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가수 신해철은 「도시인」이라는 노래를 통해 이렇게 읊조렸다. “한손에 휴대전화/ 허리엔 삐삐 차고/ 집이란 잠자는 곳/ 직장이란 전쟁터/ 회색빛의 빌딩들/ 회색빛의 하늘과 회색 얼굴의 사람들/ This is the city life”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도시에서 우리는 어떤 심리를 갖고 살고 있을까. 도시인을 묘사한 저 노래의 가사를 듣자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듯한데, 도시에 산다면 당신은 혹시 어떤가.
도시의 삶은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다. 복잡다단하기도 하거니와 공통분모도 찾기 힘들다. 그러면서 어떠한 전형성을 갖는다. 도시는 도시인을 만들고, 도시인은 다시 도시를 형성한다. 사람과 도시는 돌고 돌아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다. 그렇다면 도시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내 자신의 것일까, 도시의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내 욕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혹시 도시가 주입한 것은 아닐까. 내가 맞닥뜨린 갈등은 내게서 파생한 것일까, 아니면 도시가 만든 것일까.
우리나라에 현대적인 도시가 들어선 것은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시는, 도시의 삶은 지금-여기의 우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요소다. ‘도시국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만큼 국가와 도시는 밀착해 있다. 그래서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건국대 교수가 도시(인)에 청진기를 들이댔다. ‘심리학의 잣대로 분석한 도시인의 욕망과 갈등’이라는 부제를 갖고
『도시심리학』(해냄 펴냄)을 내놨다.
책을 읽다보면 (도시에 사는) 우리의 이야기가 맞다고 맞장구를 치게 된다. 아마도 너 나 할 것 없이 “맞아, 도시의 삶이 이래”라고 고개를 끄덕끄덕. 가령 노래방이라는 공간에서의 우리.
“동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 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용기는 그만큼 안전한 공간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 노래가 흐르는 몇 분 동안은 나도 김현식이고 서태지다. 안전한 환상의 공간이다.”(p.193) 그러함에도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와 불러야 하는 노래 사이의 딜레마”(p.196). 사소하지만 절묘한 진실(들).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심리를 다룬다고 어쩌면 발생할 수 있는 오해. 자기계발서? 물론 아니다. 긍정의 힘을 꾸역꾸역 주입한다거나 ‘나를 따르라’는 식의 인도주의적(?) 관점은 없다.
“솔루션이 개인마다 달라서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누구나 느낀다.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고 나쁜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구조물이나 현상 정도까지만 이야기하고 문제는 자신이 풀도록 했다.”
누군가는 ‘도시적 병리’라고 일컬을 만한 게재(들)도 있을 것이다. 지름신의 강령과 같은 쇼핑 중독. 그러나 하 교수는 그것이 마냥 병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소비를 통해 스스로를 치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로 한쪽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아주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살다보면 반복되는 쓰임들, 어떤 키워드나 주제들이 있다. 개인과 조직?집단, 본능과 양심?도덕 등 이런 부분들이 도시적 삶에서 함께 드러난다. 커피나 와인 같은 것도 도시적 현상 안에 존재하는 그런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되는 게 아니다.”
책이 더욱 공감을 얻게 되는 부분은 도시에 살고 있는, 도시적 삶을 영위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청진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기에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는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일방적인 훈계와 처방이 아닌, 함께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의 얘기다. 그러니까,
“세상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도시적 삶 속에서 사유하는 것”을 담았다.
당초 책의 아이디어는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가 지금의 도시(서울)에 와서 겪는 얘기였단다. 가제도 그랬다. ‘프로이트가 서울에 온다면’. 낯선 곳에 떨어진 정신분석가가 서울 혹은 도시의 특징적 현상을 봤을 때 나오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인 셈이었다. 물론 그랬던 것이 현재의 콘셉트로 바뀌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조망까지 가능하도록 직조됐다.
“강준만 씨나 진중권 씨가 사회학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키워드를 뽑아낸다면, 나는 미시적으로 쪼개서 들어간다면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부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당초 24개 꼭지로 나눠 도시에서의 24시를 다루려고 했다. 주제 위주로 편집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중복되는 것을 합치다보니 지금의 22개 꼭지가 됐다.”
도시, 짧아진 리듬
지금, 도시는 바쁘다. 속된 말로 정신줄 놓고 사는 지경이다. 바뀌기는 왜 그렇게 빨리 바뀌는지. 그러다 보니 도시인들도 그 속도에 맞춰 발놀림을 가져가는 수밖에 없다. 하 교수가 진단하는 지금의 도시는
“‘Response’에 대한 기대 수준이 짧아졌다.”
불과 몇 년 전을 생각해 보라. 가령 휴대폰이나 삐삐가 없었을 때.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어땠나.
“30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었다. 막연히 기다렸다.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그랬다. 2주의 텀이 있었다. 오고 가는 시간의 리듬이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이메일은 길어도 반나절이면 된다. 커뮤니케이션 할 때의 리듬이 짧아졌다.”
