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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왕립 미술관, 브뤼셀 | |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처음 들어섰을 때에는 여러모로 당황스러웠습니다. 미술관이 표지판 하나 없는 의외의 장소에서 급작스럽게 ‘출현’했고, 때가 초여름이었는데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추웠으며, 무서우리만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호텔에 짐만 내려놓고 나와 몇 시간을 헤매 찾은 곳치고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실망하려는 스스로를 다독여 미술관을 거닐다 보니 아쉬웠던 첫인상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리더군요. 한때 루브르 미술관의 분관이었던 이곳에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걸작들 뿐 아니라 브뤼헐로 대표되는 플랑드르 시대 작품들이 즐비했습니다. 벨기에의 상징이 되어 버린 초현실주의 대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도 볼 수 있었고요.
일 때문에 안젤리나 졸리나 톰 크루즈를 만날 기회를 얻은 기자의 기분이 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유명인을 만난 듯 신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림 하나하나를 접하다 보니 어느덧 폐관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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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의 추락」, 브뤼헐, 벨기에 왕립 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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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르네 마그리트, 벨기에 왕립 미술관 | |
브뤼셀을 떠나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간 곳은 내셔널 갤러리였습니다. 꼭 일 년 전 저를 매혹시켜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인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는 곳이지요. 사실, 고흐는 해바라기를 여러 번 그렸고 이곳의 그림도 그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제 눈에는 이것만큼 생명력을 뿜어내는 해바라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고흐 자신도 가장 만족한 「해바라기」였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다시 만난 「해바라기」는 여전히 태양처럼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전 해와는 많이 다른 관람객이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그저 무심히 스쳤던 그림들이 모두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왔고 언제고 감동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관람객들이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주는 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가가서 보니 눈부신 푸른색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었습니다. 사소페라토라는 생소한 화가가 그린 이 마리아의 초상은 복잡한 이콘이나 심오한 철학적 함의가 없는 단순한 그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꼭 책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제목과 화가 이름을 영문 표기 그대로 집필 수첩에 적어 넣고 별표까지 그려 넣었습니다. 사진촬영이 가능했던 파리에서와 달리 손이 좀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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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사소페라토, 런던 내셔널 갤러리 | |
제가 이번 취재 여행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테이트 브리튼을 빼놓지 않고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런던에 와서 미술관에 들르는 여행객들은 대개 내셔널 갤러리와 테이트 모던까지를 관광 코스로 봅니다. 테이트 모던에서 바로 강 건너편에 있는 테이트 브리튼은 동선이 이어지는 다른 관광명소도 없고 지하철역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거든요. 게다가 보통 사람들이 봐서 알 만한 그림들이 별로 없습니다. 여기는 근대 이전 영국 화가들의 그림이 주로 전시되어 있는데,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시기 영국 회화는 미술사가들에게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거든요. 오늘날 현대 미술의 중심에 있는 영국의 위상을 말해주듯 자매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은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말이지요.
덕분에 한산한 전시실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플랑드르 회화와는 전혀 다른 그림들을 마음껏 감상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윌리엄 터너의 장엄한 그림들,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는 워터하우스의 인물화, 영국 시골 풍경이 정감 있는 존 커스터블의 그림들에 푹 빠졌지요. 여기서 본 워터하우스의 「샬럿의 여인」은 나중에 책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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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 윌리엄 터너, 테이트 브리튼 | |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며 때로 한숨을 쉬기도 하던 그림, 「희망」도 여기서 만났지요. 이 그림은 제법 대작인 데다가 직관적으로 의미를 알아채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어 저를 한참 붙들어 두었습니다. 멀리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림을 감상하다가, 다가들어 그림의 제목을 보게 되었을 때의 ‘아…!’ 하던 충격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처참한 광경이 이름하여 ‘희망’이라니오! 이 그림은 책의 가장 마지막에 들어가게 됩니다. 책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할 그림을 모두 여기서 만났으니 ‘이곳을 빼놓지 않고 들른 게 가장 잘한 일’이라는 자평이 허언은 아닌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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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제임스 와트, 테이트 브리튼 | |
테이트 모던과 런던 거리의 작은 미술관들을 보며 팝아트의 중심을 미국에서 런던으로 옮겨 온 영국 예술가들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예술관에 공감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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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 런던 | |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친 저는 귀국 준비를 했습니다. 수만 점의 그림을 보고도 영 부족한 듯하고 못내 아쉬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도 일정에 넣고 싶었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지요. 마지막까지 클림트가 있는 빈과 브뤼셀을 저울질하며 일정을 맞춰 보던 고뇌의 시간이 기억납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다시 볼 수 없을 걸작들을 눈에 담게 되어 더없이 행복했던 시간이었지요. 이제 서울로 돌아가면 고된 노동의 과정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걸 두고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고들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