내 동화, 그림책 파워라이터”
작년 말, 황선미 작가는 동아일보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동화 그림책 파워라이터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국내 어린이 출판사 10곳의 편집장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이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느끼는 아이들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 ‘청소년, 성인 독자까지 동화의 세계로 이끎’ ‘탄탄한 구성력과 앞서 가는 주제의식이 돋보임’ 등의 평가를 받았다. 그 얘기를 꺼내자 황선미 작가가 크게 웃는다.
“1위라고 문자가 와 있더라. 웃기고 있네, 남들이 욕해!(웃음)”
“해외 작가에 앤서니 브라운도 포함되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기분은 좋은 일이지만, 잘은 모르겠다. 내가 아직 글을 다 쓴 게 아니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파워’를 내고 싶다고 내지는 건 아니지만.(웃음) 책은 유기체더라. 자기 운명이 있다. 아무리 공들여도 나와서 안 풀리는 애도 있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반응이 좋은 게 있다. 작가는 작품을 써서 출판사 정하는 것까지만 힘을 쓸 수 있다. 책이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는 제 운명이 있다.” 아마 편집자들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도 위의 결과에 의의를 제기하진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함께 힘을 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고, 현재 아동문학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아까 말한 ‘닻을 내린 지점’이 독자들의 마음에 닿았을 때, 독자들이 책을 사고 좋아해주는 것 같다. 진심이랄까. 내가 생각했을 때 가슴 뜨거워지는 그런 것들이 독자들에게 가더라. 그런 점들이 황선미라는 작가 글이 읽어볼만 하더라, 얘기할 수 있게 만드는 점인 것 같다.”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이 7월 28일 날 개봉했다. 반응이 좋다. 원작이 갖고 있는 묵직한 감동, 문소리, 유승호, 박철민 등 배우들의 좋은 목소리 연기도 이야기 맛을 더했다는 평이다. 마치 입싹이 알을 까듯,
『마당을 나온 암탉』은 더 많은 독자와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영화 뿐 아니라 연극, 국악 등 다양한 공연을 했었다. 대부분 굉장히 훌륭한 무대였다. 아까 독후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은 『마당을 나온 암탉』을 그림자극으로 만들었다. 이런 독후 활동이 활성화 되었으면 좋겠다. 꼭 거창하게 영화나 독서 감상문이 아니라 초등학교 학생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독서 경험을 표현하고 나눌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이런 작업들이 긍정적인 것은, 아이들이라는 대상 연령층이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 만이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본다. 이 점은 분명 다른 작업자들에게도 모델이 되어 줄 것이다. 전문가들의 인정만이 아니라, 독자 층을 넓히는 것도 중요한 성공이고 확장이다.” 잎싹은 알을 낳는 것만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생각하지만, 초록이가 성장해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자기 안에 있었던, 또 다른 꿈을 발견한다. 이야기를 짓고, 작가가 된 후에 황선미 작가는 혹시 또 다른 꿈을 갖게 되진 않았을까?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지금의 꿈과 간절함 만으로도 몸이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다.
“작년 겨울부터 올해 내내 오른쪽이 아프다. 하필 오른쪽이 아픈 거다. 왜 고장이 났을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체력이 소진 돼서 그렇다면서 나를 놔보라고 하더라. 그게 안 된다. 어떻게 놓는 건지 모르겠다. 글을 쓰지 말아보자. 그랬더니 잠이 안 와요.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글을 쓰지 않으면 뭘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어요. 두렵더라고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미술, 음악 다른 것을 배우고, 좋아하려고 해도 결국 귀결점은 잘 쓰기 위한 것이 되요.” 덕분에 앞으로도 우리는 마음에 의미 있는 닻이 되어줄, 그녀의 소설들을 계속 만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