확실히 조급해진 면도 있고, 기다림의 미덕도 희석됐다. 사유하는 시간도 혹시 짧아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누가 억지로 그렇게 바꾸려고 해서 그리된 것도 아니다. 도시인들은 그렇게 기계에 의존성이 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제 도시에서 내비게이션 없이 길을 나서지 못하겠다는 엄살(?)을 부린다. 혹자는 내비게이터 덕분에 좀더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있다고 예찬(?)을 하고.
한편으로 기계와의 싸움을 불사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자주 가는 길인데도 내비게이션은 최단 거리를 찾는답시고 더 불편한 길을 가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어떡하겠는가. 내비게이션에 대한 불신.
“도시적 삶은 기술에 대한 이해를 하고 의존도 하지만, 내가 가진 정보와 싸움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분리와 연결 사이를 오가는 도시인
하 교수에게 ‘도시’란?
“개인화를 지향하지만 끊임없이 커넥션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집약된 곳.” 사생활 보호를 외치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대개의 도시인이다. 그런 반면에 한시라도 휴대폰, 미니홈피, 블로그 등을 통해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이 또한 도시인이다. 분리와 연결 사이에서 종횡무진 한달까.
그렇다면 이런 모순이 ‘나쁜’ 것일까. 하 교수는 아니라고 답한다.
“모순이라고 나쁜 건 아니다. 서로 보완할 수가 있다. 스타벅스와 커피믹스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보완하는 관계다. 커피믹스는 음식점에 함께 가서 설렁탕으로 통일하듯 취향을 숨기고 소통을 선택할 때 최적화된 솔루션이다. 동질감이나 개인화는 서로 싸우는 게 아니고 공존한다.”
남과 다른 나의 ‘취향’을 위한 커피전문점의 커피는 ‘개인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늘 그런 상황만 닥치는 것은 아닌 법. 무선택의 편리함이란 것도 있다.
“취향을 감추는 커피믹스 안에서 나는 익명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여러 사람과 함께한 자리에서 나만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자칫 피곤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군중 속에서 익명으로 남을 때 그 안에서 구성원으로서의 결속력은 강해진다.”(p.76)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다양한 나를 존중하라.”고 말을 건넨다.
“내가 맞고 네가 틀린 게 아니다. 취향을 존중할 때 우리는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수많은 갈등은 내 취향은 맞고, 네 취향은 틀리다는 것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지금 틀림과 다름이 섞여 있다. ‘틀렸다’고 하면 나는 1이고, 너는 0이다. 나는 변화할 이유가 없는 거다. 나는 이렇고 너는 이래라고 얘기하면, ‘다른’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취할 수가 있다.”
결국 그것은 성숙한 사회의 바로미터다. 즉, 다양성이 얼마나 존중되고 있는가의 문제. 다문화가정, 이주노동자가 차별 받지 않고, 인디밴드나 프리랜서들이 왜 이런 걸 하고 사느냐고 타박 듣는 것이 아닌 삶이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
“어느 한 출판사가 특정한 분야의 책만 내도 유지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될 때 꽤 다양하고 괜찮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이 인구 1억 명이라고 하는데, 인구가 5,000만 명이라고 해도 생각과 관대함의 수준이 올라가면, 굳이 1억 명이 안 돼도 괜찮다고 본다.”
앞으로의 변화
하 교수는 이 같은 도시심리의 분석을 토대로, 앞으로 5~10년이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삶이나 이모작을 꿈꾸는 소수가 많아지고 있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가 50대에 들어가면서 은퇴를 준비하는 한편, 40대 중반 밑으로는 개인적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부모 세대는 자식에게 모든 걸 투자하고 부양받길 원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우석훈 교수가 한 얘기인데, 88만원 세대가 불쌍하다는 거다. IMF 때문에 10대를 박탈당하고 지금 청년 실업의 위기에 처해 있다. 반면 민주화 세대가 키운 아이들이 지금의 10대다. 인문학의 세례를 받고 다양성도 확보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사회를 주도하는 오피니언들이 노인이 돼 너무 보수화되기 전에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또 옛날에는 변방이었는데, 지금은 30~40대가 소비 계층이다. 물론 그들은 애들에게도 투자하지만 상당수가 나를 위해 투자한다. 내 즐거움을 위해 쓰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하나의 변화 조짐이라고 하 교수는 말한다. 그동안 사회가 요구해 온 무한 경쟁이 버거운 것도 있고, 먹고살 만해졌다는 것도 이유란다. 이래저래 용돈 쓸 정도만 되면 크게 벌지 않고도 인생을 편안하게 보내고자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실패가 아닌 선택이고, 그걸 존중 받을 때 다양성이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올 하반기 상담 관련 책 나와
도시는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또 조금씩 변화할 것이다. 어떤 변화가 될지는 몰라도. 하 교수도 그런 도시와 함께 한발 한발 내딛고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와 정신분석’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은 그는 오는 8월 중순경부터 영상자료원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예정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계로 영화와 정신병리를 다룰 계획이다.
또 하반기에는 일간지에 연재한 ‘성질 연구’와 관련한 Q&A 상담 내용을 책으로 엮어 펴낼 예정이다. 그는 무엇보다 책을 많이 본다. 그만큼 많이 쓰면서 쓰는 고민도 많이 한다. 그의 바람은 그래서 한 챕터만 보고도 누가 썼는지 알 수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다. 도시의 삶은 어쩌면 그에게 그렇게 진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